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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도를 만나지 맙시다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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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해발 750m의 고원지대에 있고, 여리고는 해면보다 250m나 낮은 지대에 있습니다. 즉 바다보다 250m나 깊은 곳이 바로 여리고 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급경사 내리막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35km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지만 굴곡이 심하고 산 계곡을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에 강도의 위험이 많은 길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나무가 많은 산은 아닙니다. 그러나 산이 높고 계곡이 깊기 때문에 강도들이 계곡에 숨어 있다가 나그네를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성한 곳입니다. 여리고에는 엘리사 샘이 있어 수많은 물이 쏟아져 나와 이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짖는데 땅은 기름지도 날씨는 늘 따듯하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고 무슨 곡식이든지 맛이 있는 것입니다. 저의들이 성지 순례를 갔을 때에도 여리고에는 많은 과일이 나와 있는데 대추야자 열매가 맛이 있고 값이 싸서 사먹으면서 여행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오하시스라는 향품이 나오는데 사막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목욕을 자주 할 수 없어서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 몸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수를 많이 뿌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나 이집트에는 향수가 많이 발달하였습니다. 또 여리고는 도자기가 유명한 곳이고 유리 컵이나 유리 그릇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여리고에서 물건을 사다가 예루살렘이나 다른 도시에 파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 만난 사람은 여리고로 물건을 사러 가다가 강도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가르켜 주시기 위한 비유의 말씀으로 한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 가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을 몽땅 털리고 버려진 상태에 있을 때 레위인과 제사장은 못 본척하고 지나갔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출해 주었다는 이야기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1.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엊그제 신문에서 보니까 여자 둘이 낀20대 젊은 강도들이 골프를 치고 나오는 중소기업 사장을 납치를 하여 사장의 자동차 트렁크에 가두어서 끌려 다니다가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들어 차를 버리고 도망하다가 모두 잡히고 중소기업사장은 구출되었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 뿐입니까 지금도 매일 몇십명의 여인들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집을 나가 가출하는 여성도 있지만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서 사창가로 팔려 가는 사람들의 수도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주위에도 무서운 강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이웃을 경계하고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는 이 사회가 악한 강도를 만나서 모두가 악해 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을 하고 하루에 3번씩 기도를 하고, 하루에 7번씩 하나님을 찬양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유대나라의 국회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확신도 없었고 영생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영생의 확신을 주지 못한 종교는 종교의 강도입니다.

요즈음 뉴스에서는 영생교에 대해서 매일 떠들고 있습니다. 조희성이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실패자요, 자신이 승리자요, 이긴 자, 이기 때문에 자기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떠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으려고 조희성을 믿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받치면서 그곳에 빠져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희성은 종교라는 무서운 칼을 가지고 사람들을 살해한 강도입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이번에 우리들은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조희성이가 감옥에 가고 영생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떠들고 있는데도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은 지금도 조희성이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영생을 믿는다고 떠들고 있으니 참으로 무서운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단에는 무서운 사탄이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단에 한번 빠지면 사람들이 헤어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단강도들 조심할 때입니다.
베데스다의 연못가에 38년된 병자는 건강의 강도를 만나서 38년동안 고통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약도 많고 병원도 많이 있지만 건강에 강도를 만나서 고통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신일교회 성도들은 건강의 강도를 만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눅5장에서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은 밤을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땀을 흘리고 수고한 만큼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에 복을 받아야지 강도를 만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질의 강도를 만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업이 잘되고 물질이 많아서 풍요롭다고 기뻐할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정신적인 강도를 만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옛날 보다 얼마나 살기 좋아 졌습니까 청주시내를 나가보면 여자들이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대부분 큰 차들만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현대를 보면 가정이 파탄되고 이혼율은 점점 높아가고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려서 시달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울증은 남자보다 여자가 걸릴 확률이 세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신적인 강도를 만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눅16자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세상 사업에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머리도 좋아서 사업의 구상을 잘했고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습니다. 이제 세상 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좋은 집을 가졌고 비싼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지옥에 떨어져서 불꽃가운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는 풍족하게 살았지만 세상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세계를 도적 맞았고 영혼이 강도 만나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영혼의 강도를 만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는 조금 힘들고 어렵게 산다고 하여도 우리들의 영혼은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강도를 만나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잘 만나서 복을 받으시고 영적으로도 예수님 바로 만나서 영혼 구원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강도 만나지 않았나 곰곰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물질의 강도는 안 당하셨는지요 건강의 강도를 만나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으신 지요 영적으로 강도를 만나면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의 강도를 만나서 기도가 끊어지고, 찬양에 강도를 만나서 찬양이 식어지고, 감사에도 강도를 만나서 감사가 없어지고, 처음신앙의 뜨거움을 잊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신앙에 강도를 만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열심의 신앙에 강도를 만나서 다 빼앗기는 성도들이 되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왜 강도를 만나게 됩니까1) 예루살렘을 떠나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고,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으며,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며, 성도들 간의 만남이 있는 영적인 곳이라면 여리고는 세상적인 것이 풍부한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영적인 도시이고 여리고는 세상적인 도시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전통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통곡의 벽에 모여서 하루에 세번 기도를 드리며, 그들의 율법서를 읽고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이방의 도시로 알라신을 믿는 과격한 팔레스타인들이 