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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기 위해서 (눅 10:25-37,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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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살고 있는 사회를 보다 더 낫게 하려면, 우선 우리 자신의 동료, 이웃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를 중요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한 사회는 갑자기 유토피아처럼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나 사회기구의 개혁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사회인으로서 인간 본연의 자세에 대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생활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1.벗을 찾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자기가 벗이 되어 줍니다.

그것은 성서의 유명한 구절입니다. 어떤 율법 전문가가 일어서서 예수를 시험해 보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유명하여 흔히 부르는 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기에 긴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는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나옵니다. 기원전 1700년에서 1800년경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아들이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열 두사람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의 토지를 열 둘로 등분하여 그 책임을 맡겼는데 그 하나가 레위 부족입니다. 레위족의 주된 역할은 종교의식에 관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지나간 제관은 물론 레위 사람인 종교관계자로서 당시에 가장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마리아라는 것은 갈릴래아와 유대 사이에 끼여 있는 계곡지방으로서, 포로들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 해서 갈릴래아나 유대에서 싫어하고 경멸하며 사마리아 지방에는 착한 사람은 없다고까지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을 한 율법전문가는 유대지방의 사람이고 그리스도는 갈릴래아지방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양쪽에서 다 용납되지 않았던 사마리아지방의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지금도 그렇지만 지중해의 수면보다 2백미터 내지 4백미터나 낮아 식물도 자라지 못하는 사막과 같은 굉징히 더운 것입니다. 예리고의 거리에는 오아시스가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데는 인가도 없고 행인도 없는 호젓한 곳입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반생반사(半生半死)가 되어 내던져 버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율법전문가의 질문에 의하면 이웃사람을 돕고는 싶으나 그것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자기의 동료인가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유대의 지식층이나 부자나 지위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힘을 써두면 나중에 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 나중에 갚음이 올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이웃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대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시면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도와야 할 상대는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중심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 그 사람의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가능한 일을 해서 손을 뻗쳐 주는 것이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 생활 가운데 상관을 하다가는 나중에 귀찮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무관심하게 지내려고 생각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또 지금 당장 곤란한 사람이 목전에 있을 때에 그 사람에게 손을 뻗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누가 뭐라고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벗이 되어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길에서 만난 고통중에 있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습니다.

나를 우선으로 하는 이기주의는 더욱 나 자신을 좁히고 타인과의 상관하는 것도 자기 형편만을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보다 더 넓은 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남과 관계했으면 합니다. 또 먼데 있는 사람의 불행에 동정하고 돕는 일에는 누구나 그다지 저항을 느끼지 않으나, 매일 함께 생활하고 일하고 있는 친구의 고통에는 여러 가지 감정적 생각도 가미되어 좀처럼 도움의 손이 뻗쳐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가까운 사람에게야말로 먼저 넓고 친절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이것을 실행하지 않고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 힘을 쓴다는 것은 안되는 일입니다.

남을 정말 둘도 없는 사람으로 소중하게 여겨줄 때, 진짜 형제나 부자지간일 것 같으면 속임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거나간에 이쪽에서 능동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가 재판관처럼 심판할 자격이 없는 것이고 형제간 사이라면 능률적이 아니든 허비가 되든 간에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남에 대한 무관심은 사회에 대한 마이너스(손해)가 됩니다.

앞서 이야기와 관련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5:31-46에서 세상 종말, 즉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죽기 수일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즉 그때 하느님의 눈으로 본 인간의 가치가 어디 있는가를 잘 보여준 것입니다.

