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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머무는 생활(2)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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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머물러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육 간에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잠재력과 성숙된 인생을 살 수 있는 잠재력과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과 가능성은 우리가 복되게 되튼 최상의 조건이요 필수적인 요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삶을 더 충만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잠재력의 1/10, 1/20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개발하지 못하고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가득차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창조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만끽하며 사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 우주 속에 하나님의 음악과 시들이 가득있지만 우리는 그것의 1/10도 느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재미 무슨 재미가 많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는 재미보다 더 좋은 재미가 없어요. 그러나 오늘 성도들이 참 삶의 재미를 얼마나 느끼고 삽니까 이 세상에 가득찬 신비한 하나님의 향기를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그러면 왜 우리가 이 우주 속에 가득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삶의 재미를 조금 밖에 느끼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의 문을 조금밖에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동판매기 안에는 커피, 코코아, 우유, 오렌지쥬스, 사이다, 콜라 등 여러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자동판매기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입니다. 그러나 자동판매기의 일부분만 고장이나도 돈을 넣어서 눌러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잠재력과 하나님이 영광으로 충만된 삶을 못하는 이유도 결국은 하나님과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극히 일부분이 고장이 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복합체 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욕구가 있고 심리적인 욕구가 있고 영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다 채워지지 아니하면 즉 고장이 나면 몸 전체 조직에 손실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적인 욕구, 정신적인 욕구, 심리적인 욕구를 골고루 충만하게 채움을 받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세가지 욕구 가운데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욕구가 한가지 있는데 그 욕구가 채워지고 충족되면 다른 욕구가 차음 채워지고 우리의 내부조직이 건강해지고 삶이 풍성해지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아에 대한 깊고 참된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실된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기 수용입니다. 신뢰감있는 자기존중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존재가 좋습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나는 좋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내부의 축하소리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육체적 욕구나 심리적 욕구, 정신적 욕구는 저절로 차츰 차츰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연말에 삼덕교회 성도들의 분포를 보니까 40대 이하가 거의 60% 정도 였습니다. 그만큼 젊은 분들이 많이 계시는 데 우리가 젊기 때문에 욕구가 강하고 목표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높습니다. 특히 젊은 붐들이 그 욕구에 다 응하지 못하고 어떤 가치관에 다라 주지 못할 때에 갈등하고 고뇌하고 회의를 느끼게 되며 자기를 저주하고 학대하게 됩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나는 내가 있기 때문에 좋다"라는 내부의 축하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족한 마음이 있으면 가장 행복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자기를 학대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신앙없이 자기 만족속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괴로운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학대하고 희생하면서 남을 사랑하고 도와 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 잘못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자기를 긍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면 풍요롭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을 보시고 이 세상을 보셔요. 이 세상의 윤리, 도덕이 무엇입니까 '남을 사랑해라''이웃을 사랑해라''희생해라''남을 도와 주어라'라고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수 없이 가르치지만 세상을 살펴보면 이기적인 사람들만 양산해 놓고 있습니다. 사랑이 매말라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부르짖어도 이기적이고 사랑이 매말라진 모습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버틀란트 럿셀은 말하기를 "자기 스스로와 잘지낼 수 있는 사람이 남과도 잘 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와 잘 지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싸우지 않습니까

조스와 리브만이 쓴 책 가운데 [영혼을 찾는 현대인]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그대 자신을 충분히 믿고 사랑하라. 그리하면 이웃을 믿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실 생활에서 가장 간단한 것에는 가장 어려운 훈련이 필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난한 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훈련을 거치지 아니하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수용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문제의 근본이라고 칼 융이 말했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수용은 모든 가치관의 기초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가장 미워하는 사람, 가장 헐벗은 사람, 가장 못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삭게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삭게오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나중에 세리장이 되었으며 그는 부자였습니다. 성경말씀에는 권력도 있고 재산도 있는 이 삭게오를 전부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삭게오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말씀에 보면 삭게오는 키가 너무 작았다고 합니다. 삭게오의 생활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삭게오도 하나님의 영광에 충만된 삶을 살 수 있는 잠재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키가 너무 작았어요. 부모로부터도 키가 작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을 테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가 되어도 삭게오는 키가 작아서 외톨박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 아이는 왜 저렇게 키가 작을까"하는 저주와 조롱속에 자랐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삭게오의 마음속에 싹이 트고 자라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아주 좋지 못한 이미지입니다. 그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어느 누구로부터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찼을 것입니다. 혹시 거울 앞에 섰다면, 자기의 보잘것 없는 육체를 보고 얼마나 자기를 미워하고 저주 했겠습니까

