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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인생을 사랑하라 (렘 01:4-10, 고전 13:1-13, 눅 04: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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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과 '자기 인생을 사랑한다'는 말을, 저는 엄격 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좀 이기적인 면으로 치우쳐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자기 인생을 사랑한다'는 말은 얼마든 지 건강한 쪽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뒷뜰에 있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것에 인생을 비교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과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거름과 비료를 주고, 병에 걸려 죽지 않게끔 적절하게 약을 치며, 가지치기를 알맞게 해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한다면, 그 사과나무의 주인은 그 나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 다.

사과나무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열심히 돌보며 가꾸듯이, 자기 인생을 그 와같이 열심히 돌본다면, 그래서 건강한 삶을 살아서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한 다면, 그는 자기 인생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과나무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아무리 애써도 좋은 사과를 맺지 않 을 것 같으면 그 사과나무를 베어내고 다른 품질 좋은 사과나무를 심든지, 아 니면 접붙이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품질이 안 좋을 것 같으면 잘라내든지 접붙이기를 해야 합니다. 잘라낼 수 있는 권한은 하나 님께만 있으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선한 인간으로 접붙임을 받아 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이미 품질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이제 잘 가꾸고 돌보 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한다면, 자기 인생을 사 랑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이란, 어떤 인생을 말할까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볼 것 같으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을 아무리 많이 구제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바울 선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인생을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하며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 니다. 좀더 구체 적으로 말하면, 자기 자신과 가족만이 아닌, 그 이외의 사람 들을 잘 돌보고 아껴주며 살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잠시 소개해드렸던, 이영호 전 체육부장관의 〈인생이란 예 행 연습이 없는 마라톤이야〉라는 책 내용 중 일부를,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분이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 중, 어떤 건강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강사가 하는 말이 "남을 돕지 않으면 뭣 때문에 사느냐 "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영호 교수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강사는 의사였는데, 환자를 진료하게 될 때에, 그 환자가 자기만 생각 하는 사람이라 판단이 되면 아주 냉정하게 대한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은 애써 살려줄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남을 돕겠다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 만 해도 너무 바쁜데,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에게 시간을 낭 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영호 교수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최대 걸작품을 찾는다면,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스스 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고, 남을 돕는 자를 도우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개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와 민족을 위하여 하나 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어디든지 가야한다고 하면서 예레미야를 부르셨던 것입니 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스스로가 원하는 삶은 이제 포기하고 하나님 뜻대 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발을 뒤로 뺐습니다. [저는 말할 줄도 모르고 너무 어린 사람입 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그런 소리 하지 말라! 내 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내가 가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내가 시키 는 대로 말만 전하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렘1:7).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니, 너는 어떤 삶도 무서워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렘1:8).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보호해 주어야 할 인생! 그러한 인생은 값이 있는 삶입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만 위하여 살아가는, 그러한 이기적인 인생 이 아니라, 이웃과 민족을 위하여 사는,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 그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삶이 옳은 것인 줄 알았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했지만, 막 상 주님의 부름을 받고 보니 두렵고 떨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웬만한 사람이면 거룩한 인생을 살고 싶어합니다.

처음부터 맘 먹기를, 가시노릇하면서 남들이 싫어하는 일들만 저지르겠다는 생 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뭔가 빛이 되는 일을 해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이 만인의 공통된 마음이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아끼는 인생, 곧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만한, 그런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아니면, 아무 쓸모가 없어서 베어버려야만 하는 사과나무 처럼, 이 땅 위에서 있을 필요가 없는 무가치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요 그래 서 이영호 교수가 말한 그 의사 말마따나 '이 세상에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그런 무익한 존재는 아닌지요 만일 살아있을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면,

1.그는 자기 인생을 사랑하지 못한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그만두고서라도,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무익한 인간' 이라 생각한다면, 오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런 사람은 결코 무익한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주를 위하여 일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딱한 사람은, 거의 모든 사람이 배척을 하고 있건만, 자기 혼자서 의롭다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영호 전 장관의 말을 인용해 볼까 합니다. 그의 책 206쪽에 있는 글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믿음 속에서 바로 사는 길을 추구하는 것 이 지헤로운 삶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장담하지 말고 ……"라고, 그는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왜 무엇 때문에, 자기 인생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그 이유를 깨달아, 바로 사는 길을 찾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①주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거부하며 배척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4-10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쓰시려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죽을 지도 모를 위험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레미야를 미워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를 미워하셔서 죽을 고생을 시키신 것이 아닙니 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를 잉태되기 전에 선택한 귀 한 아들이기에, 그래서 그로 하여금 값진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런 일을 맡기 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손해가 나는 일을 시키실 때가 종종 있습니 다. 마음 속에 누구를 도와야겠다는 감동이 생겨서 막상 결행하려 하면, 너무 나 엄두가 안나는 것입니다. 도와주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핑계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시 키시는 일이 좋은 일인줄 알면서도, 내 계산을 먼저 했습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좀 더 박차고 나갈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렇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 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마는 것입니다.

