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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바다 (사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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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사야서 34장 1절부터 35장 10절까지, 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심판에 앞서서 증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민족들, 그리고 땅 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증인으로 초청하십니다 "민족들아, 가까이 와서 들어라. 백성들아, 귀를 기울여라. 땅과 거기에 가득한 것들아, 세상과 그 안에서 사는 모든 것들아, 들어라"하시면서, 심판하기에 앞서서, 심판의 증인들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게 계십니다(1절)

그 다음에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특히 모든 민족들마다 가지고 있는 군대에게 분노하셔서 그들을 진멸시키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2절). 하나님께서 군인들을 죽이십니다. 그렇게 죽은 군인들의 시체더미가 거리에 쌓일 것이고, 홍수가 나면 산들이 무너지듯이, 피가 홍수처럼 쏟아져서 산들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입니다(3절). 이것이 바로 피바다 아닙니까

이어서 우주적인 재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땅만 그렇게 피바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져서 가루가 되고, 하늘은 마치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이고, 포도나무에 잎이 말라 떨어지듯이, 무화과나무의 잎이 말라 떨어지듯이, 하늘에 있는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4절). 또 하늘에서 하나님의 칼이 떨어져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그 칼이 하도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칼이 피에 흥건히 젖고, 기름기가 그 칼에 엉겨 붙는다는 것입니다(5-6절). 이러한 심판이 에돔에 내리면, 백성이 들소처럼 쓰러지고, 땅이 핏빛으로 물들고, 흙이 기름기에 엉킨다는 것입니다(7절). 이것이 바로 피바다가 아닙니까 이것은 바로 피의 제사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드리는 피의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손수 제물을 잡으시고 젯상을 차리시고 사람 고기와 짐승 고기로 제물을 삼고 사람의 피와 짐승의 피로 제삿술을 삼으셔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원한을 푸신다고 말하는, 몸서리치는 내용입니다(8절).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고나면, 에돔의 강들은 역청으로 변하고, 흙은 유황으로 변해 버리고, 온 땅이 역청바다가 되어 버리고, 밤낮없이 연기가 치솟아 영원히 잿더미가 될 것이고, 아무도 그 땅을 드나들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9-10절).

이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불모지에 각종 들짐승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모지에다가 펠리컨과 고슴도치의 거처를 만드시고, 부엉이와 까마귀가 와서 살게 하시고, 그래서 사람은 누구도 거기에서 살 수 없는 땅, 아무도 거기에다가 나라를 세울 수 없는, 그와 같은 땅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던 옛 궁궐, 거기에는 가시나무가 돋아나고, 그 요새에는 쐐기풀과 엉겅퀴만 무성해지고, 궁궐은 승냥이 떼의 굴이 되고, 타조들의 집이 될 것이며, 들짐승들이 이리떼와 어울리고, 부엉이와 솔개들도 거기에서 번식한다는 것입니다(11-15절)

그러면서 예언자는 말합니다. 여기서는 제가 <개역>성경의 번역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우리 나라에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쓰여졌다는 근거 구절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했을 때의 '여호와의 책'은 바로 성경책이고,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책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결함 사항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것, 곧 한 쪽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구절은 저쪽에 있는 다른 구절로 풀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짝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은 모두가 짝이 있는 것을 가르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된 것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책인 성경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사람이 받아 쓴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는 것은, 이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수집되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성경이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가끔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여호와의 책'은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각종 피조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여호와의 책'이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는 하나님께서 에돔 땅을 불모지로 만들고 거기에 펠리컨,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승냥이, 타조, 이리떼, 숫염소, 솔개 등 이런 것들을 거기에 살게 하셨는데, 이런 것들이 여호와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이라는 것은 11절 이하에서 15절까지 쭉 말한 그와 같은 악한 짐승들, 더러운 짐승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라는 대명사를 '이러한 짐승들' 이라고 실명사롤 번역만 했어도, 이것을 가지고 성서 영감설을 주장하는 그와 같은 오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 이 말은 이 짐승들은 암수가 다 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짐승들이 이러한 불모의 땅에 와서 살게 됩니까 이 짐승들이 이 땅으로 모이라고, 여호와께서 직접 입으로 명령하셨고, 여호와의 능력이 그 짐승들을 이 땅에다가 모아 들였기 때 그 짐승들이 그렇게 에돔 땅에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피바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모두 죽이시고, 그리고 생명이 있는 것들을 모두 죽이셔서 산을 피로 물들이고, 그리고 작은 언덕들이 그 흐르는 피 때문에 무너지는, 이와 같은 `피바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피바다, 심판의 현장, 이것을 우리가 한번 눈여겨 보자는 것입니다.

