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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요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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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 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요한복음3장16절의말 씀은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라 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 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 인간 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인간을 이 땅위에 지으실 계획을 하시고 장차 먼 저 지음받아 이 세상에 존재할 인간을 위하여 그 인간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땅과 하늘, 그 가운데 만물을 만드셨고 만드신 그 만물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배반하고 고의적으로 반항하고 반역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을 거역하여 범죄하였다. 이러므로 인간은 영원히 멸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범죄하고 타락 하여 멸망해 가는 인간을 보시고 그대로 계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여러가지 일을 이 역사 속에서 행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 의 사역이며 화해의 사역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대개 자연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내시고 우리 인간에게 그 사랑을 부어주셨다. 그러나 인간은 끝까지하 나님의 사랑을 다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당신 자 신이 이 땅위에 오셔서 당신의 사랑을 친히 보이시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 땅에 오심 성육신이다. 그리하여 성육신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것은 당신 자신을 송두리 째 주심, 즉 최선의 공여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여기 그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 은 당신 자신과 원수된 인간을 당신 자신과 화해시키기를 원하여 그 아들을 이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 의 일, 즉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다. 이것이 하나 님의 사역의 제1단계 "세상을 위해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의 사역(성육신의 사여계)"이며 하나님의 사역의 제2단계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 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 안에서 일하시는 말씀의 사역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교회 안에서 성례전과 말씀 선포의 사역을 하시고 계신데 이것을 "교회를 위한 성령 안에서의 예수의 사역"이라고 한 다. 그리고 제3단계의 하나님의 사역은 세상을 위해 일하는 종으로서의 교 회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심으로 그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도 세상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역의 마지막 형태는 "예수를 대신하여 교가회가 세상에 수행하는 교회의 사역"이다.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구원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구원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위한 비유(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 야기기)의 뜻을 묻게 되는 것이다.

 1. 내 이웃이 누구인가

이 질문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계속해서 제기되어 온 질문이다.

 나가 누구인가 하고 묻던 어린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내 이웃이 누구인가 묻게 된다. 그리하여 성경의 모든 질문은 결국 이 질문 "내 이웃이 누구인 가" 로 집약되는 것이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는사람은 그 이웃을 찾 는 나가 누구인가를 또 다시 묻게 되고 그 나는 내 이웃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로써의 나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그가 곧 이웃에 대한 선한 구원자인 "나"인 것 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웃에 대한 선한 구원자인 나가 곧 메시야이다 여기 서 우리는 이웃에 대한 선한 구원, 메시야로서의 나가 곧 교회라고 보는 것 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이라는 관점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풀어보고자 한다.그러므로 이웃은 사회이고, 메시아로서의 나는 교회이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 할 수 있다.제사장과 레위인은 왜 그대로 지나가 버렸을까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된 사람을 보고도 왜 그들은 그대로 지나가 버렸을 까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자기도 도둑을 만나 죽을까 두려워서 그대로급히 지나가 버렸을 것 이다.

둘째, 자기가맡은 일, 자기 직장에 성실하느라 남을 돌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셋째는 자기 직장, 자기 가정에 충실하느라 자기 직장이나 자기 가정 이외 에는 냉담하거나 무관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이긴 하지만 성서학자 들의 연구에 의하면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그대로 지나간 것은 위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맡은 종교적인 의식을 위한 이유 때문이었 다고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피를 만지거나 시체를 만 지면 부정하여 제사를 드릴 수 없으며 만일 정결케 하는 기간이 지나기 전 에 성막에 들어가거나 섬기는 일을 하면 죽임을당하게 되어 있었다 (레 21:11,민19:11-13) . 그러므로 그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이 죽어가도, 피를 흘려도 만질 수 없었고 도울 수도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대로 지나 가버렸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 우리는 여기서 종교가 그 본래적인 정신을 떠나 법 조항이나 형식만 남게 되는 경우에 얼마나 무서운 오류에 빠지는가를 볼 수가 있다. 타락한 종교가 사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존재할 때 얼마 나 무서운 독선과 아집에 빠져 사람을 망하게 하는 화석이 되어버리는가 하 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간다.

 2. 사마리아 사람은 왜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했을까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곳을 지나간 얼마 후에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곳 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거기 쓰러져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자 짐 승에서 내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 승에 태워 주막으로 갔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이 사람은 시간 이 많이 남아 돌아가는 한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사마리아 사람은 왜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을까 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1) 이 사람은 책임의 우선 순위를 바르게 결정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매일을 살아갈때 많은 관심과 많은 책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 아니다. 많은 관심거리와 많은 책임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순위를 바 로 정하는 사람이 인생을 승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덜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든지, 가장 급한 것이 아니라 덜 급한 것을 가장 급한 것보다 먼저 하는 사람은 인생을 성공할 수 없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책임성의 우선 순위를 바르게 선택하였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놓는 일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이 판단은 바르게 된 판단이었다.

