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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싸움이 어디에서 (약 0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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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들로 끌고 나아가 쳐죽인 후 오늘까지 인류 역사에 일어난 큰 전쟁만도 일만 오천 번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온 세계 인류는 평화를 그렇게 원하고 있지만 전쟁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일본 남쪽 큐슈 지방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평화의 공원이 있는데 세계 각국에서 돌을 가져다가 크고 웅장한 평화의 탑을 세웠습니다. 어이 없는 것은 평화의 탑을 세운 그 이듬해 그들의 손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평화회담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이 세상에 싸움이 계속되는데 그 싸움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1.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1절 이하를 보세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모든 싸움의 근원은 욕심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욕심에서였습니다. 나라를 좀 더 넓혀 보고 싶은 욕심, 지도를 바꿔보고 싶은 욕심이 엄청난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키케로는 “욕심이 증오를 낳고 증오는 전쟁을 낳는다”고 하면서 “바로 이 욕심이 개인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국가를 망쳤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 속에 일어나는 갈등은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독한 시기와 다툼은 우리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죄악의 본질이 무엇입니 까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심입니다. 우리는 사실 정욕과 본능을 충복시키려는 이기심 때문에 자신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자신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투는 사람을 보면 심리적으로 그 사람 자신의 내적인 갈등이 심각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와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이 욕심이 결국은 무서운 죄를 범하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가서 위험을 느끼고 자기 목숨만 보존하려는 이기심이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부끄러운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간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여리고 성 점령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고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군대라는 이스라엘 군대가 완전히 실패하는 망신을 하게 되었고 결국 아간 자신도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는 비극의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2절에 뭐랬어요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룰 수 없는 끝없는 욕심이 우리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살인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과 영성을 짓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과 실수를 파헤쳐서 한 사람의 인격을 생매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기심 때문에 빚어지는 다툼으로 결국 초라한 자신의 모습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싸우는 마음을 가지고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는 얻을 것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우리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기도의 줄이 막힙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십니다. 이사야서 1장 11절 이하를 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 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기도는 회개의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시편 66편 18절에도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의 성자 조지 뮬러는 누구보다도 이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5만번 이상의 기도를 응답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과 삶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살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습니까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지요. 이것은 십계명의 다른 아홉 가지 계명과 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왜 도둑질을 합니까 탐심 때문이 아닙니까. 탐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입니다. 이 탐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땅보다 두터운 게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충족시키려는 사람은 끊임없이 비참해집니다.

그래서 3절 말씀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기심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2.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과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자신과 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잘못된 관계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3장 4절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으면 세 친구를 얻습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는 원수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고 롯은 세상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친구였던 롯은 자신은 안과 밖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비참하게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세상과 친구된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다 보면 세상을 본받게 되어, 세상이 정죄를 받을 때 함께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으려면 세상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하나님만을 순결하게 섬기지 않고 세상과 짝하는 것을 영적인 음행이라고 경계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대적관계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의 본능적 욕구대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지배하심을 좇아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령의 지배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육신은 서로 거스리고 대적합니다.

로마서 8장 4절 이하를 보세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욕구를 이루어 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은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재산을 팔아서 헌금을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드리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헌금의 동기는 바나바라는 사람이 밭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는데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보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 값을 전부 다 바치려 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은 숨기고 반만 바치면서 의레 전부 바치는 줄로 알고 칭찬할 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전부냐”고 물을 때 절반이라고 말했어도 모르겠는데 전부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이 성령을 거스려 범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끊임없이 성령과 갈등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 5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를 영적으로 평안함과 거룩함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부패한 본성을 좇으려는 욕망이 일어날 때 시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시기입니다.

세상과 육신의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인 것처럼 마귀도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6-7절에 보세요.

“그러나 더욱 큰 은사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했습니다.

마귀의 궁극적인 번죄는 자존심이었습니다. 천사장이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 자존심이요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교만은 마귀의 영성입니다.

우리 주님의 영성은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6장 16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 중에 제일 처음 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교만합니다. “내가 지극히 높은 곳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이런 사람들은 섬기는 자리에 서기보다도 항상 지배하는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성경에 꼭 한 곳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주 좋지 않게 소개되었습니다. 요한 3서 9절에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 관해서 성경은 아무런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이 성경에 우리를 기록하신다면 무엇이라고 쓰실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배하는 자리에 있기 보다 겸손히 섬기는 자리에 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형제와의 싸움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에 뭐랬어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11-12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정욕으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강령이고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면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대강령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말씀의 명예와 영광을 깨뜨리는 자리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니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선하고 아름다워야 할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어둡고 우울한 비극적 갈등으로 변질되는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롯과 아브라함의 싸움, 가인과 아벨의 사건처럼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슬픈 일입니다. 다윗과 압살롬 부자간에 있었던 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도 형제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싸움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야고보는 비통한 마음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롭게 일어나는 최근의 싸움이 아닙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싸웠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자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되지 못한 에베소 교회의 비극을 전제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할 때도 “유오디오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두여인의 갈등이 교회의 분위기를 어둡게 했던 것 같습니다.

왜 형제간에 싸움이 생깁니까 형제들 간의 비방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지위를 탐내어 다투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누가 더 많은 각광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자주 싸웠습니다. 오늘도 이것 때문에 형제가 싸우고 서로 헐뜯는 일이 있습니다. 마귀는 박수를 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이런 위기속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온갖 박해와 고난을 서로 사랑함으로 이겨냈습니다. 이 사랑이 식어질 때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죄를 고발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른 형제에게 충고할 필요를 느끼시면 갈라디아 6장 1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 이 교훈을 잊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이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다툼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약화시켰습니다. 이런 싸움은 항상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와 바울의 권면대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절을 보세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했습니다.

순복이란 말은 군대의 용어입니다. 이 말의 뜻은 포가 무조건 항복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부하가 상관의 명령에 불순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이론의 종지부를 찍고 창조주 하나님께 순복할 때 하나님과의 싸움이 끝날 수 있습니다.

8절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 할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더러 “손을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 옛날 제사장들이 지성서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 손을 씻었던 것처럼 모든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교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싸움은 그치고 주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싸움을 끝내려면 회개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범죄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주변은 온통 싸움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싸웠습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눈물로 요를 적시며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부하들도 평안치 못했습니다. 죽이고 죽는 음모만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싸움이 게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심령은 여름 가뭄의 마름처럼 바싹바싹 타고 주의 손이 그를 눌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억누르던 모든 것을 벗겨 주셨습니다. 그때 다윗의 싸움은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보다 더 심각한 싸움이 우리 속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끝나야 평화가 옵니다.

우리의 싸움의 원인은 결국 하나입니다. 마귀와 싸움입니다. 마귀에게 붙잡히면 나 자신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형제와 싸우게 되고, 하나님과 싸우게 됩니다. 마귀를 대적합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영광과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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