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공의와 사랑 (요 08:3-11)

첨부 1


오늘 본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하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 문제를 결코 서 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만든 사건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건은 상당히 뿌리깊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구원 문제 나 신앙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중에 가장 이해를 잘 못하고 있는 것은, 성경 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설명하는 것들 중에서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적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중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 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오묘한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이 약 속하고 있는 것 중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사실상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 이냐 하면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기쁨들에 대해서, 성경이 약속하고 요구하고 있고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되는 축복으로서 거기에 대해서 잘 알 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그 다음 단계의 더 깊고 오묘한 세계를 만나지 못하게 가로 막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하여 자신있 게 다 안다고 말알 수 있는 처지가 못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싸움은 아렇습니다. 눈 앞에 나타난 현실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시작된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과 하 나님의 사랑이 상반되는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 것인가를 겨냥한 교묘한 질문인 것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인을 부르러 왔지만, 동시에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동시에 봅니다. 즉, 죄를 지은 여인과 그 여인을 고소하는 율법과의 엇갈린 상황을 한꺼번에 만나게 됩니다. 죄인을 고소하러 온 예수와 용서 하러 오신 예수가 한 무대에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장면 입니다.

요한복음 8장의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결론은 하나님의 공의가 끝이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를 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결코 사랑을 공의 위에 두기 위한 사건이 아라는 것을 염 두에 두셔야 합니다.

여기서의 쟁점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는 이 질문, 다시말해 '이 죄인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이 문제야말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증명해 내 고 싶어하는 주제입니다.

 사탄의 정체를 성경에 있는 것만을 모아서 상상해 보자면, 사탄은 이미 오래 전 에 천지와 천사들을 창조했을 때에 천사장으로서 창조함을 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 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장은 자기 휘하에 있는 천사들 삼분의 일을 꼬여 내어 감 히 하나님께 대항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저주 아래 쫓겨났고, 이제 심판 날에는 영원한 형벌과 저주의 자리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범죄하고 쫓겨난 사탄이 그 영원한 형벌로부터 자신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인 인간들을 공범자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천사들을 부 러워할지는 모르지만 천사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영광을 가진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천사들에게 구원의 긍휼을 베풀어 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유일하게 인간 타락에 있어서만은 구원이라는 그 다음 방법을 제시하고 있 는 것을 볼때에 천사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나중에 천사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 보다 우리가 더 낮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8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푸셔야만 했고 사탄 편에서는 상당히 득의만 면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나와 똑같은 죄를 지었으니 어떻 게 하실 것입니까 사랑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도 똑같이 용서하셔야 하고 공의대로 심판하실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에도 완전치 못한 곳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셔서 우리의 실수도 용서해 주셔야 합 니다.'라는 아주 비겁한 계략이 숨어 있는 것이 었습니다.

사탄이라는 이름은 원래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가 하고 있는 책략 때 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풀이하면 '고소자'라는 뜻이요, 검사라는 말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무마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는 자녀인 우리를 볼모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이해할 때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사랑으로 너희들 의 모든 죄를 용서하노라!'라고 하신다는 식의 감정적 이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구원과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너무나 감격해서 눈 물을 흘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들어야 할 두렵고 무서운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 씀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가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 두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하 나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결론과, 또 하나는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다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 두 번째 부분을 놓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감정적이고, 신파조 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구원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자신감들 이 흔들릴때, 우리의 신앙도 얼마나 같이 흔들렸는가를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흔들리면 신앙도, 성경도, 심지어는 하나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문을 받았을 때 취한신 행동은 아주 이상했습니다. 이 여인은 간음 하던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법에는 간음하는 여인은 돌로 치라고 되어 있습 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의 말에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계속 묻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는 다시 땅에 쓰십니다. 그러자 모였던 어른들과 젊은이들은 다 가고 여인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글을 쓰신 사건이 이것까지 세번 나옵니다.

