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삼색의 인간얼굴 (요 08:1-11)

첨부 1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입니다. 본래 구원이란 말은 죄를 전제로 하고, 은혜란 사랑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가 있었기에 <구 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은혜>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세가지 다른 얼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간음하 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개처럼 끌고 온 서기관 과 바리새인들의 얼굴이고, 그리고 우리 주님의 얼굴입니다. 우리는 이 세얼굴을 각각 다른 사람의 얼굴로 생각하지 말고 내 자신의 얼굴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 잡혀온 여인에게서 들어난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했을 경우, 두사람을 다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습니다(신22:22)."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 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찌니라"고... 심지어 여인이 추행을 당했을 경우라 해도 들에서 아무도 없는곳에서 당한 경우는 남자만 죽이되, 그러나 성안에 서 당한 경우에는 여인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음으로 둘다 죽이라고 했다(신 22:23-27).

 그러므로 현장에서 잡힌 이 여자는 누구에게 변명할 여지도 없었고, 또 동정을 받을 수도 없는 반듯이 죽임을 당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죄는 들어나기전 까지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만, 일단 그것이 만천하에 공개되면 얼굴을 들수없게 되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오늘날에도 신문지상에 각종 죄들이 들어날 때 보면 모두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부끄러워 가메라를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는 드러나게 마련이고, 드러나면 얼굴을 들 수없이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보면서, 부끄러운 자신의 얼굴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간음이 란 반듯이 문자 그대로 실행했어만이 간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보면, 행 동으로 옮겨지기전 마음으로 범한 간음도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현장에서 잡히지 않았다는 것 뿐이지 우리 모두 이 여자와 같이 부끄러운 얼굴들이 아니겠는가... 사람 앞에서 들키지 않은 것 뿐이지 우리의 또다른 숨겨진 얼굴들 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이방 의 신을 쫓아 갔을 때 마다 영적 간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하고 그것에 연연하면서 살았다면, 그것이 간 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여자보다 낳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여자의 부끄러운 모습은 곧 우리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 습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후에 주앞에 설 때,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것이 낱낱이 들어난다고 했으니, 그때 누가 감히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범죄의 현장에서 끌려온 이 여자의 얼굴에서 나 자신의 부끄러운 죄의 모습을 볼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지금 나의 겉모습이 그럴사 해도, 아무리 나의 입은옷이 화려하다 해도, 현장에서 잡혀온 이 여자의 부끄러움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한가 깊이 반성해 보아 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들의 모습은 언제나 겸손한 모습이 요, 통회자복하는 모습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났다고 주앞에 나와서 형제를 비판하며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의 기본적 자세들을 새롭게 가져야 하겠습니다. 설령 사회 에서는 내 위치가 어떤 자리이든,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는 모두가 이 여인의 모습 으로 되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모 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의인은 없나니...하나도 없다]고 하 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모든 죄인중에 괴수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죄는 들어나게 마련이요, 들어난 죄는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보면서 항상 내 자신이 겸손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숨겨진 또다른 내 자신의 얼굴 모습을 보아야 하 겠습니다.

그들이 이 여자를 끌고 온 것은 율법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터에 그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기 때문이 었습니다. 즉 이 여인을 끌고온 동기가 순수하지 못 했습니다. 만일 이 여자를 돌 로 쳐죽이라고 하면 로마법에 저촉되어 고소할려고 하였고, 또 만일 살려주라고 한 다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게 됨으로 산혜드린 공회에 고소할 이유를 찾으려 했기 때 문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여 이번에 꼭 예수를 함정에 빠뜨려 구 속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가증된 음모입니까

바로 이들의 얼굴에서 우리 자신의 숨겨진 얼굴들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타인의 결정적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권모술수에 이용하고,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 타 인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그러한 못된 얼굴이 또한 내 자신 속에도 있지 아니한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남의 부끄러운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음모를 성취해 보려는 위선적 종교인 들의 모습을 여기서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게 되면 제일 많이 동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방법입니다. 현장 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의기양양하게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대 들듯이 [어떻게 할려느냐]고 대답해 보라고 다그치는 그런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 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터에....어떤 결정적 허물과 약점이 들어나면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용서 못하는 것! 바로 그런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교회가 시험에 들면 성도 들간에 벌어지는 하나의 공통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사회, 어떤 조직 속에서도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 사악한 불신자들이 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들 신앙 인 들이 그렇게 했어야 되겠는가...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7-19절에 보면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 한일을 도모하라. 할수있 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내 사랑하는자들아! 너희가 친 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고....하였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보십니까 다시 말하면, 남의 약접으로 약점을 갚지말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남의 허물로 자신의 허물을 가리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고, 남의 죄를 자신의 이해관계의 수단 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심판권은 하나님이 가 지고 계시기 때문에 설사 내가 잘했다 싶어도, 남의 약점에 직접 손대지 말고 하 나님께 맡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것을 지키기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줄을 알면서도 우리들 모두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처럼 행하고 있지 않는가! 솔직히 인정하고 회 개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들어난 허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해 보려는 것은, 따지고 보면, 현장에서 잡혀온 이 여자보다 몇 배, 아니 몇십배 더 추한 죄들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직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여자의 죄는 사람 앞에 들어난 것! 이것 하나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들어난 죄만 죄가 아니고 들어나지 않고 발각되지 않은 죄들도 하나님 앞에는 다 죄란 말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내 자신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돌을 들 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이 여자를 통해 자신의 얼굴들을 직시 해 보았기에 하나씩 둘씩 다 흩어져 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은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구원의 은총>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인류 최대의 수수꺽기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

3. 예수님의 얼굴에서 죄인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 것 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죄인은 벌을 받음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죄된 인간이 누가 누구의 죄를 돌로 먼저 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인간의 의는 모두 상대적인 의일 뿐! 절대적 의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하나 님 스스로가 육신을 입고 강생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 이외에 돌을 들어 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이 보여주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으 려든 그들의 속셈을 책망하지도 아니했고, 또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도 정죄지 않 았습니다. 단 [너희 중에 죄 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만 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깊은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것 은 죄를 용납한 것도 아니었고, 죄인을 무조건 용서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인간세 계의 범주를 넘어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즉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보여준 것 이 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여, 죄 없는 것 처럼 큰소리치는 사 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였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자신만이 돌을 들 어 쳐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고하여,[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합리적 사고 능력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인간 이성으 로 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여자와 같이 인간의 처절한 죄의 현장에서 붙들려 온 경험 이 있어야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직도 자기 의 존재를 옳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남의 허물을 보면 돌을 들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지금도 죽고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들 눈에는 구원의 은총이란 말은 도저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하나님이란 존 재 자체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를 부인하고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아본 자 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 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체험해 본 자 만이 아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 야, 얼마나 좋으랴./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중,비할 데 없도다./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 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라고....그 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뿐입니다./ 끝.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