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패배를 승리로 (삿 16:1)

첨부 1


1세기 전에 더글라스(G.C.M.Douglas)교수는 그의 사사기 주석에서 이렇게 논평하였습니다. “평범한 사사들 중 마지막 사사였던 삼손이 자기 나라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것은 히브리 민족의 퇴조 속에서 제시된 한 비극적인 장관(壯관 ” 이 “평범한 사사”는 사실상 대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삼손을 신화적인 존재로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삼손은 흔히 성경의 ‘슈퍼맨’으로 각색되어 그의 ‘비현실적인’ 활약상이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자극제라도 되는 듯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헐리우드의 대작’에서 다루듯이 삼손을 신화적인 영웅으로 간주해서는 안됩니다. 삼손은 어디까지나 엄연한 역사적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삼손의 믿음을 친찬한 히브리서11:32의 말씀을 놓고 그를 평가해야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한 구원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보통의 경우라면 온 나라가 동원되었어야 할 일들을 단신으로 감당해 내었습니다.

숫불 밟기

삼손의 타락은 불건전한 성욕에 대한 잠언의 경고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27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잠언6:25-28)

삼손의 초기 생애에서 극히 열정적인 측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열애적이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딤나에 살던 한 블레셋 아가씨를 열렬히 사랑하여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했었습니다. 삼손은 그의 후기 생애에서 누구나 빠지기 쉬운 성욕의 죄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사기16:1-3은 삼손의 이같은 약점을 드러내는 하나의 선명한 거울입니다. 본문은 들릴라에 대한 삼손의 유혹과 그녀의 배신이 육욕의 단순한 민족만을 위해 사는 생활의 불가피한 비극적 종말임을 지적해 주는 문맥입니다.

삼손은 가사로 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불레셋 사람들의 형편을 엿보거나 혹은 한 번의 대결을 조장하기 위해 이곳으로 갔다고 믿습니다. 그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갔었든 삼손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욥처럼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새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하고 말했어야 했지만 한 창녀에게 눈이 팔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이 창녀와 동침하였고,(16:1). 불레셋 사람들은 이를 알고는 밤이 새도록 기다렸다가 새벽에 삼손이 성읍을 빠져나갈 때에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였습니다(16:2) 그러나 삼손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온 밤을 창녀의 집에서 보내지 않고 자정에 일어아 안전하게 밖으로 피신하면서 성문 문짝과 기둥들을 뽑아 멀리 떨어진 산꼭대기로 메고 갔습니다(16;3).

삼손이 자정이 되어 창녀의 집을 떠난 것은 자신이 불레셋 사람들을 징계하는 주님의 일을 하지 않고 곁길로 들어섰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가 뉘우치고 돌아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죄에 사로잡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 탕자의 경우처럼 ‘제정신이 들어’(눅15:17) 돌아서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삼손은 아마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오! 하나님 제가 주님의 계명을 알고 주께서 저를 구원하신 것을 알면서 어찌 지금 창녀의 침실에 누워있습니까” 삼손이 정말 이런 탄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께서 아직도 삼손과 함께 하셔서 그로 하여금 블레셋의 콧대를 놀라운 방법으로 꺽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힘은 아직도 그를 더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능력은 주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삼손은 들릴라라는 한 블레셋 여인에게 마음이 쏠렸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유혹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정신을 빼았겨 그녀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여인과의 관계에서는 결혼에 대한 언급도 없고 수치스럽게 느꼈다는 대목도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도덕적 자유’나 ‘성의 해방’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들릴라에게 넋이 빠진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보상금을 약속하며 삼손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16:4,5)밝혀내라고 부추겼습니다. 들릴라는 이 제안에 동의하고 삼손을 꾀기 시작하였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간처응ㄹ 큰 장난거리로 여긴 듯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약해지려면 ‘일곱 가닥’으로 묶으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새 줄’로 묶어야 한다고 했다가 다시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베틀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16:13)고 말하였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일러준대로 세 번씩이나 시험해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삼손이 잠든 사이에 그를 묶고는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라고 소리쳤지만 삼손은 번번히 자기를 묶은 끈들을 간단히 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옆방에서 매복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16:6-14).

