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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 1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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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 보면 사람은 개미만 하게 보입니다.

단지 사람 같아 보일뿐입니다. 남자나 여자의 분별이 없습니다. 아이 나 어른이 따로 없습니다. 피부가 하얀 것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백인 이나 검둥이라고 설음 받는 흑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돈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사치한 사람 꾀죄죄한 사람 구별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사람 같으면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지상에서는 한없이 높아 보이는 빌딩도 성냥갑과 다를바 없습니다.

화려한 고급 주택이나 개딱지 같은 판자 집이 따로 없습니다. 비행 기를 타고 지상을 벗어나면 이 세상은 손바닥 안에 있는듯 합니다. 창 공에 올라가서 지상을 내려다 보지 못한 사람은 땅을 초월하여 지구를 한눈에 보고 계시는 분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좀 더 높아져 볼 려고 저보다 낮은 자를 구박 합니다. 서로 잘나 보이려고 분칠하고 기 름 바르고 꾸며 댑니다. 물고 뜯고 권모술수가 만발합니다. 서로 누가 더 높으냐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뭘그리 대단하다고 서로 선악을 따집니다. 저는 옳고 남은 잘못 되었다고 아웅 다웅 얼러 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조금이라 도 제가 더 높아져 뵈려고, 더 잘나 뵈려고, 더 똑똑해 뵈려고 안간힘 을 다합니다.

이런 처절한 모습들을 저 위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 매한가지 입니다.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위로 치켜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악한 자를 벌하고 선한 자를 돕지 않느냐 합니다. 악이 득세를 할 때 선하게 살아 보려는 사람은 더욱 실망합니다. 때로는 원망이 앞서기도 합니다. 악한 자는 폭싹 망 하게 하고 선한 자는 왕창 잘되게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해때 이야기입니다. 교회가서 예배 잘 드리고 귀가 했습니다. 온 집이 온통 물벼락을 맞았습니다. 교회에 가지 아니한 사람들은 물이 들어 오니까 잽싸게 살림도구를 건져내어 피해를 감소 시켰다고 합니 다. 교회에 간 믿음 좋은 사람의 집이 더 많은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잘 믿는 사람일수록 더 원망이 절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요새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은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 버립니다.

어떤 어여쁜 처녀가 맞선을 보려고 소개를 받습니다. 총각은 법없이 도 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결혼할 수 없다고 거절 하더랍니다. 적당히 술수도 부리고 자기 앞 길의 출세를 위해서는 농 간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착한 자는 잘 되어야 합니다. 악한 자는 못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저 창공에 올라가 보십시 요. 과연 누가 착한 사람이며 악한 자란 말입니까. 누가 더 못났고 누 가 더 잘 났더란 말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누구는 더 낫고 누구는 더 못하며 누구는 더 선하고 누구는 더 악하더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앞에는 모두가 똑 같고 모두가 그 색깔일 것입니다. 모두가 같아 보이고 모두기 비슷할 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치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니라" 하였습니다.

예수 잘 믿고 착한 사람의 논에만 빗물이 찰랑 찰랑 넘치게 내리시 고 악한 자의 논은 물한방울 없이 바닥이 쩌억 쩌억 갈라지고 모포기 가 말라 비틀어 져야 하련만 하나님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똑 같이 대우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실까요. 왜 그러실까요. 우리 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모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은 악한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선하게 살 희망도 없고 그 길은 지옥을 향하여 직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서 3장 12절은 말합니다. "다 치 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 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 를 베푸신 것입니다. 나를 택정하시고 하늘의 의로 가득 채워주셨습니 다. 인간의 헛된 속임수와 같은 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공 의의 의를 입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 다. 주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의 피 의 공로를 믿음으로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의 시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입니다.

명동 골목의 군중을 창공에서 내려다 본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누가 누구인줄 알겠습니까. 누가 잘 났고 누가 못났겠습니까. 누가 옳으며 누가 잘 못되었겠습니까. 가려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황을 망원경으로 살펴 보십시요. 물론 망원경이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보는 도구라고는 하지만 명동 골목 전체를 한 눈에 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찍어서 렌즈를 맞추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을 것입니 다. 잘 생기고 못생긴것, 하고 있는 행동거지가 쓸만한 것인지 못된 것이지 낱낱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과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망원 렌즈를 나에게 맞춰주신 것 입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내게 맞추시고 나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4절은 주님의 눈을 불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 은 나를 살피시는 망원경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또한 2장 23절은 사람 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분이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마음과 뜻을 살핀 다는 것은 현미경과 같이 나의 지극히 작은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모두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공에서 내려다 볼때 모양이 같고 행동거지가 같은 사 람을 다 구별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망원 렌즈를 맞추면 그가 누 구라는 것을 압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그 마음의 생각하나 행 동거지 하나 빼놓지 않고 볼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인 망원경과 현미경으로도 그러할찐데 하물며 하나 님의 망원경 하나님의 현미경이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선택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와 같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 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주님은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 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 고 섬기게 된것은 내 스스로의 뜻이나 결정이 아닙니다. 주님의 망원 경에 잡혀서 주님이 현미경으로 보시듯 나의 모든 것을 보시려고 나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선택의 신앙에 굳게서야 합니다. 무식하여도 실패하여 도 못낫어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 님이 나를 택하신 것은 내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나의 잘못과 연약 과 부족을 아시고도 나를 택정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잘 알지 못하고 택하였다가 비위에 맞지 않으면 버리게 됩니다.