북한의 문학 중에 <피바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북한의 과학 백과사전 출판사에서 나온 <문학예술사전>에 보면 <피바다>에 관해서 아홉 페이지나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온 한 대목을 짧게 줄여 소개하겠습니다.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수령께서 조직 영도하신 항일무장 투쟁 시기에 창조 공연된 혁명연극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의 항일무력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이 작품이 일제의 만행이 얼마나 가혹했던가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잘 묘사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한 만행 속에서 한 여인이 독립 의식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세 자녀들과 함께 무장 투쟁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의식화의 발전 단계, 그리고 실천, 그리고 혁명에의 참여, 그리고 새로운 미래, 인간화된 공동체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확신, 이러한 것들이 이 <피바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북한에서 연극으로도 나왔고 영화로도 나왔고, 가극으로도 나왔고, 그리고 가요로도 나왔고, 소설로도 나와서 최근 우리에게까지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과 언어과학연구소에서 함께 편찬해 낸 <현대조선말사전> 에서 '피바다' 항목을 찾아 보니까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흘린 피가 차고 넘쳐서 이룬 바다라는 뜻에서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통치 계급의 살인만행으로 하여 혁명가들과 인민들이 흘린 그 피가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인 것을 비겨서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들면 북간도 피바다. 남조선 군사 파쇼 도당의 만행으로 하여 피바다에 잠긴 전라남도 광주시" 이와 같은 예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 <피바다>에서 어머니로 나오는 그 여자 주인공은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 이 <피바다>라고 하는 그 사회주의 문학의 주제와 주조음, 목적, 이런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여자 주인공 어머니는 많은 군중들 앞에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왜놈들의 토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어제는 귀여운 막내 아들을 원쑤놈들에게 잃었습니다. 원쑤들은 남편을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열 살난 막내 아들은 조그마한 가슴에 일곱 알이나 총알을 맞고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아직도 식지 않은 그 어린 것의 시체를 내 손으로 묻고 여러분과 함께 원쑤를 갚으려고 이리로 달려 왔습니다. 이것이 어찌 나 혼자만 당한 일이겠습니까 이 원한을 풀고자 우리의 아들딸들이 총을 들고 원쑤 결멸의 길을 나섰습니다. 내 아들도 유격대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밖에 없는 내 딸도 유격대에 들여 보내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 길은 혁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혁명을 해야 원쑤를 갚고 나라를 찾을 수 있고 장차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갈 때 피바다에 잠긴 우리는 반드시 독립될 것이며..."

