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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내신 자의 일 (요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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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 보면 하얀 와이셔츠에 까만 바지입은 20세 남짓한 미국 청년들이 전도하는 광경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몰몬교인들입니다. 몰몬인들인데 저들이 한국에 와서 성공적으로 전도합니다. 그 원인인 어디 있는가 젊은 학생들은 앞으로 학문을 하거나 어디에 뜻을 두었거나 간에 영어를 모두 다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몰몬인들은 그러한 학생들로 하여금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거기에 가서 무료로 영어를 배웁니다. 그런데 몰몬교 선교사들은 20세에 해외 선교를 한 2년 정도 하면 장로가 됩니다. 장로가 되면 멜기세덱 신권이라는 최고의 직분을 획득하는데, 그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 젊은이들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교사를 지망하여 타국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전부 자원자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무슨 신학을 공부했다거나 선교에 대한 어떤 전문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렇게 나와 몰몬교를 위해 일을 하는데 그들이 주무기는 바로 영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접촉하는 Point of contact라고 할까 소위 접촉점, 일반 시민 혹은 피선교지의 주민과의 접촉점이 뭐냐 하면 바로 영어입니다. 영어를 통해 그들과 접촉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영어가 아니고 몰몬교입니다. 영어가 목적이 아니고 몰몬교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 모르고 영어만 배운다고 거기 가서 몇달 혹은 일년 영어를 배우고 나서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게 되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몰몬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씨저스 루이스(C. S. Lweis) 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적의 통신 라인을 차단하라." 만일 어떤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교리를 가르치고 뭘 어쩌구 한다면 그게 쉽게 이해되고 넘어 가겠습니까 통일교의 원리 강론을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쉽게 통일교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몰몬경을 읽는다고 해서 몰몬교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전하고 자기들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가 바로 자기들의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에 의해 그 일이 행해집니다. 특별히 몰몬교는 영어를 매개체로 하여 자기들의 교리를 전파합니다. 영어는 몰몬교를 전하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기독교 대학이 세워진 이유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선교를 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선교를 목표로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기독교 대학이라면 그 대학은 문을 닫아야 합니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세워진 것인데 선교를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선교는 기독교대학이,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한 한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그 도구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원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지만 학교는 동질 그룹이면서 동시에 이질 그룹이 모인 집단입니다. 다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다 같은 또래의 나이들입니다. 같은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학교라는 도구를 세우고 교수, 직원이라는 도구를 세워 가지고 접촉을 합니다. 그런데 접촉점은 매우 탁월해야 합니다. 접촉은 교수가 하고, 직원이 합니다. 교목은 일선 장병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안 되지요. 교목은 그 조정자 역할을 해야지 일선 장병들의 역할을 하면 안 됩니다. 일선 장병은 교수와 직원이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선 장병은 대단히 탁월해야 합니다. 상당히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부딪히기 때문에 접촉점이 아주 탁월하지 않으면 접촉하는 대상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대학 교직원은 자기 전공 분야를 항상 도구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역할은 전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목적은 선교다. 선교가 목적이고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전공을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몰몬인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자기 전공 분야를 통해 어떻게 나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전공 분야에서 어떻게 기독교 가치관을 형성해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 제가 기독교 대학의 학생으로 다닐 때에는 한 학기에 2학점씩 16학점의 성경 과목을 이수했던 시절입니다. 60년대입니다. 저는 교육학을 전공으로 했는데, 교육학을 하는 사람이 16학점의 성경 과목을 이수했다고 한다면 도저히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16학점을 이수하는 대학은 전혀 없습니다. 4학점 넘는 학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별로 없어요. 이것을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하기엔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특징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 듭니다. 제가 학교다닐 때에는 채플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을 꼬박 실시했습니다. 그때에는 교수, 직원은 말할 것 없고 학생들까지도 그런 분위기였기에 어떻게 보면 신학교를 방불케 하는 그런 시대였는데, 지금은 시대가 이래서 그런지 몰라도 참 어떤 새로운 결단이 필요한 때가 아니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수잇 교단은 종교 개혁자들을 박해하는, 신교를 박해하는 소위 그 교황의 전위대로서 너무 많은 살상을 했기 때문에 인심을 너무 잃어 그 인심을 만회하기 위해서 팔려 간 여인들을 속량하는 구제 사업과 교육 사업에 저들의 눈을 뜬 것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 주로 남미, 동남아 일대에 대학을 세워 교육에 전력해서 어느 정도 그 실추된 권위를 회복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서강대학입니다. 이 서강대학은 출발부터 상당히 종교적인 교수를 확보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해 왔습니다. 그래서 소위 학문계에서도 서강파라고 하는 그런 용어가 나올 정도인데, 거기에 보면 신부들이 교육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의도적이라 합니다. 교수들을 모시는데 입맛대로 모시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아예 신부로 하여금 철학을 가르친다거나, 물리학을 가르친다거나, 수학을 혹은 경제학을, 이런 전공 분야에서 신부를 교육시켜 그들로 하여금 학위를 받게 하고 그를 학교의 교수로 채용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총장을 꼽을 수 있습니다. 탁월한 분입니다. 그 대학에는 채플이 따로 없습니다. 교목이 따로 없습니다. 교목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부가 다 접촉점인데 교목이 있을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신부가 직접 교실에서 접촉합니다. 그 언어, 행동, 생활 가치관, 철학 이런 모든 것들이 그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전부 풍겨 나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서 유능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성해 낸다는 이런 방법입니다.

