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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도 만난자의 참 이웃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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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인도주 의나 자선의 교본으로 생각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본문은 복음적인 의도가 있 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5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25"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합니다. 얼핏듣기에는 온순한 질문같 지만 그 중심은 알고싶어서도 아니며 듣고 따르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이 무식한 갈릴리 촌놈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한 번 봐주 자는 속셈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 앞에 망신을 시키고 가능한 한 율법적으로 나 로마법에 의해서 예수님을 책잡아 넘어뜨려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이라도 박게 할 심사에서 하는 가시 돋힌 질문입니다. 이 율법사의 잘못된 태도가 29절의 두 번째 질문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러니까 자기의 유식함, 자기의 위대 함,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하여 질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의 옳음을 나타내어 예수님께로부터도 칭찬과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배우려는 자세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말하게해서 그대로 행하면 살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도 다시금 "내 이웃이 누구 입니까"하는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의 내면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좋으나 내가 사랑해야 할 그 이웃은 누구입니까 적 어도 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 나의 상대할 만한 이웃이란 누구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많은데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내 사랑을 받아들일 만한 자격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도, 장 가도 못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저가 모르고 있는 그 이웃, 잃어버린 이웃을 찾아주시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게됩니다. 그 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맨 처음 질문이 영생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점입 니다. 그리고 이제 이웃의 문제로 넘어가면서 생각할 것은 이웃을 찾을 때에 그 속에서 영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찾으면 영생을 찾게되고 이웃을 잃어버리면 영생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깊 은 뜻을 잘 이해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바로 찾아주 고 그를 통하여 영생에 대한 해답을 듣게하시는 것입니다.

 1.강도만난 사람의 이야기

강도만난 사람의 사건을 놓고 취급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1)강도 만난 본인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배경을 보아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 위험한 길을 왜 혼자 서 어쩌자고 갔느냐"고 책임을 추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두고는 강도 만난 본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잘 잘못을 따져서는 이웃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폐일언하고 강도 만났다는 사실에 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2)강도 그 자체에 대한 사회 문제를 묻지 않았습니다.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에 이렇게 강도가 날뛰다니 말이나 되느냐 왜 이런 사회가 되었느냐 그 대책은 무 엇이냐 는 등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말이 없습니다. 단지 강도 만났 다고 하는 현실, 거의 죽게된 사람, 피를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생명,지 금 이 사건을 놓고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절박한 생명의 문제로 취급하고 계십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를 해서 그만 물 에 빠져 떠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은 그 떠내려가는 사 람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반응이 있습니다.

1)인생무상 인간은 한 번 났다가 한 번 죽는 것"하면서 지나 갑니다.

2)부모 말씀을 잘 들을 것이지 어렸을 때부터 부모 말씀을 잘 안들었구나. 자네 는 물에 빠져도 싸다. 그것은 네 잘못이다. 왜 조심하지 않았나" 3)사람의 죄 값은 사망이다. 네가 잘못했으니 네가 죽어야지! 4)최선을 다 해보아라. 살 길이 있을지 아느냐 그러고도 불가능하다면 그저 조 용히 죽음을 기다려라. 빈둥거린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5)다섯 번째 사람은 이런 저런 생각, 물어볼 것도 없이 우선 물로 뛰어들어가 사 람부터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말이든 훈계든 할 것입니다. 그가 누 구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건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건져 야하고 살려야하는 생명 위주의 사건입니다. 과거가 어떻고 죄가 어떻고 하며 율 법, 도덕이 어떻고 인생무상을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놓여진 이 한 생명을 우선 건져놓고 볼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 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행동이 먼저입니다.

 2.제사장과 레위인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그냥 지나갑니다. 이 두 사람은 종교적 인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제사장이고, 하나는 레위인입니다. 다른 사 람도 지나갔테지만 두 사람만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 라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 시킨 것은 당시의 종교계를 향한 강한 도전입니다.