아직도 그의 연설을 끝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피바다>라고 하는 그 작품의 주제는 원수를 갚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로 `원쑤를 갚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나 원쑤는 일본 그리고 일본 사람들의 앞잡이들 지주 계급 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피바다'라고 하는 것은 그 일본인들이 우리 조선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와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태워버리는 그러한 참극을 묘사한 말입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극대화하고, 무장 투쟁을 하는 것, 혁명 대열에 참가하는 것만이 종국에 가서 잘 살게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혁명만이 나라를 찾고 독립하여서 떳떳하게 사람답게 천대받지 않고 차별없이 잘 살게 되는 길이 라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식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 기필코 원수는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자',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을 하자. 그러면 `잘 살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사야서 34장 35장의 주제를 돌아가 보겠습니다. 34장은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하나님께서 화를 푸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신다는 것이 34장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34장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내용이 35장으로 이어집니다. 예언자 이사야서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의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 할 미래를 예견합니다. 불모의 땅 메마른 땅 사막에 꽃이 무성하게 피어, 그 불모의 땅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칠 미래를 예견합니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피며, 그 때에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을 예견합니다(35:1-2). 그러하니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축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고,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이제 꼿곳이 세우라고 합니다. 또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힘내! 무서워하지 말어! 이제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대. 하나님께서 오셔서 보복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대."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격려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격려를 받고서 눈이 멀었던 사람들의 눈이 밝아지고, 귀가 막혔던 사람들이 귀가 열리고, 다리를 절던 사람들이 사슴처럼 뛰어 다니고, 말 못하던 사람들의 혀가 풀려 노래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사막이, 그 불모의 땅, 주님의 책에 기록된 온갖 흉칙한 짐승들이 살던 땅, 그 황무지, 거기에 이제 샘이 터지고 냇물이 흐를 거라는 것입니다. 뜨겁게 타오르기만 하던 그 유황의 땅, 역청의 땅에 이제 풀이 돋고 늪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곳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가 살던 곳에 갈대와 왕골이 무성하게 자라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곳에 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원수는 갚았고 새로와진 그 땅에서 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 살게 된다는 것은, 피바다가 되고 불모지가 된 그 땅이 다시 생명이 넘치는 땅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넘치는 그 땅에는 거룩한 길이 하나 생기는데,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은 다닐 수가 없는 길, 어리석은 자들은 서성거리지도 못하는 길, 그리고 맹수가 얼씬도 하지 않는 길, 해방된 이들 곧 하나님께서 되찾은 이들이 한숨과 아픔을 잊어 버리고 행복에 겨워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으로 걸어 다니는 `거룩한 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34장의 분위기와 35장의 분위기가 너무 다릅니다. 작품 <피바다>의 논리대로 한다면 34장과 35장 사이에는 증오심으로 무장된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34장과 35장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작품 <피바다>와 구약성서 <이사야서>, 이 두 책에는 원수를 갚는다는 동일한 주제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피바다>에서는 고난당한 그 사람들 자신이 원수를 갚습니다. 우리의 원수이니까 우리가 원수를 갚는다는 것입니다. <피바다> 작품을 보면 한 마을이 피바다가 되었을 때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하늘도 무심하지"하고 탄식합니다. 그때 주인공은 "언제 하늘이 우리를 도왔습니까 왜 하늘에 기대합니까 우리가 총칼을 들고 무장을 하고 나서야 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격멸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잘 사는 나라가 옵니다."라는 논리를 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는 좀 다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사람이 원수를 갚지 않습니다. 이것이 작품 <피바다>의 경우와 다른 점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것을 보면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고난당한 사람 자신들이 원수갚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수를 갚는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억압당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원수를 갚는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억압당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하고 저 사람들 사이에 원수지간이고 우리는 억압받는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우리를 부당하게 억누르는 사람이라고 할 때,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저 사람들을, 단순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로 우리 대신에 저 사람들을 심판하여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사야서 34장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시는 것은 원수 갚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를 갚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원수를 갚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 자신의 한을 푸시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만, 우리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하나님이 친히 갚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원수들과 싸울 때, 같은 대상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실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면서 그 원수들에게 희생당했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시는데, 이 해방될 사람들 구원받을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되는 것입니까 가만히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오늘 여기 여러분들 앞에 서기까지 저 자신의 숙제, 아직까지 제가 풀지 못한 힘겨운 숙제입니다. 그러나 우선 이런 말씀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십니다. 그 새로운 미래는 시간상으로 새로울 뿐만 아니라. 사막이 생명이 넘쳐 흐르는 땅으로 바뀐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공간상으로도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 미래를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해방시키고 구원시킬 그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시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받을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동참은 작품 <피바다>에서 말하는 혁명일 수도 있고 인간화를 향한 모든 운동들일 수도 있고 시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꽃 혁명이라는 그와 같은 말로만 규정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억압받는 이의 원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원수와 일치하는가 구약성서 안에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억압을 받는다고 하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소설로 표현한 사람이 바로 엘리 위젤이라고 하는 유태인 태생의 작가입니다. 또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위르겐 몰트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주제를 신학화시켰습니다.

1933년 1월 30일부터 시작해서 1945년 5월 8일에야 끝난 나치의 600만 유태인 학살 사건, 일컬어 `대희생제사'라고 합니다. 이 살육은 유태인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1972년부터 1977년까지 5년 동안 예루살렘에 살면서 우리 나라에서 오늘 순례자들의 안내자가 되어 이스라엘 안에 있는 유태교와 기독교와 모슬람교와 기타 다른 종교의 성지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다녀본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수 많은 역사적 장소, 고고학적인 발굴 지역, 그리고 종교의 유적지들 중에서 방문객들에게 가장 큰 감명을 주는 것은 예루살렘의 '600만 유태인 희생기념관' (야드 바셈)이었습니다. 나치 유럽에서 죽어간 600만명의 원혼을 달래는 기념관입니다. 기념관 안에 전시된 사진들과 여러 가지 유품들은 유태 민족이 이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당하던 온갖 학대와 저주와 치소와 모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여인들은 젊은이와 늙은이를 가릴 것없이 나체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러한 사진들이 그대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강제 노동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그러한 모습들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하다가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걸려서 시커멓게 타죽는 사진들이 확대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스실에서 집단으로 질식되어 죽어가는 장면,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을 받는 장면들, 그야말로 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들입니다.