우리 교단의 신학교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합격하기가 어려워 재수삼수해서 들어갑니다. 서울대학 출신, 계명대학, 한남대학, 연세대학 이런 학교에서 많이 지원을 하는데, 그 중에서도 서울대학 출신자들이 제일 많이 입학합니다. 학부 학생중에는 아주 탁월한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런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하고, 외국 유학도 보내서 모교에서 교수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길러야 됩니다.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모교에서 인재들을 선발하여 외국 자매 대학에 보내 공부시켜서 학위를 취득하게 하고, 그런 인재들이 기독교 관계 대학에 계속 투입된다고 할 때 캠퍼스 미니스트리는 거의 성공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학교를 개방해야 한다. 교수를 자유롭게 채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탁월한 교수를 많이 채용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이 시대에 맞는 것 같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 관계 대학은 설립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목적을 상실하면 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 좀 더디 발전한다 해도 원리를 지키는 것이 낫지, 너무 세속화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남과 같은 길을 달려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립 목적을 가장 명시하고 분명히 확인하는 사람은 총장입니다. 총장이 이 설립 목적을 뚜렷이 하고, 이것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다고 할 때에 학교는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교목이 열 명, 스므 명이라고,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일한다 해도 총장 한 사람의 어떤 의지적인 결단이 더 중요합니다. 교목은 그저 링커에 불과합니다. 그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이런 중재적인 일을 해주는 위치이지, 교목이 나서서 뭐 진두 지휘하고 일선 장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맥코이 박사가 쓴 <The Responsible Campus>라는 책을 보면, 학원 선교는 Structural ministry로 제일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구조적이 선교가 왜 선교로서 효과적이냐 이것은 관계를 구조적 선교 영역으로 확대시키는 방법이거든요. 말하자면 총장 이하의 모든 교수 직원들을 정예화 해서 선교 영역에 다 투입시키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선교에 전문가가 아니니까 안해도 된다.' 이런게 아니라 전체가 다 구조적인 선교의 일꾼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선교의 방법이 아니면 21세기를 대비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1-4에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바울(사울)이 조직적으로 박해를 가하니까 그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대비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가 의논을 한 결과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죽기로 작정하고 평신도들은 다 흩어지게 했습니다. 평신도들을 전부 분산시켰는데 그 흩어진 평신도들이 얼마나 탁월한 선교를 하는지 그 구체적인 예가 8장 4, 5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사마리아 성에서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빌립이라는 집사가 그 일을 감당합니다. 사도들은 지금 모두 예루살렘에 있고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거기에는 이미 바로셀로나에서 마술을 배워 온 시몬이 기반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대단한 국가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었습니다. 시몬이 석권하고 있는 거기에 나타나서 빌립 집사가 인도하고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낫게 하니 시몬의 팬들이 전부 빌립에게 몰려 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반을 파송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예루살렘에까지 들리기 때문에 과연 빌립이 거기에 가서 뭘 어떻게 했는지 파악해야 되겠거든요. 이렇게 조사반이 파견되었을 정도로 굉장했다는 것이지요. 빌립이 성령의 인도로 저 광야에 내려 가라고 해서 갔더니 마치 에디오피아 내시 재무장관이 거기를 병거타고 이사야서를 읽고 갑니다. 거기에서 그에게 세례를 주어 에디오피아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됩니다. 초대 교회 때는 평신도들이 굉장히 탁월해 순교자가 됩니다. 최초의 순교자는 사도가 아니라 평신도인 스테반 집사입니다.

다시 사도행전에 보면 "복음이 날로 전파되어 예루살렘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또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제사장이 복종한다면 이거 말 다한 것 아닙니까 놀라운 변화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는 제자의 수가 많아진다고 했는데 그 제자가 누굽니까 우리가 보통 제자라고 하면 열두 제자를 말하는데, 열두 제자는 열두 사도이고 그 외에 허다한 무리가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는 누구인가 바로 평신도입니다. 평신도가 제자급 수준으로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지요.

