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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자비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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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화가가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복음에 대한 그림은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침몰한 배에서 선원 한사람이 구사일생 으로 살아나서 두손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으로 생동감이 있고 세상풍파속에서 반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를때 산 소망이 주어진다는 뜻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그 그림을 보다가 다시 한번 더 붓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으로는 복음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완전하게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는 붓을 들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냥 얼핏보기에는 똑 같은 그림이었는데 앞에 그린 그림과 한군데 틀린 곳이 있었습 니다.

앞에 그린 그림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바위를 두손으로 움쳐잡았지만 뒤에 그린 그림은 한 손은 바위를 움켜잡고 다른 한손은 물에 빠져죽어가는 다른 사람 을 구하기위해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 기독교는 자기만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다른 영혼들을 전도해서 함께 천국가는것이 우리 기독교인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속에서 오늘의 말씀 자비의 삶이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중에서 선한 사마리아에 관한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데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율법사에게 다시 묻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느니라"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성도 여러분 ! 예수님과 율법사의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가 느낄수 있는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표시로서 그 증거로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혹 없다면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것이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는것도 아니요 우리의 목숨을 다하는것도 아니요 우리의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율법사가 계속해서 말하는 내용을 추적해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비로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의 이야기를 마치고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이 물음에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자니이다"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자비를 베풀어라" 성도 여러분 !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영생을 얻는것이라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있는것입니 다.

그렇다면 자비란 무엇입니까 자비는 성령의 열매의 요소중에서 5번째에 해당되는 것인데 이 자비는 혼자서 마음속 에서만 누리는것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어 주어야 되는 은혜입니다.

사실 지난 시간까지 우리가 묵상했던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은 어떻게 보면 나 혼자 서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틀립니다.

자비를 베푼다는것은 선한 사마리아의 이야기처럼 상대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적으로 간직되어질수 있는 은혜가 아니라 내적으로부터 시작이 되어 져서 외적으로 옮겨져서 상대방에게 표현되어지는것이 곧 자비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1.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에게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가슴이 있었습니다.

 3. "가까이 가서-" 그는 행동할 수 있는 발이 있었습니다.

 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그는 섬길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그에게는 끝까지 희생하는 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사마리아의 자비를 베푸는 장면은 5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 다.

 1.불쌍함을 보는 눈

2.불쌍히 여기는 가슴

3.행동하는 발

4.섬기는 손

5.끝까지 희생하는 결단 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들에게도 이런 5가지의 자비를 베푸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살펴볼 때 과연 어떠합니까 대부분의 경우 불쌍히 보는 눈과 불쌍히 여기는 가슴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 행동하는 발 , 섬기는 손 , 끝까지 희생하는 결단은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혹 있더라도 극히 미미한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왜 이런것들이 우리들에게는 없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수많은 현대교인들로 부터 질책을 받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의 성도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두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그 당시 사회의 지도자요 종교지도자들인 저들이 어떻게 그 럴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로 돌아가서 제사장의 입장이 된다면 그렇게 쉽게 성토를 할수 없게 됩니다.

그 당시 제사장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위해 수종들 고 재물을 바치고 제사를 집행하는 성별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런 성별된 사람이기에 그는 제사를 지내기 전 얼마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 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것입니다.

제사장은 난감했습니다.

성별된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그 사람을 돕다가 피가 혹 묻으면 불결해지고 혹 치료를 하다가 그 사람이 죽게되면 그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의 머리속에는 레위기서 22장 4-7절의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시체로 부정해진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성전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끝에 제사장은 그 자리를 피해버린것입니다.

그 당시 그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리할 수 있었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입 니다.

다음 레위인의 경우입니다.

레위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속한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성전에 관계된 자질구레한 잡일까지도 맡아하는 성전 봉사자 였습니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오직 성전 봉사만을 하는 전문적인 직업인입니다.

이런 레위인이었기에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돕는것은 자기일이 아니라고 생각 했습니다. 자기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을 두고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결국 제사장도 레위인도 둘다 종교적인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 습니다.

