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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넘치는 삶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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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 게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기독교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 습니다. 사도요한도 오랫동안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는데 나이가 연만해 교회를 은퇴할 때, 성도들이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교훈을 달라고 간청하자 이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아 나에게 무슨 새로운 교훈이 있겠는가,우리에게는 오직 내 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새 게명이 있 을 뿐이다](요일 2:7)

영국교회의 어셔 감독은 이러한 새 계명을 가리켜서 제11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모세의 열가지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각 종교에는 나름대로 그 종교를 대변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공자는 [인(仁)을 말했습니다. 이 [인]은 어진 마음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에는 이 어진 마음이 있어야 바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은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가장 인간다울 숙다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는 [자비]를 말했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땅에 기어다니는 곤충까지 도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그 생명을 아끼는 것이 인간의 바른 도리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석가는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사람다 울때가 언제냐하면 그것은 사랑할 때라고 합니다. 사람이 누구를 진정 으로 사랑할 때, 그때 사람들은 누구나 천사가 되고 시인이 되고 삶의 가치를 가장 많이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원래 [사람]이라고 하는 파 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반드시 이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자비니다. 그래야 그곳 이 사람이 사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따뜻한 관심을 가져라 =

사랑은 상대방에게 따뜻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고 염려하고 돌아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서 우리들이 읽을 수 있는 첫번째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 가에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죄인들에게 가졌던 그 관심자,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반대 개 념은 미움이 아닙니다. 롤로 메이가 쓴 [사랑과 의지]라는 책을 보면 사랑의 반대 개념을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아직도 관심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노도 하셨고 매를 들기도 하셨고 재앙을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 시기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백성을 사 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것이 없으면 큰일입니다.

그게 곧 저주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 원이 쓸데없고, 병든자라야 쓸데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려 왔노라](눅5:31-32)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관심입니다.

  마음 열고 용서해야 =

사랑은 관심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 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내게 도움이 되는 사 람만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까지 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고가 따르고 고통이 따 르고 아픔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렇 게 받아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 서 그 사랑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랑의 모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 고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왜 가롯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 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영원한 미스 터리로 남을 것입니다. 어쩌자고 예수님은 그런 유다 같은 사람을 뽑 아서 돈 주머니를 맡기셨고, 복음전도하는 일을 맡기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의 총명이 어두워서 그랬겠습니까. 아니면 사람 을 잘못 보신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한번 바꾸어서 물어 보십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쩌자고 나같은 사람을 선택하시고,자녀로 삼으시 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용납때문입니 다. 용납도 조건부 용납이 아니고 무조건적인 용납입니다. 그래서 사 랑은 용납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말하는 전승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맨처 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천사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으셨다 고 합니다. [내가 이제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 각하느냐] 그랬더니 공의의 천사는 처음부터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만일 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보나 보지 않으나 법을 어기고, 온갖 죄를 지을 것이 뻔한데 무엇하려고 만드시냐고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진리 의 천사도 처음부터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모 두 거짓되고,속이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배반할 것인데 그런 인간 을 만들어 무엇하겠느냐고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성결의 천사도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만일 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장 차 그들이 부패한 하나님까지도 욕을 먹게될 것이고 세상을 망쳐 놓을 텐데 처음부터 단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비의 천사만 찬성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만드십시오. 만일 사람이 죄를 짓고, 공의를 버리고,진리와 성결에서 멀어지게 되면 내가 자비와 긍 휼을 가지고 그들을 붙들어 타일러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인도 하여 오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빗나간 죄인까지 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를 용 납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곧 용납입니다.

  주는 것은 아낌없이 =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데는 희생이 따르 고 수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자기의 것을 남에게 댓가를 바리지 않고 주는데는 어떤 뚜렷한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은총을 받은 어 떤 체험이 있든지 아니면 어떤 고마움의 경험이 있어야 이렇게 댓가 없이 줄 수 잇는 인생관을 확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도 받아본 사 람이 갚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갈2:20)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 홍수시대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랑이 차고 넘치고는 있 는데 행동이나 주머니를 터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말로만의 사랑의 시 대입니다. 그래서 말은 많은데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 은 말이 필요없는 것자비니다. 금혼식을 하는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금혼식을 하는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5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남편이 아내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50년을 사는 동안 영감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50년동안 그 누구보다도 더 깊은 정을 가지고 살아왔고 문제 하나없이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럴다데 현대인들을 보십시오. 사랑한다는 말을 아침 저녁으로 얼마 나 잘들 합니까. 어떤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하루에 한번씩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그날은 밥도 안준다고 합니다.그런데 사랑을 입으로 하는 것입니까. 문제는 말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정말 깊이있는 사랑 은 그렇게 헤픈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기뻐 하는것 =

사랑은 혼자서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울리고는 내 가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는 내가 행복 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기뻐함으로 내가 기뻐하고, 그가 행복 함으로 내가 행복한 것이고, 그가 웃음으로 내가 웃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불행한데 어떻게 나만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함 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후한 인심이 어떤 인심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술인심입니다. 비싼 술을 마시면서도 안마시겠다는 사람에게 기를 쓰 고 한잔만 더 마시라고 강권을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모든 인심 이 술 인심만 같으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술인심이 그렇게 좋은 지 아십니까.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술 좌석에서도 상대방이 기분 이 좋아야 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술 좌석에서 사람들이 모 두 기분좋게 마시는데 어떤 한 사람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 니 앉아있으면 기분이 나겠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나도 기분이 안좋 아지니까 강권해서라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기분이 좋아야 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함께, 더불어 기뻐하기 위해서 입니다. 상대방이 기뻐해야 결국 내가 기뻐지는 것입니다. 아내가 기 뻐야 내가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빨래하는 남편들이 늘어나 고 있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기뻐야 결국 내가 기뻐지는 것입니다. 상 대방을 울려놓고 내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함 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사랑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 다. 사도바울이 이 글을 쓸 때에는 하나의 모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를 모델로 삼아서 이 사랑의 노래를 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사랑을 이렇 게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해 행치 아니하 면,자기의 유익을 구치하며, 성내지 아니하며,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 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얼마나 감미로운 말씀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내가 새 계명 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 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복음입니다. 자꾸만 메말라 가는 시대에 이 사랑의 핵을 지니고 살면서 주께서 내 마음에 간직되 어있는 그 사랑의 핵을 터뜨리실 때마다 유감없이 터뜨리며 뜨겁게 살 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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