요즈음은 교회에서 제자화 훈련이 굉장히 왕성해 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교회에 오는 그 많은 수가 탁월한 다수가 아니라 졸렬한 다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졸렬한 다수이기 때문에 탁월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특별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지요. 왜 평신도가 이렇게 졸렬해졌는가 우리가 알다시피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됐는데 325년에 가서 데오도시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니까 모든 타종교, 심지어 미신에 이르기까지 종교인들은 전부 다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갑자기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박해가 심했던 지난 날의 250년간은 신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굉장히 탁월했습니다. 어디를 가도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자신 있게 피력하고, 자신 있게 죽어 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가 된 다음부터는 전 국민이 다 신자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그 수준이 형편없게 되었습니다. 이 졸렬한 다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이 졸렬한 다수를 목사가 그때는 목사라 하지 않고 Father라 했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글을 압니까 종이가 나왔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요. 그래서 유리창에, 천장에 전부 성경에 관한 그림을 그려 놓고 Father가 신자들을 인솔해 다니면서 막대기로 짚어 가면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성경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 것이 천주교회에 가면 아직도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천주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가 그림이 많다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현상이 지금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이때부터 마귀가 교묘하게 침투해 가지고 전쟁은 장군이 해라, 총장 교목이 하면 됐지, 왜 우리가 하느냐 스스로 졸렬한 신자가 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귀의 속사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대성공했어요. 이러한 마귀의 속사귐이 20세기까지 평신도는 아주 졸렬한 신도로 남게 만든 원인이 됐던 것이지요.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최대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뭡니까 20세기의 최대 발견은 바로 평신도 발견입니다. 평신도가 성경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주 탁월해졌습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보다도 더욱 놀라운 개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에서 가졌던 평신도의 탁월성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그동안에 교회가 잘못했던 것이지요. 은혜를 주는 자가 있고, 그것을 그냥 받아 먹는 자가 있고, 이러한 방법은 이제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평신도가 초대 교회처럼 탁월해진 평신도가 될 때에 선교가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장군이 전쟁하고 지휘관이 전쟁하는 그런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이 비록 속도가 좀 늦다 하더라도 이 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가 낮이매 내가 나를 보내신 자의 일을 해야 하리라." 밤이 오면 그때는 못한다. 때가 낮이라는 것은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30, 40대 총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햇빛을 비추시고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향하시고 계시니 이것이 낮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면 어느 누가 설 수 있을 것인가 그 개인도 설 수 없고 가정도 무너지고, 집단도 무너지고, 나라도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면 설 수도 설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낮이니다. 아직도 우리 대학을 사랑하시고 아직도 나를 사랑하시니 내가 보내신 자의 일을 해야 하리라. 끝까지 내 일만 하고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 밤이 오는데 그때는 느닷없이 칠흑 같은 밤이 오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울고불고해도 소용없습니다.

보내신 자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천직입니다. 이 천직은 라틴어로 부름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잇습니다. 그럼 누가 불러서 왔습니까 총장이 불러서 왔습니까 이사장이 불러서 왔습니까 누가 불러서 왔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불러 주셨습니다. 나를 불러 주신 주님께서 보시는 나는 언제든지 성실해야 할 것 아닙니까 대개 주인이 보는 앞에서는 아양을 떨고 땀을 뻘뻘 흘리고, 안 보면 요령을 부리는 것은 보내신 자가 주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여기 보내 주셨다 이러한 철저한 사명 의식을 가지고 일할 때에 정말 아주 대낮같이 그렇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교인들을 많이 접촉해 보니까 70, 80이 넘어도 건강하게 봉사하는 분이 계신가 하면 20, 30대에 그냥 내리막길을 걷고 가정을 파괴하는 그런 가정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최근에는 그냥 40대 남자만 대여섯 명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전부 간암, 폐암으로 세상을 하직하는 것입니다. 가장이 없게 되니 가정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산다는 것이 아슬아슬한 것 같더군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꼬! 주께서 나를 외면하시면 그 설 자가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일은 무엇인가 주의 일과 내 일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저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치관의 차이일 뿐입니다. 백지장 한 장 차이일 뿐입니다. 주부가 부엌에서 부엌일을 열심히 하는데 그게 내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그게 주의 일이라고요. 목사가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쳐도 주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일 수가 있습니다. 무서운 얘기지요. 교회에서 내가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 다 주의 일인 줄 압니다. 어떤 자기 인기를 얻기 위해서, 직분을 얻기 위해서, 목사의 호구지책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기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일터에서든지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성실히 해야 하리라고, 죽도록 충성해야 하리라고 하면 그것은 주의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신 매매나 마약 사범들이 죽도록 그 일에 충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은 Closed universe가 아니고 Open universe라고 말했습니다 단번에 끝나 버린 완성된 창조가 아니고, 창조된 완성의 종말을 향해서 계속 열려진 가능성의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 가능성의 세계에 나를 창조의 역국으로 주님께서 불러 주셔서 나는 그 창조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는 영광스런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창조하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완성된 창조, 전혀 결함이 없는 창조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또한 이 완성의 종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는 계속, 잠시도 늙을 새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가담해야 합니다. 창조의 역군으로 가담해야 합니다. Open universe, 가능성의 세계, 열려진 세계에 나를 불러 주셔서 오늘도 나는 주의 일을 한다는 이런 심정으로 우리가 임할 때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할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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