사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호수아6:26에서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한 뒤에 “누구든지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 기초를 쌓을 때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 계자를 잃게 될 것이라” 고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합왕 때 벧엘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여 했다가 맏아들 아비람을 잃게 되었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고 성을 세우는 것을 중단하고 만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축복의 땅이지만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떠난 저주의 땅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욕심에 끌려서 교회를 버리고, 말씀을 버리고, 예배와 기도를 버리고, 끝내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향하다가는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을 떠났다는 말도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압으로 간 그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여인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장대 같던 두 아들도 죽게 되었고, 세 사람의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하여 베들레헴을 등지고 모압으로 갔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올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올라가는 것은 내려가는 것보다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참고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행해야 할 도리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자는 강도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은 희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정상을 향하여 한발 한발 올라간다는 것은 희망을 향하여 한발 한발 전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희망을 가지고 전진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올라가는 사람에게는 감히 강도가 덤벼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불순종은 우리를 강도를 만나게 합니다.
요나 선지자는 앗수루의 수도 바벨론에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외치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면 요나의 생각으로는 앗수루는 유대 나라와 원수의 나라인데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되면 그들이 회개하게 될 것이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므로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그들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떠난 것입니다.

그 후에 요나는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고 커다란 고기 배속에 들어가서 3일을 회개한 후 강제로 바벨론으로 가서 복음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게 되면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내 뜻대로 살게 되면 어느 새인가 강도가 찾아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금도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고,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3. 강도 만난 사람은 어떻게 구출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진정한 이웃이며, 친구이며, 구원자가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옆에는 제사장이 지나갔지만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친구도 되지못하고 이웃도 되지못하였으며, 구원자도 되지못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주며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인도자가 되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레위 사람들도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고 제사장을 돕는 종교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은 있었지만 이웃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에 이르렀는데 그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혼열인이라고 개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멸시받는 사람이었지만 짐승에서 내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서서 그를 안아 일으키고 상처를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치료해주고 싸매 주었습니다. 자신이 타고 가던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고 자신의 돈을 들여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비유하여 이 땅에 강도 만난 사람들의 친구가 되며, 이웃이 되며,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증거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1) 강도 만난 자리에 사마리아 사람이 도착을 하였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에 도착을 하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이는 이 땅에 강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이 세상에서 사탄의 강도를 만나서 고통 당하고 사탄에게 영혼을 도적 맞은 인류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포도주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강도 만나 상처를 입고 있는 우리들에게 포도주와 같은 붉은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은 강도를 만나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아 쓰러져 있는 우리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며 함께 하시는 성령을 상징하시는 것입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나므로 강도 만난 우리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붉은 피를 뿌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3)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막은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이 땅에 수많은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돌보시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강도만 나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치료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일교회도 이 땅에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치료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주막주인에게 은전 두닢을 주면서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은전 두닢은 신구약 성경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씀과 성령충만 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돌아온다는 말은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한 성령으로 강도 만난 사람들을 치료해 주어야 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는데 눈오는 추운 겨울에 어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지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허허 벌판입니다. 절망하여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 오두막 집이 보입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하여 오두막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안에 낡은 식탁 위에는 곰팡이 나서 말라버린 먹을 수 없는 빵이 한조각있었고, 중앙에 있는 난로에는 기름 한 방울 남지 않은 꺼져버린 난로가 노여 있고, 천장은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이고 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나그네는 희망을 잃고 그곳에서 얼어 죽어가고 있는 환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본 환상 중에 오두막집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말라버린 빵은 사랑이 없고 능럭이 없는 말라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불이 꺼져버린 난로는 식어져 버린 성령의 불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두막 집을 찾아 들어간 사람은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하다고 교회를 찾아 들어간 죽어 가는 영혼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말씀이 살아 있어서 날이 선 검과 같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은 뜨겁게 달구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여러분이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가고 불순종하다가는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해 힘차게 달려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붙잡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신일교회는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돌보아 줄 수 있는 주막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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