성도 여러분 ! 과연 이들의 행위가 옳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한가지만 알았지 그 이상의 것을 몰랐습니다.

이사야 1:11-12 에서는 이런 잘못된 모습의 신앙에 대해 실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고발입니다.

마 12:7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자비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척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그는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라" 성도 여러분 ! 과연 무엇이 옳습니까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서 마땅히 행해야 될 자비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부분은 예배 입니다.

예배는 열심히 드리되 예배를 드리는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1년에 52주 한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자랑거리가 됩니다.

물론 결석하지 않고 예배드리는것 중요합니다.그러나 그 자체가 자랑거리가 되어서도 안되고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종교적인 감상주의에 빠져서 그 에배로 인해 자신의 처 지에 대한 위로만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그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는 것이고 , 그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 시간 듣고 그 말씀앞에서 내 삶에 대한 변화를 하나님 앞에서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들에게 예배드리는 그 이상의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우리는 물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그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했습니까 ] 저들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저는 예배를 드리러 가기위해 어쩔수 없이 그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수 밖에 없었습 니다.] 이런 대답앞에 우리는 날카롭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님 레위인이여 당신은 왜 예배를 드리러 갑니까 / 왜 기도를 드립 니까 / 왜 성경 공부를 하십니까  아마 이 질문앞에 저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말도 못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 이 질문과 이 대답이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만 해당되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어지는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는 왜 기도를 합니까 우리는 왜 성경공부를 합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 , 우리는 기도를 통해 ,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삶이 변해지는 그래서 불쌍하고 가난한자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시간에 너무 지나 친 이야기가 아닌가 고민을 하다가 감히 용기를 내어서 말씀드립니다.

옛날에 석가님과 공자님과 예수님 세분이 산보를 하는데 한 청년이 못에 빠져서 허우 적 거리는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공자님이 말하기를 "허어,군자는 대로행 인데 어찌하다 물에 빠져 고생을 하는고 "하더랍니다.그 다음에 석가님은 '전생에 무 슨 죄가 있어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 했답니다.

그 뒤를 따라가던 젊은 예수님은 아무말 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건져냈 다는 것입니다.

한낱 우스운 얘기 같지만은 우리 기독교는 도덕적인 책망 이전에 , 철학적인 윤회설 이전에 물에 빠진 사람을 나가서 건져 주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요 우리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용서해 주고 믿음을 주고 돌보아주는 은총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것입니다.

유명한 세익스피어의 작품가운데 우리 인간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친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속에는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긍휼의 성질은 강요 되지 않는것이니 그것은 하늘의 단비처럼 내린다.

긍휼과 자비는 베푼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축복이 된다 .

긍휼은 강자중의 강자요 왕관보다 나은 군주가 된다.

긍휼은 이 세상의 지위보다도 더 위에 있고 그것은 왕의 가슴속에 군림한다.

긍휼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권속된자로서 우리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자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산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역시 주위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받은 자비를 베풀수 있어야 됩니다.

불란스 말에 '노불레스 오불레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귀한 사람은 의무를 더 감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배운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돈이 많은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이 없이 시달리는 사람을 돌보아 주는것이 '노불레스 오불레지'인것입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받아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받아누릴진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역시 우리가 받은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의 자비를 베푸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주위의 영육간에 연약한 자들을 보고

1.불쌍함을 보는 눈으로

2.불쌍히 여기는 가슴으로

3.행동하는 발로

4.섬기는 손으로

5.끝까지 희생하는 결단으로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시 사는 방법인것입니다.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에게 준 기념 훈장에 기록되 어 있는 한 문장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긍휼히 행하는길은 하나뿐이 아니다.말로도 할수 있고 돈으로도 할수 있다. 그러나 돈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거든 눈물로 할수도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삼일밤 예배시에 이 부족한 종의 입술을 통해 자비의 삶을 살것 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요구앞에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이 시간 이후에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탈 피하시고 청산하시고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자비의 삶을 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자비를 행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긍휼을 베풀어라" 이런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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