지금까지는 삼손이 들릴라와 재미있는 유희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것은 여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유치한 장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게임은 끝났다는 것이 드릴라의 다음과 같은 새로운 작전에서 명백해집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것은 살아 게신 하나님께 대한 삼손의 충성심을 향한 첫 번째 직접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들릴라가 삼손의 가슴 둘레에 짜놓은 유혹의 거미줄이 얼마나 강한 것잊지를 처음으로 직접 시험해 보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이 이스라엘의 사사는 여러 세월이 지난 후 잠언의 기자가 성경에 기록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역활을한 셈이 됩니다. (잠22:14)

삼손은 그만 들릴라에게 자기 능력의 비결을 알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처 나실인이었으며 머리를 자른 일이 없었습니다.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6:17). 들릴라는 이번에도 그전처럼 블레셋 사람들을 대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삼손이 잠든 틈에 그의 머리를 잘라내고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로 왔어요!’ 삼손은 잠을 깨고 자기가 그전처럼 어떤 위협도 거뜬히 처리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여호와게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16:20). 그는 잡혀서 두 눈이 뽑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큰 인물들이 더 이상 세력을 펴지 못하게하는 전형적인 방법의 하나로서 동양의 일부 지역에서는 시행된 관습이었습니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아프카니스탄의 페위된 왕들은 대부분의 경우 죽이지는 않고 눈만 멀게 함으로써 그들을 페위시킨 자들의 능력을 향상 상기하도록 하였습니다. 두 눈이 뽑힌 삼손은 가사의 감옥에서 그의 원수들을 위해 멧돌로 곡물을 가는 중노동을 하였습니다(16:18-21).

죄의삯

머리카락은 자라기 마련입니다. 또한 머리를 민 나실인의 경우,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은 나실인 서원의 갱신을 의미하였습니다. 물론 머리카락이 잘리워다고 해서 그의 힘이 빠진 것은 아닙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그를 떠났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신실치 못하였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운 것은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이었을 뿐입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멍에를 지고 혹사를 다하였습니다. 이 멍에는 삼손의 실패를 웅변적으로 역설하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그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참된 믿음이 희생되고 있었습니다. 삼손은 주님의 은총이 다시금 내리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삼손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때가 돌아왔습니다. 이 때는 물고기 신인 다곤에게 감사제를 드리는 축제일 이었습니다. 대형 우상인 다곤신은 약20년 전에 블레세이 빼앗은 이스라엘의 언약괘 앞에서 거꾸러진 적이 있었는데(삼상5:4) 이제 또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항하여 버젓이 블레셋의 각양 화초들로 장식된채 신전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삼손은 신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 옆에 서서 하나님께 블레셋에 복수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이 기둥들을 떠밀며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고 외쳤습니다. 신전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붕괴되었고 수천 명이 압사 당하였습니다(16:23-30).

이리하여 사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삼손의 친척들이 페허된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 그의 시체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분명 공포에 사로잡힌 블레셋 주민들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삼손의 시신을 운반해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과 함께 블레셋 고위층과 모든 장군들과 함께 죽었을 태니까요! 결국 이 마지막 사사는 그의 부친의 장지에 안장되었습니다(16:31).

바울은 로마서6:23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육적이거나 영적 사망에 다같이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삼손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재림 때에 살아 있지 않는 한, 모두 유체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살전4:17). 우리들도 다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롬5: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 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렇지만 구원이란 영적 죽음이 정복되고 부활 때에 육체적인 죽음도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사망은 구원의 승리 속에 매몰되어습니다!(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이 승리는 신자들의 현재적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인생살일지언정 우리들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고전15:55-58). 삼손의 죽음은 죄에 대한 은혜의 승리입니다. 히브리서 11:32의 말씀이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한편 불레셋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그들의 영원한 상실을 향한 부름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동일한 행위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많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다곤 신전의 붕괴 속에서 지금도 우리에게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