당시 독일의 의사들은 인체의 연구를 하기 위해서 동물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독일 사람들과 신체 구조가 똑같은 유태인들을 가지고 얼마든지 생체 실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진열장에는 주먹만한 금덩어리가 하나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죽은 유태인들의 시체 더미에서 시신의 입을 벌리고 금니에서 빼낸 금조각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모아서 하나의 주먹만한 금덩어리를 만든 것입니다. 다른 한 진열대에 가 보면 안경 더미로 가득찬 큰 창고를 찍은 진이 나옵니다. 죽은 유태인들의 얼굴에서 벗겨낸 안경들입니다. 또 옆을 보면 보다 더 큰 더미가 있는데 죽은 사람들의 신발을 모아 놓은 더미입니다. 확대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커다란 어른들 신발 사이로 아주 귀엽게 생긴 어린이들의 구두들도 보입니다. 폴란드, 러시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프랑스, 벨지움, 룩셈브르크,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나치 유럽 15개국에서 어린이 150만명이 포함된 600명이 유태인들이 희생 제물로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원시 시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금부터 오래되지도 않은 1933년부터 45년 사이에, 그것도 문명 국가들의 대륙 유럽에서 빚어진 인류 역사의 부끄러운 비극입니다. 이 기념관을 보고 나오는 이들마다 똑같이 하는 말은 이런 일이 지구상에서 다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반응이 이미 희생 제물로 사라져 버린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것을 저는 늘 생각해 봅니다.

독일 신학자 가운데 위르겐 몰트만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 폴란드의 마이다넥 유태인 집단 수용소의 낡은 건물과 거기 남겨진 흔적들을 복 그날 그는 이런 그을 썼습니다. "그때 차마 나는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수천 개나 되 보이는 여기저기 흩어진 아이들의 구두들, 찢겨진 옷, 여기저기 흩어진 머리 팔 무더기, 이빨 조각들... 나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만 땅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때 유태인들이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들의 하나님은 과연 그들과 함께 게셨던가 희생당한 이 사람들은 부활할 수 있을까 희생당한 이 사람들은 부활할 수 있을까 독일인 목사 몰트만은 유태인들이 600만 동족의 가혹한 진명을 보고서도 어떻게 그들은 아직도 그 하나님을 믿고 있을까 어떻게 아우슈비츠 이후에 하나님 신앙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엘리 위젤이 그의 책 <밤>에서 써 나가고 있는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사건 한 토막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몰트만의 질문에 해다의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몰트만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600만 명이나 죽어갈 때 그들의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 하는 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동족이 그렇게 무참하게
600만 명이나 죽어갔는 데 어쩌면 유태인은 아직도 그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믿고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어떤 해답의 실마리를 몰트만은 엘리 위젤의 자서전적인 소설 <밤>에서 찾습니다. 수용소의 유태인 가운데서 두 유태 남자와 한 어린이가 교수형을 받고 있는 동안, 다른 유태인들은 그것을 지켜 보고 있어야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물 세 사람은 의자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랑의 목은 똑같은 순간에 올가미에 끼워졌다. `자유만세!' 어른 두 사람은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이는 말이 없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그 분은 어디 있는가 내 뒤에서 어느 누가 물음을 던졌다.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있자, 세 의자가 쓰러졌다. 수용소 전역에 정적이 쫙 끼쳤다. 지평선 위로 해가 넘어 가고 있었다. '탈모!' 수용소 소장이 고함쳤다. 우리는 울고 있었다. `착모!' 그리고 분열 행군이 시작되었다. 두 어른은 이미 살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늘어진 혀는 부어 오른 채, 푸른 색깔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아이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반 시간 이상이나 거기에 그대로 두어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버둥거렸고, 우리의 눈 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서서히 당하면서 죽어갔다.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 했다. 내가 그 앞을 통과했을 때 소년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의 혀는 여전히 붉었고 두 눈도 아직 흐려지지 않았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또 물음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그에게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그 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 그날 밤의 국맛은 송장같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바로 구약성서에도 널리 퍼져 있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박혀 있는 생각입니다 우리들이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고난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수 갚으시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힘없이 축 늘어진 손 그대로 가지고 있지 말고, 힘을 내고, 휘청거리는 무릎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 말고, 이제 무릎을 꼿꼿이 세우고, 서로 이웃을 향해서, "힘내! 무서워 하지 말어 !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대." 이와 같은 말로 서로 격려하는 동안, 감겼던 눈 뜨이고, 막혔던 귀 열리고, 절던 발 이제 뛸 수 있게 되고, 막혔던 입 열리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언제나 새롭게 변혁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새날이 밝아옴을 선포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이사야서 34장과 같은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35장의 새날이 밝아 옴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기독교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용기를 주시는 성령을 믿으며 어떠한 절망과 역경속에서도 희망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기독교의 신앙 고백에는 절망이 설 자리가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이고, 그러기에 그 원수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이사야서 34장이 이사야서의 끝이 아니듯이, 피바다와 불모지가 인류 역사의 끝도 아닙니다. 이사야서 35장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에 무한히 펼쳐지는 미래를 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증오심과 복수의 화신인 인민의 칼에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과 원수 갚으심, 거기에서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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