1)제사장:제사장이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위해 수종들 며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집행하는 성별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제상장은 항상 마음뿐 아니라 몸도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나가 거룩 한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함부로 더럽혀질 수 없는 이 제사장이 지금 제사드리러 가는 길인데 여기 불한당을 만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죽어갑니다. 하지만 성별된 제사장으로서 이 사람을 만지며 돕다가 피 를 묻히면 어떻게 되고 만일의 경우 만지는 중에 죽기라도 하면 시체를 만지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됩니다. 레22:4-7"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 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자 나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한 자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성물을 먹지 못할지며 해 질 때에야 정하리니 그 후에 성물을 먹을 것이라 이는 자기의 응식이 됨이니라" 시체로 부정해진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성전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습니 다.

이러한 입장의 제사장이 24반차를 따라서 오래만에 제사를 드리게되었는데 불쌍 한 사람을 돕는다고 피나 시체를 만지게되는 날에는 모처럼의 기회를 잃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중요한 일인 제사드리는 일을 망치면서까지 이 거의 죽은 시체와 같은 사람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12: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 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그 제사장은 불쌍한 이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께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보다도 귀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때문에 소와 양을 드리는 형시적인 제사만을 생각 하면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피하여 지나갔 다는 것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보고는 되도록이면 더 보지 않으려는 자세로 지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2)레위인 레위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속한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제사 장과는 달리 성전에 관계된 자질구레한 잡일까지도 맡아하는 성전 봉사자들 입니 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성전 봉사만을 하는 전문적인 직업인입니다. 그 러므로 오늘 이 구제하고 희 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할 일이니 내가 책임질 것 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여기에서 비교되는 두 가지 입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제사장 쪽에서는 지금 내가 이러한 사람을 도울 때가 아니라는 입장 입니다. 다른 시간에 만났더라면 돕겠지만 성전에 제사드리러 가는 처지에서 부 정하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간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레위 사람은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그러한 결과 이 두 형태의 사람이 모두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린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자기일 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의 일만하겠다는 것이고, 레위인은 레 위인의 일만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적인 이유를 구실로 오늘 죽어가는 이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종교적 이유를 구실로 오늘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 시간, 종교적 이유 가운데 가장 근 본적인 것이 오늘 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깊은 의미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3.사마리아인.

 본문에 보면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esplarxnisdne)의 헬라어는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는, 애타는 마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는 순간에 이미 마음이 뜨겁게 움직여져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사람의 아픔이 나에게도 전달이 됩니다. 그의 고통으로 나의 마음이 아파진 다는 것입니 다. 이러한 공감대를 가지고 함께 하고자하는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군간 좌우를 가릴 것이 없습니다. 그저 뜨거운 마음으로 부둥켜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겨서 가까이 갔다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가까이 갑니다.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서 다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무슨 도덕을 따지고 종교를 거론할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 애타는 마음에서 아예 본능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저를 도움으로 내가 어떻게 될 까를 생각지 않고 자신의 위험이나 처지를 생각지 않고 오직 죽어가는 그 사람을 위하여 도와 줍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한 다음에 그 다 음 일까지 처리하고 떠나갑니다.

 이 사람의 마음과 정성으로 보아 계속 거기 머무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바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한 사람을 위하여서 는 할 일을 다하고 자기가 못 다한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계속 도와줄 것 을 부탁하며 그는 갑니다. 다시 말하면 도울 수 있는 만큼 필요한 만큼, 완전한 살아남을 만큼 여러가지 모양으로 책임지고 도왔습니다. 한 번 돌아보고 마는 것 아니라 끝까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돌아보게 해서 그 일에 책임을 집니다.

 이제 결론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묻기를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 푼 자니이다."하고 대답하게 됩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결론적인 것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 아인의 이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는 흔히들 일반적으로 불쌍한 사 람을 돕는 것이 이웃을 돕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데 오늘 본문은 그러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는 데 촛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하는 강조점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 입니다. 아마도 여러 모로 생각컨데 이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 사람이라는 추측 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통한 교통은 유대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 해 집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통한 교통은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인을 이웃되게 만들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건을 통하여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조되는것은, 단순한 마음으로 돕고, 단순한 마음으로 받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맞아들이게 되면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영 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거가 어떻고 현재가 어떻고 하는 것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거기에 이웃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우월 의 벽을 깨뜨리기 전에는 이 사마리아 사람의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 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자기의 이웃인 사마아인을 만날 때,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웃을 만나는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사마리 아인의 친구가 아니라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생명을 갖다주었듯이 예수님을 이 웃으로 만나는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이웃으로 만나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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