내 부족과 실수를 아시면서도 나를 선택하신 주님은 무엇 때문이실 까요. 하나님의 일에는 무엇이나 목적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서 선택 받은 사람으로서의 부끄럽지 않게 하나님을 섬기며 겸 손하게 그 직무를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부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택함 받은 성도 의 마땅히 행할 바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 적이 오늘의 본문 말씀 안에 있습니다. 차례로 살펴 보시면서 거룩한 성도생활에 유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첫째,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은 꽃을 보려고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합당한 열매를 맺어 야 합니다.

주님은 잎사귀만 무성하여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셨습니 다.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 나무가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을 때 찍 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이미 그 뿌리에 도 끼가 놓여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은 열매를 맺어야 할것입니다.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1)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말하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는 마음 의 변화만이 아니라 생활의 변화까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 육의 계산이 끝마처져야 합니다. 삭개오는 회개할 때에 남의 것을 토 색한 것은 4배나 갚았습니다.

2)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3절에 말하는 품성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회개 후에 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 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같은 열 매는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3) 빌립보서 1장 11절에서 말하는 의의 열매입니다. 의를 요한계 시록은 19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내가 예비 되었으니 그에 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 들의 옳은 행실이라" 하였습니다. 성도는 일거수 일투족이 세마포를 짜는 직녀의 생활과 같아야 합니다. 곧 경건으로 날줄을 삼고 성결로 씨줄을 삼아 사랑과 평화의 무늬가 빛나는 세마포를 짜야 합니다.

4) 골로새서 1장 6절의 복음의 열매입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지상의 사명입니다. 인물 잘난 여인은 소박을 맞아도 아들 잘 낳는 여 자는 소박 맞는 법이 없다고 한 속담을 생각 하십시요. 성도는 복음의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합니다. 그러면 신랑되신 주님 오시는 날 소박 맞 지 아니할 것입니다.

5 빌립보서 4장 17절에서 말하는 연보의 열매입니다. 어떤 신자는 연보시간에 5,000원짜리 내어놓고 4,000원 거슬어 가더라고 합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연보할 정성이 준비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연보 바구니를 돌리지 않고 쟁반으로 연보를 거두드랍니 다. 이유를 물으니 주머니에 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아주지 않는고로 연보가 적게 나오고 쟁반에 하여야 연보가 많이 나온다고 하더랍니다.

연보하는 사람도 방법도 신기할 정도입니다. 연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과 생활의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 다.

 둘째,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누구보다도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물론 모 범만을 보이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성에 의하 여 기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 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합니다. 주 님이 이렇게 기도 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1장 13절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였습니다. 주 님의 집은 옛날의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고 린도 전서 3장 16절에서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몸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말이 아닙니다. 기 도는 소원의 부탁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몸으로 성취하는 도구로 주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여럿이 모여서 큰소리로 부르짖는 통송기도나 사람 들 앞에서 미사려구를 잘 사용하여 듣기 좋게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 다. 기도의 열심은 자신의 소망성취만을 위하여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 다. 하나님의 뜻을깨달아 그 뜻에 복종할 힘을 요구하고 끝까지 순종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기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그렇고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주님 같 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로 변명을 삼습니다. 요나는 물고 기의 뱃속에서도 기도 했습니다.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나 를 택정 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전능하신 이름의 권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셋째, 서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입니다. 사랑은 웅변보다 낫다고 했습 니다. 웅변에서 사랑을 빼면 노래하는 앵무새나 또는 록음기와 다를바 없습니다. 단지 흉내 내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지식 보다도 낫 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해독이 될뿐입니다. 사랑은 믿음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미신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선에 사랑이 없으면 위선이 되어 버립니다. 순교에 사랑이 없으면 맹목적인 죽음에 불과 합니다. 사랑은 불길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나 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황무지에서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 사랑의 위력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당신 사랑의 열망 때문입니다. 주님이 만 민의 죄를 대신 질머지신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속성입니다. 주님 이 십자가에 못박혀 모진 고통을 당하신 것은 사랑이 걸어가는 고속도 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 보혈을 흘리신 것은 사랑은 주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 합니다. 그러나 모든 피는 아닙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인 죄가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속죄의 구주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시한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피 너와 나의 피는 무익할 뿐 입니다. 죄의 해독으로 가득찬 피는 또 피를 부르는 죄의 연결고리 역 할에 불과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흘리신 피, 그 피만이 우리 인생의 더러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왜냐하면 그 피속에는 사랑이 라는 해독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염된 이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덮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는 무엇보다도 더 많은 사랑의 열매가 요구 되십니다. 사랑의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시 려고 주님은 나를 택정 하셨습니다.

열매맺는 거룩한 생활로 택함 받은 자의 합당한 생활 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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