먼저, 단5:25절에 "메네메네 데겔 우르바신"이라고 하나님이 직접 벽에 쓰셨던 글 자는 '왕의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부족함이 증명되었다"는 뜻으로 그 날 밤에 벧사 살 왕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보다 더 유명한 사건운 '십계명'입니다. 돌판 두개에 쓴 십계명 은 하나님께서 직접 써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땅에다 그 글을 쓰고 계신 것입니다. 이 행동은 곧,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무었인지를 아느냐' 이런 뜻입니다.

요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 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 은 바 되었으 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곧 과거에 율법인 십계명 돌판을 만드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 일 에 참여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땅에 쓰심으로 공의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땅에 기록한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해서 고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서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무었을 증명하고자 하시는가를 보십시오.

'그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는데 돌로 치라는 대목에서 '죄 없는 자'라는 단어를 빼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 여인의 죄에 대해서 하나 도 용서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범법한 것을 그대로 넘어갈 의도는 없 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해 무조건 쓰다듬고 덮어 두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끝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이 여인이 죄 를 지은 것을 묵인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알고 기억하고 계심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속에는 '돌로 치라! 그것이 그 여인이 지은 죄에 대한 합당한 대가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 가 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심판은 너희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단서가 주님께서는 죄값을 치르는 문제를 풀지 않고 그 냥 덮어 두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반드시 그 값이 치루어 져야 되겠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문제이지 너희들의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을 통하여서 어떻게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 시는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들을 향한 의의 지적과 범법자를 놓아 보내시는 사 랑이 동시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서운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몇 번 쓰십니까 한 번 쓰시고 대답하고 난 다음에 다시 한 번 쓰십니다.

모세는 유언 속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 나 같은 선지자 를 보내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데 왜 모세는 '나 같은 선지자'라고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다가 주어야 하는 중재자 역활을 해야 하기때문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직접 말씀을 받을 만큼 우리는 의롭지 못하고 거룩하지도 못하므로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였다가는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 니다. 그렇기때문에 누군가가 말씀을 받다다가 연결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즉 중보자 역활을 자로서 가리키기를 '나 같은 선지자'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대목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중보자의 모습을 봅니다. 출32장을 보시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간 지가 40일인데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으로 섬기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판을 들고 내려온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 첫 번째 돌판을 어떻게 했습니까 출32:15-19;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 편 저 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 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 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왜 그렇게 던져야 했을까요 범법이란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것이기 때문입니 다. 십계명 중에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것이 됩니다. 즉 죽을 죄 하나만 범했다면 그 다음 죄는 물으나마나입니다. 다시 출32:20절을 보시십시다.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 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이 말씀을 꼭 기억해 두셨다기 조금 후에 이 말씀이 어떻게 상징화되었는지 비교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돌판은, 제시하기도 전에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34:1절에 가서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깍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그래서 두번째 돌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돌판이 법궤 속에 보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이 깨어졌어야 하는 것만큼 우리가 누 구인가 하는 우리의 상태를 잘 설명하는 것도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 다. 첫 번째 돌판을 깨뜨릴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무었 때문에 두 번째 돌판을 만들어 주어야 했습니까 첫 번째 돌판은 그들에게 알려 주기도 전에 이미 범법했 으므로 깨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상태의 사람들에게 두 번째 돌 판을 다시 써주신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비록 인간은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공의 를 양보하거나 꺽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코자 하시는 마음을 가지셨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당신의 공의를 약화시키거나 보류하거나 포기하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여기에 그 대표적인 예가 나옵니다. 출32:7-12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 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 게 이르시되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 멸하 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여기서 어떻게 사건이 진행되는 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가 받고 있 는 동일한 질문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모세에게 이런 제안을 하십니다.

'이 범죄한 백성들을 진멸하고 너로 새로운 민족을 이루어 내 백성을 삼겠다'고 그러자 이 말씀에 모세가 뭐라고 답변을 합니까 만일에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명성에 위배되며, 애굽 사람들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 하여 내어 결국은 광야에서 다 죽였다고 조롱할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8장에서의 사탄의 지적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그 백성을 제대로 보호도 못하고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으면 서 한 번 잘못한 것으로 인하여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화를 내시는 것이 가당하십니 까 이것이 사탄의 지적인 것입니다.

