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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지 (요 0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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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가장 잘 착각하는 것은 ‘왜 당연한 이 말씀을 믿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빛이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고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가 오셨지만 피조물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땅의 주인이신 왕이 오셨는데도 백성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 있는 이 세 가지 지적을 성경이 우리의 죄인된 것을 책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을 한다. 빛이 왔는데 알아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하나님이 오셨는데 그를 십자가에 못 박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은 한다. 왜 그런가 나는 믿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믿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보통 믿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본문의 결론은 13절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영접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영접이 불가능하기에 혹시 그런 사람이 생기거든 그 사람은 자기가 설명될 수 없는 기적을 통과한 줄 알아라 하는 이야기가 13절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기독교인이 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단순한 축복이요, 기적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예수는 누구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습관에 빠져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할 때 정당성을 제시하고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는데도 안 믿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 것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말씀한다. 이와 같이 빛을 비춰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자기를 만든 조물주가 와도 모르고 왕 되신 이가 와도 영접할 줄을 모른 자들이므로 그를 영접하게 되는 길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를 영접하는 자들이 많지 않은가 성경은 이렇게 된 사람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이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담겨 있는 자리이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 가장 많이 흔들리는 게 무엇인가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도 축복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우리의 우리된 특권과 사랑과 확신과 축복의 기초를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었고, 교회에 와주고 헌금을 내주고 기도하고 철야까지 했는데 나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적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요구들이다. 예수 믿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마태복음 20:28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는 보통 이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희생하시고 사랑을 베푸셨는가 하는 것에 너무 집중이 되어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장님인 것과 죽은 것과 멸망의 자녀인 것을 알고 오셨다. 그가 누구인지 우리가 몰라볼 것을 그분이 더 잘 아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침을 받았다.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믿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얼마 만큼 하나님을 안 믿는가 하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된다. 이것이 이해가 잘 안되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는가 쓸데없는 증거를 찾으러 다니게 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2차, 3차에 해당하는 것이다. 신자의 자기확인은 2차적이거나 3차적인 다른 것으로 가서는 안된다. 단 하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 하나로도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다. 우리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꼭 인정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신자만의 상징은 아니다. 죄인된 인류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3)
이 말씀이 요한복음 1:9-11에 나와 있는 말씀과 무엇이 다른가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다. 그들도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많이 베푸시고 일일이 간섭하신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겠는가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1:10)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무엇을 지적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인간이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것이 성경이 주장하는 바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구원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아는 자도 없고 관심을 가진 자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큰 기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 이사야 1장에 말씀했던 것과 같이 구약은 이렇게 끝이 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시고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지셨다. 이렇게 하셨어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의 얼굴을 보기 싫으니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저주의 말씀도 아니요 심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 후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전 역사에 걸쳐서 확실한 증거를 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일어난 기적, 즉 이미 손에 잡은 우리들의 축복과 약속들과 특권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으로 뜻으로 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우리가 오늘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은 나의 출발이 아니요 내가 내놓은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온 것을 알기 때문에 복받치는 감격의 고백이요 자신에 가득찬 비명인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셨는데 소경이 아닌 자를 심판하신다고 했다. 이 말씀은 너희 중에 소경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희 모두가 소경이므로 내가 필요하니 내가 너희로 보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9장이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9 이하에서 보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인 것이다.
요 1:9-11 말씀은 결코 꾸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이루어진 일이 영접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기적과 축복과 은혜 속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녀에게 이 이상의 축복은 없다.
그 어떤 축복도 첫 번째 축복을 능가하거나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삶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제 확인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이요 얼마나 대단한 기적을 통과한 것이요 우리에게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요 자랑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길만 남아 있다.
우리를 흔들 자가 없고 방해할 자가없고 다른 무엇으로 유혹할 비슷한 것도 없다.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누리고 승리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일들을 매일매일 맛보기로 결심하고 기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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