그러다가 그러한 자신에 대한 생각이 마침내는 적개심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향한 보복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민족을 팔아먹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직업인 세리를 선택해서 지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자이고 권력이 있으면 내가 아무리 키가 작아도 너희들, 내게 와서 굽신 거리겠지"하느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끝내는 세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삭게오의 인생입니다.

삭게오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도 못했지만, 자기도 자기를 조금도 사랑할 수 없는 삶을 산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삭게오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기심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기주의자를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이기심이란 자기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남을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삭게오는 이기심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웃도, 민족도, 동족도 없습니다. 그는 재산이 있고 지위가 높았을 때 말할 수 없이 오만했을 것입니다. 그는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권세와 재산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게오의 우월의식은 키가 작고 자랄 때부터 받은 조롱과 멸시로 인한 자기 마음속에서 자신을 형편없이 보는 열등의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우월의식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자기 본위로 살고 자기 도취에 젖어서 살았을 테지만 삭게오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너무 외로웠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삭게오는 사랑을 받고싶었고 이해를 받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지만 사람들의 장벽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데 가장 큰 장벽은 사람 장벽입니다. 사람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삭게오는 용기를 내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멀찌기서 바라보았읍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쳐다 보시면서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게오가 일평생 살아 오면서 처음 들은 자비한 음성의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너무나 황공해서 뽕나무위에서 뛰어내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루밤을 지냈습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예수님과 삭게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삭게오가 예수님 앞에 벌떡 일어나서 "내 가진 것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남에게서 빼앗은 것 많은데 4배를 보태서 다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삭게오에게 이런 아름답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잠재력을 일찍부터 주셨지만 그는 일평생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과 가능성을 하나도 불휘해 보지 못하고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속에서 그 놀라운 가능성이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삭게오는 그날 밤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진실된 모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진실된 모습을 예수님 앞에 정면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용서가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 특히 예수님이 많이 만난 죄인들과 창기나 세리나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을 정죄하신 것을 저는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삭게오는 예수님께서 "네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삭게오의 삶은 지옥과 같았고 그 자신의 삶의 심판을 자기가 다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 특히, 잘못된 사람이나 죄인들을 보실 때마다 "너도 피해자다"라는 눈으로 보셨습니다. 삭게오도 피해자이지요. 부모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정죄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며 자내온 삶의 피해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나, 창기에게나, 삭게오에게나 "네가 왜 이런 짓을 했느냐"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래"하시며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너도 피해자다"라고 하시며 얼마나 큰 용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 순간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삭게오는 자기의 인생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자기의 지나온 모든 삶을 다 용서해주는 그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벌떡 일어나게 되고 지나온 모든 삶을 청산하고 자기의 인생을 직시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지만 주님은 그를 찾아 주셨고 그 주님을 그가 받아 들이고 주님의 용서를 그가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비록 지나온 그의 인생이 뒤틀린 인생이었지만, 그의 인생을 그대로 이해하고 그의 인생을 용서하고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로 인하여 피해를 입었던 이웃에 대한 사랑이 떠오르게 되어서 예수님앞에 일어서서 그 모든 것을 갚겠다고, 나누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기심과 오만과 우월감과 자기도취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자기를 용납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도달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용서로 자신을 용서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을 받아주고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그 삶이 일어나게 될 때 우리의 내부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자신을 그대로 받아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정법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만일-했더라면...만일-할것이라면..."하고 가정법을 사용하는 인새은 전부 자기를 정죄하는 인생입니다.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섯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른 문제로 인하여 우리의 욕구를 채우지 못했던 빈 공간이 저절로 차츰차츰 채워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삭게오의 경험이 우리들의 경험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삶을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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