다시 출32:30-34절을 보시겠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 로 올라가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 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 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 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 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바로 이 대목에서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나 같은 선지자'라고 말한 근 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 백성을 멸하고 나로 하여금 다른 인류를 만드시려고 하신다면 저도 같이 멸해 주시옵소서!' 이 말이 모세의 민족애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 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그의 신앙의 변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공의도 세우시면서 그의 사랑을 완성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머리로 해서 인류를 출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 이후의 모든 자연인은 모두 다 범죄자로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모 든 후손들은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제 잘못된 이전 것을 모두 지우고 청산하 여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조상으로 삼아 하나님 의 백성으로 삼으면 물론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때에는 조금 전에 했던 지적과 같이 공의 부분에서 심각한 손상 을 감수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작정하셨느냐 하면 이 죄는 죄대로 갚되 그들을 멸하 지 않고도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 라는 방법인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러고 하 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의 후손으로 보내시는 것입 니다. 죄는 없으시지만 죄인들의 몫으로 오셔서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우리였다면 죄값인 죽음으로 끝이 났을 텐데 예수 그리스도이시었기에 죄값을 치루고 나서도 다시 살아나실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즉 아담의 족보를 무너뜨리지 않은 것입니다. 죄값을 받으므로 죄의 족보는 끊지만 인 류을 연결하는 족보만은 그가 새로운 기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쉽게 생각하고 쉽게 믿지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고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은 출발일 때는 쉽게 감격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그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습니까 그것은 두 돌판 사이에서 하셔 야 할 당신의 역활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돌판인 율법을 근거로 해서 돌로 치라는 얘기가 있으며,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 사이에서 중보의 역활을 하였던 모세 처럼 중보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중보 사역이 있었기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라는 선언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좀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공의의 부분에 대해서 더 눈을 돌려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서의 어떠한 기록 도, 기록 그 자체로 구원을 깨우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도록 고쳐 지지 못하고 다 도망칠 뿐이었습니다.

출32:20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 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이 말씀은 민수기 5장에 아주 재미있게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섬겨 야 하는 종교법과 제사법 외에 사회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어떻게 전당을 잡으며, 어떻게 꾸어주며, 실수로 살인을 했을 경우의 처벌 방법과 자기 집 소가 이웃집 밭을 망쳤을 경우에는 어떻게 판결하는가 하는 등등입니다. 그런데 그 법 중에는 이러한 법도 있습니다. 민5:11-2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껀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더러워짐을 인하여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 하거든 그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에바 십분지 일을 예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말고 유향도 두지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 ......이 저주가 되게 하 는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넙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어떤 사람은 이런 말씀을 할때마다 왜 남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없느냐고 하는데 성경에서 가르키는 여인이라는 말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의 신부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인을 자주 등장시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이기 때문이며, 성적인 묘사가 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과 결합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간음 문제를 다룰 때 그토록 엄격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 터 떠난 죄악의 상징으로 비유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부정한 이야기가 많습니다.(유다, 룻의 이야기 등) 그것은 지금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얼 마나 방탕한 자리와 더러운 자리에 있는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 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도 여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에 관한 문제 요, 우리 모두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민수기 5장에 있는 말씀도 여인이 죄를 지은 것 같으면 그 죄를 확인하는 방법으 로 거룩한 물에다 티끌을 취하여 물에다 타서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의 사건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 들어서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무슨 상징 이 있는 것같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려면 티끌이라는 말을 좀 더 확인해 보면 됩니 다. 미가서 7:17을 보시면 티끌에 관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너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원래 뱀은 흙을 먹게 되어 있으나 티끌을 먹는다는 것을 확이시켜 줌으로써 이 상 징은 명확해졌습니다. 뱀은 사탄의 상징으로써 인류를 타락케 하는 원흉이 됩니다.