②그 결과, 사랑이 없는 헛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의 말씀을 보면, 남을 구제하는 일까지라도 사랑이 없 으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참 사랑의 삶을 살기란,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저께 신문 사회면에는 재일 교포가 운영하는 MK택시 회사의 미담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택시 17대를 고오베 시(市)로 급파하면서, '무조건 가서 도와주라'는 명령을 유봉식 회장이 내렸다는 내용입니다. 손해 여부나 이미 지 제고를 떠나서 무조건 도와 주라는 회장의 명령에 따라, 봉사 정신이 투철 하기로 이름난 MK택시들이 현장에 달려간 것입니다.

지금까지 10일간 계속 봉사하고 있는 MK택시는, 경영법칙 상 전혀 이치에 맞 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봉식 회장이 계산을 못해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자기 식으로 계산을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러 나 재차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되자,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아귀 에 쥐어져 있는 인간의 생명, 주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 겠는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순간에 지나지 않는 목숨 을 부지하려, 뜬 구름에 불과한 재산을 지키려고 안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 자신의 인생을 정말 값지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 또는 진리를 위해 생명을 내 걸거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재산을 내놓을만한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몇 푼씩 던져서 적선을 쌓음으로써 자기 위안을 삼을 뿐이지, 아픔을 심히 겪고 있는 이웃을 도움으 로써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명령하고 있습니다.

 2.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누가복음 4장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으면 서 고통을 겪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큰 힘과 용기, 그리고 소망을 안겨 주었 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향에서 말씀하셨을 때에는, 거부 반응이 많이 나타났습니 다. 실은 예수 님께서 당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열심 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건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습게 여겼 습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그러느냐'하면서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는 선 지자는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자 기 고향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작 진리 말씀을 듣고 환영해야 할 사람들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 은 사렙다 과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자기 먹을 양식이 없으면서도 마지막 남은 한 웅큼의 양식을 낯선 나그네를 대접하는 데 사용한 여인입니다. 먹고 난 후 죽으려고 했던 양식이요, 최후의 생명을 연장해 줄 양식이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이 여인은 아무 관계도 없는 손님 접대에 그 귀한 양식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다른 모든 유대인들은 가뭄으로 인 하여 다 죽다싶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여인만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 야기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것이지요.

그동안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왔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외면한 채 죽어가고, 이방여인인 사렙다 과부만이 하나님 말씀대로 삶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제 입술을 빌려서 지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 다.왜 일까요 지금 우리는 사랑받을 생각만 하고 있지, 사랑을 베풀 생각을 못하고 있 습니다. 용서받을 생각만 하고 있지, 용서할 생각은 못하고 있습니다. 이해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이해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움받을 생 각만 하고 있지, 도와 줄 생각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랑받을 준비만 하고 있지, 사랑할 준비를 못하고 있 기 때문입니다. 도움 받을 준비만 되어 있지, 도와줄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 습니다. 나는 지금 도움 받을 형편이지,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고 여 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는, 우리가 지금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 니라, 내 계산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나 도움받 아야 할 처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요 구하기보다는 내 입장과 형편을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사렙다 과부에게 음식을 요구한 엘리야 선 지자는 아주 못된 사람입니다.

주님 말씀을 가장 가까이 대하고 있는 우리들, 과연 우리는 지금 그 말씀의 참 뜻을 깨달아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말씀의 요체인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느냐 그말입니다. 예수님의 고 향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예수를 벼랑으로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려 죽 이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자존심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요 쓸데없 는 자존심만 가득하지, 정말 예수를 믿는 이로서 가져야 할 자존심은 거의 없 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늘 이 말씀을 들려주시고 있습니 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을 준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렙다 과부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부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일에만 발버둥치고 있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일하자고 하면 웬 핑계가 그리도 많은지 모릅니다.

자, 이제 우리는 먼저

3.주님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랑을 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 손해 같으나 결코 손해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일을 하게 하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미워해서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행하 게 하려고 그런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 니다. 우리로 하여금 값진 인생을 살게 하시려고, 괴로운 부탁을 하시고 있습 니다. 그것도 우리를 일찌감치 선택하시고, 지금 그 일을 맡기고 있는 것입 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감당하셨던 일, 그 일이 주 목사님에게는 괴로운 일이었 으나 주 목사님의 인생을 값있게 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은 우리를 괴롭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 치 있는 인생이 되도록 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오늘 돈을 써야 한 다면, 내 계획이나 소망을 무너뜨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나, 어쩌면 내게 있어 서 가장 소중한 업적이 되리라 믿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회피하려 했던 그 일, 만일 끝까지 그가 고집을 부리 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있 는 예레미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웅덩이에 빠뜨리움을 당하는 고난과 꽁꽁 묶여서 감옥에 갇히는 수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 면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자기 인생을 참으로 사랑하는 길을 이제 알았 으니, 이 길 말고 다른 길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살아있는 만한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자 기 사랑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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