무언가 특별히 인류 진보에 공헌하고 신문에 날 만한, 동상이 세워질 만한 사람이 훌륭한 것이고, 노벨 평화상을 받을 만한 큰 일을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의 생활에 있을 수 있는 작은 일로서 곤란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응대하고 살았는가가 그 사람의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의 벌을 받는다는 것은 산 보람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남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만이 아니고, 곤란을 당할 때에 도와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벌의 선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난봄, 저는 친구 목사와 함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습니다. 2차대전시 독일 나치의 유대인 말살행위를 고발한 영화인데, 거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실제 인물 쉰들러라는 사람은, 독일 어느 지방의 유력한 사업가로서, 종전 얼마전부터 마음에 큰 변화를 경험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을 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찾아오는 죄의식-같은 독일인들이 저질르는 온갖 잔혹한 살육행위에 대해 그는 그런 식으로라도 저항하고 용서를 빌었던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내 옷에 달려있는 금뺏지를 팔았으면 유대인 한 사람을 구할 수 있었는데. 저 자동차를 팔아서 유대인을 구하는 자금으로 썼다면 유대인 서너 명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발벗고 나서서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사사건건 참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존중하면서 자기의 행동을 결정해 가야 합니다. 자기 기분의 만족이나 의무감의 충족을 목적으로 남에게 상관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필요에 수용해서 자기의 처신을 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지만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활방식은 얼핏 보기에 상식적인 것 같으나 이것은 지나친 교만입니다. 우선 첫째로, 사회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교만, 경쟁심, 무지, 판단의 한계, 성격 등은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에게 큰 폐를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구라다모모조(倉出白三)은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란 책에서 사랑이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인생길에 관심을 가지고 그 길동무가 되어 주는 것"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으로서 살고 있는 한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인 것이고, 사랑이란 특별한 사람만의 선의와 호의에 의한 봉사적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정의인 것이고 사랑의 결핍은 곧 부정이라는 가르침입니다.

 3.현상에 안심하지 않고 항상 남의 도움이 되려고 하는 사람을 사회는 요청하 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는 그가 구세주로서 공적 행동을 시작한 때의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도 아직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저 "다행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당시의 사람이나 현대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매일의 생활에 충족감을 맛보고 있는 사람, 기뻐하고 있는 사람, 할 일을 다 한 사람, 자기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한 사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사람, 평화를 맛보고 있는 사람" 등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정의를 위해 박해당하는 사람,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언제나 과거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전진적 자세로 이상을 갖고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현재의 자기 인격의 상태에 만족해 버리거나 체념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이상을 지향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해가며 노력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으로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세상에서 내가 제일 나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제일 훌륭하다고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러한 인간이니까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고 체념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한 것이 아니고, 또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자기는 타인의 신세를 지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사람, 고치려 해도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는 자신의 인격의 미흡함을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또 사회를 위해 힘을 쓰겠다는 의욕은 있으나, 용기가 없고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쑥스러워지는 등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교육을 받거나 지도를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은줄 압니다만, 그런 사람은 성장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엄하게 보신 것입니다.

슬퍼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직 "자기는 틀렸구나, 틀렸어"하고 자책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다시 한걸음 더 전진해서 결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기는 저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친구로서 한걸음 더 그에게 접근해 가자,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에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고 관계를 맺어 가겠다는 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자세를 실천하기로 노력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정의', '평화'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마찬가집니다.서로 둘도 없는 형제이고 사회를 이룩해 가는 동료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인정할 때에 자기의 편벽(偏僻)이나 선입견 등으로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를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정의가 있습니다. 감정적으로나 생리적으로 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일평생 못 고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가 결점을 지니고 폐를 끼치고 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하고 도와주고 살 때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제 자신도 많은 찔림을 받습니다.

단 한사람을 진정으로 소중히 하려고 할 때, 조직 안의 우리들은 전체가 문란해지거나 능률이 떨어진다고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소흘히 하지 않는다는 그것이 진정한 정의이고 평화라는 말씀입니다.

가족중에 한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모두는 그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서 생활하게 됩니다. 모두가 손해를 보았다거나 능률이 안 난다고 하지 않고 잘 참고 견디게 됩니다. 여행계획이 취소되고 큰돈이 축 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히 다루어지고 모두가 희생을 합니다. 넓은 사회 안에서도 그와 같이 단 한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서로 관계지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언제나 목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평화는 그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평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이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 편이 사회에 있어서 더 필요한 것입니다. 부부간의 평화나 가정의 평화도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만 하겠다는 것을 억제하고 서로가 떠받들어 주려고 노력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입니다. 또 화해를 시키는 사람도 양쪽에 다 그 뜻에 맞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양쪽 사이에 끼여서 양쪽이 다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쌍방 공통의 적이 생겼을 때에, 양쪽이 사이좋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평화란 조용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 같은 이미지가 강합니다만, 실지는 매우 활동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정말로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약한 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현재의 자신의 부족함을 슬퍼하고, 사회 안에서 항상 해야 할 일에 주리고 목말라하고, 이해를 못 받더라도 그 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제인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자기 쪽에서 이웃이 되어 주는 적극적 자세와, 매일매일 자기 자신의 모순과 싸워가면서 조금씩 전진해 가는 노력인 것입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할 수 있을 때는 결코 오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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