그래서 배로 기어다니며 흙을 먹고 살도록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티끌 이라는 것은 뱀이 먹을 수 있는 것, 즉 뱀이 장악할 수 있는 상태로 되어 있는 대 상, 다시말해서 죄인이 이미 되어 있는 대상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티 끌은 바로 죄인된 우리들입니다. 민수기 5장으로 되돌아 가보시겠습니다.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아서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먹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서의 물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율법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23절 말씀이 그 상징성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 다.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고" 여기서 저주의 말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대별해 보면 축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내 편에 서면 이러한 축복을 얻고, 너희 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에게서 떠나면 이러이러한 저주가 임하리라 하는 것이 사 실 성경의 모든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말이란 꼭 저주의 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요구 사항인 것입니다. 그것을 물에 빨 아서 넣습니다. 그래서 물은 확실하게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토기에 담아서 먹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구약의 집요한 상징들을 현실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 상징화된 메시지를 이제 터뜨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올라오는 감정 과 감격에 복받치는 것들을 종종 하나님께서 다 허락하시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를 하나의 신파극처럼 만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살펴본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 상 황에 따라서 임기응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토기에 물이 담겨지고, 우리가 들어가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장면 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그 안에 거룩한 물을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아 무도 그 거룩한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실 그릇이 없으면 먹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질그릇 몸으로 오셔서 거 룩한 물을 담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토기 그릇에 담긴 거룩한 물에 티끌 이며 죄인인 우리를 넣어 마시자 어른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례대로 도망 쳐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거 룩한 말씀의 물을 먹이기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 거룩한 물을 먹이심으로 인해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먹이시려고 거룩한 그릇에 말씀을 담아 놓 으셨지만 기껏해야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도망가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지적하는 것은 우리는 죄인이며. 빛으로 왔으 나 도망을 갔다는 얘기입니다. 빛을 본 자가 생긴 것은 요한복음이 끝나갈 때, 예 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요한복음 전체 기록 21장까지를 보면 11장까지는 죽음을 예표하는 말씀이고, 그뒤 부터 마지막장까지는 죽음에 관한 말씀이므로 결국 요한복음은 모두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죽음에 대한 메시지 외에는 없는 셈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다른 것이 이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전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태어나셔서, 어떻게 사신 것 등 역사적인 조명 부분을 상당히 할애하였다면, 요한복음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리스도의 죽음 이외의 방법으로도 인간은 하나님을 알게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증 명하기 위한 기록을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니고데모 이야기나 수가 동네의 이야기나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한결같이 그것으로 말미암 구원을 얻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결론>

여러분이 이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탕자가 아버지 품에 돌아오기를 기 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같이 기다리심 만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며, 공의와 사랑을 지키시며, 우리에게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는 자비롭 되 완전하신 그 하나님께서 나를 간섭하시고, 나의 운명을 쥐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오늘 여러분의 여러분 되심, 즉 하나님의 자녀됨은 자신의 감격이나 자 신의 어떤 결정이나 경험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은 오직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셨 던 하나님의 집념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입니다. 이것을 확인 할때에 비로소 내가 확인하고 감격한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찬양 할 수밖에 없 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지금까지 약속하신 것을 지키고 하나님의 하나님되 심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오 하여금 이 자리가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도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어 드디어 하늘나라 에 앉히시고 말것을 확신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 은 비록 지금 나의 모습이 초라하고, 변덕 많음에 관계없이 성취될 것이라는 그 무 었도 빼았을 수 없는 자신과 확신으로 우리 심령 깊은 곳에 자리잡게 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남보다 더 잘나고, 더 감동을 잘해서 교회에 나왔다고 생각하 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잡혀와 있는 열매들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날마 다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엄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심에도 불구하 고 우리는 그 거룩한 요구를 사랑에 힘입어 통과하게될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공의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 자가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일찌 감치 항복하시고 순종하시는 곳으로, 칭찬받는 곳으로 변화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