 2) 이 사람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 무척 분주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오 늘의 성서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튿날에"(10_35) 라고 쓰 여있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분주한 사람이어서 이 여관에 강도만난 사람과 오래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루 밤만 돌보아 주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 야만 했다. 이렇게 분주한 중에도 그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돌보아 주었 다. 결코 할 일이 없거나 시간이 많아서 그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이제 는 그를 돌보아 줄 다른 또하나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맡기고 갔 던 것이다.

 3) 그는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만 일 부비가 더들면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10:35) 그는 호주머니 속에 많은 분량을 남겨 놓고 이렇게 능청을 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 는 것을 송두리째 내어 놓았다. 그는 자기가 가진 전부를 내어 놓았고 만일 부족하면 돌아오는 길에 갚을 마음의 생각까지 한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 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그렇게 주인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남을 도울때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는 사회 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무엇인가 다음 과 같은 세가지를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다.

1) 사회 구원을 위한 기도의 책임

소돔성에 의인 50인 없었다. 45명, 40명, 30명,20명, 마직막에는 10명으로 내려갔다. 하나님은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마 약속 하셨다. 결국 소돔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였다. 이 성경이 우리 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의인이 그 성중에 있으면 그 의인으로 인하여 그 성읍이 보존된다 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심판을 연 기해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기도에 우리 교회가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가 사회 를 구원하는 구원의도구(agent)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사회 구원을 위한 전도

하나님을 강포가 극심하고 약탈과 살륙, 음행과 교만으로 극악한 도시 소 돔성 보다도 더 악한 니느웨성을 40일 후에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심판 은 연기도 유예도 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나가 니 느웨에 도착하여 하룻길쯤 가면서 40일 후에는 이 도성이 멸망하리라고 외 치자 이 외침을 들은 니느웨의 왕은 보좌에서 내려와 조복을 벗고 베웃을입 고 재에 앉아 통회하였으며 모든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짐승까지 도 금식하게 하고 기도하였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니느웨성을 멸망 시킬 계획을 포기하셨다. 우리는 이 성서의 기사에서 멸망해 가는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교회가 사 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 회는 사회의 유일한 희망이다.

 3) 사회 구원을 위한 평화의 봉사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 을 향하여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 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않 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른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29:5-10) 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회가 평안해야 할 수 있다고 하셨으며 너희는 그 평화를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의 평화를 위하여 일 해야 하며 그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회 구원을 위한 교회의 책임성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속에서 그 구체 적인 일을 3가지 면에서 고찰하였다.

 (1) 책임성 즉 관심의 우선 순위를 바로 정해서 사람을 돌보았다는 것은 사회 구원을 위한 기도의 생활화이며 (2) 무척 분주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를 하룻밤 돌보아주고 떠났다는 것은 사회 구원을 위한 전도의 생활 화이며, (3) 최선을 다하여 2 데나리온을 주고 가면서 부비가 더 들면 돌아 오는길에 갚겠다고 말한 것은 사회 구원을 위한 봉사와 섬김의 행위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신뢰도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주막 주인과 사미라아 사람과의 관계에서 교회와 사회의 신뢰도가 어떠한가 하는 말이다.

1) 사회에서의 교회에 대한 환영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고 거반 죽게 된 사람을 여관으로 데 리고 갔다. 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집안에 들여 놓기도 꺼리는 일이지만 만일 죽으면 여관은 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같으면 이러한 손님을 맞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관 주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피투성 이가 된 사람을 맞아들였다. 이것을 교회에 대한 사회의 환영도라고 볼 때 과연 오늘의 사회가 교회를 얼마나 환영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처럼 환 영하고 있지 못함을 알수 있다.

 근래에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성북구에서 가톨릭 교회를 건축한느데 그 주 변에 있는 가톨릭교인들이 앞장서서 반대를 했다는 사실과 최근 강남구에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주님의 90%가 반대했다는 것을 볼 때 교회가 사 회에 비친 비참할 정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교회가 세워지면 그 근처의 땅 값이 내린다는 것 등은 참으로 슬픈 정도의 환영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 다.

 2) 교회에 대한 사회에서의 신용도 여관 주인은 사마리아 사람이 2데나리온을 주고 떠나면서 만일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을 때 그 여관 주인이 사마리아 인을 믿지 못했다면 과연 그를 반대로 보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주인은 사마리 아 사람을 전져으로 신뢰하였다. 그를 믿을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어떤 조 처도 그는 취하지 않았다. 이것을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라고 볼 때 과 연 오늘날 사회가 교회를 이만큼 신뢰하고 있는가 우리는 솔직히 그렇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오직 하나의 이유와 결론

왜 오늘의 교회가 사회로부터 환영과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을까 사마리 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이유와 결론은 교회가 사회에 진실성 있는 최선의 공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투여하여야 한다.하나님께서는 우리 에게 이미 가장 좋은 것을 완전히 공여해 주셨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그 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오늘까지 너무 자신만을 위한 이 기적인 단체, 자기 비대만을 도모하여 왔으며 자기 축복만을 강조하여 이웃 과 함께 축복 받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오늘 이와같이 사회가 우리를 환영하지 아니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오직 하나의 이유와 결론, 그것은 교회가 사회를 위해서 자신을 공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최선을 다하여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신앙의 생활화, 그것은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있는 것을 다 송두리채 공여하는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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