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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에 머무는 생활(3)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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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랑의 본질과 사랑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의 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 13:1-3까지의 말씀을 보면 어떠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영적인 은사가 아무 유익이 없다고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영적인 은사는 방언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방언의 은사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면 방언의 은사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방언하시는 분이 많은데, 그 방언에 사랑이 빠지고 방언만 남으면 방언 못하는 사람을 성령 못받았다고 정죄하게 됩니다.

두번째 영적인 으사가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은사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에 예언의 대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설교는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고 정죄하게 됩니다.

지식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많은 지식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지식은 속물근성이 있기 때문에 남을 깔보고 멸시하기 쉽습니다.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뜨거운 믿음이 있다해도 그 믿음에 사랑이 포함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믿음은 무서운 것이 됩니다. 믿음의 은사는 때때로 아주 잔인한 은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 믿음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때로 죽이기도 합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선생은 우리 장로교회가 가장 좋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놀라운 믿음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때 그 믿음의 은사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자기와 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세르베투스]라고 하는 자기와 대적되는 사람을 화형에 처하도록 버려 두었습니다.

믿음의 은사에 사랑이 결여 되면 지극히 잔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이 종교싸움입니다.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제의 은사에 사랑이 없으면 거기에는 우월감과 남을 값싸게 동정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때로 목숨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4-7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첫째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오래 참는 것을 누구의 윤리라고
생각합니까 강자의 윤리라고 생각합니까 약자의 윤리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꾹 참고 있는 사람을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내하는 것은 약자의 상징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인내하는 것인에, 참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온유한 것, 투기하지 아니하는 것, 자랑하지 아니하는 것, 교만하지 아니한 것,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얼핏 보기에는 약자의 윤리인 것 같으나 참 강한자가 아니면, 참 사랑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분노를 나타낸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패배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15가지의 사랑의 정의를 한마디로 묶어서 사랑의 본질을 말한다며 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선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이 수반되지 아니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선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아 선이 수반되지 아니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미움이나 증오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는 죄입니다.

사랑에는 사랑를 받는 것과 주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죄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사랑을 받지 아니하려는 오만과 사랑하지 않으려는 이기주의 입니다. 오만은 남의 호의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이며, 이기주의는 남을 사랑하기를 포기한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속에는 언제나 선이 그중심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목적은 선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궁극에 가서 선을 창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9장에 삭게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게오를 찾아 가시고 삭게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시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삭게오, 미움과 증오로 가득차 있던 삭게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삭게오의 마음속에 선이 창조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완고하고 완악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삭게오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놀랍게도 그의 속에 선이 창조 되어져서 "예수님,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남의 것 빼앗은 것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목적은 선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새를 무척 좋아 하는데, 새를 좋아한다고 손을 꼭 쥐고 있다가 몇 시간 후에 보니 새가 죽어 있습니다. 꽃을 좋아한다면서 꽃에 물 한방울 안 주는 사람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꽃을 사랑한다고 해서 날마다 물을 주어서 꽃을 죽게하는 사람도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맣은 사람들은 거짓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선을 창조하지 않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목졸라 죽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사람이 교회를 질식시키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부모들이 자식을 죽이고 있습니다. 아내를 잘못 사랑하는 사람이 아내를 죽이고 있습니다. 의처증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라를 자기 나름대로 무척 사랑했던 히틀러가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사랑하고 아끼는 결과로 그 자녀들 속에 더 큰 선이 창조될 때 이것을 부모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추한 사람이 깨끗한 사람으로, 증오심으로 불타던 사람이 사랑에 불타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참 사랑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운운하며 그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좀더 사랑의 사람으로, 좀더 선한 사람으로, 좀더 변화된 사람으로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입으로 하는 믿음이요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하나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사랑의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는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왜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까를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어릴 때부터의 환경과 주위 때문인 것 같아요. 어린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애정과 포옹과 미소와 격려를 받고 자라게 되면 그 어린 아이는 언제나 "나는 사랑스런 준재이구나"하고 자기를 인식 합니다. 그는 자기 이외의 어느 누구도 될 필요가 없는 자신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자연히 안정감을 가지고 자라나게 되며 자라서는 타인과 터놓고 지내게 되고 허물없이 서로를 용납하며 이해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자라지 못하고 꾸중과 잔소리와 짜증과 욕설속에서 자랍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머니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전부 나 때문에 생기가 것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속에 불안이 생기게
되고 초조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더 크면 부모들은 사랑에 조건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너를 좋아한다" "밥 많이 먹으면 너를 좋아한다방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너를 사랑한다네 형처럼 공부 잘하면 너를 사랑한다시험 잘치면 너를 사랑한다"등등으로 조건을 붙이게 되니 어릴 때부터 이 아이들은 '아하! 사랑에도 입학금이 있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나에 대한 가치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구나. 나의 모든 것은 누구누구가 기대하는 그 기대에 부응할 때 내게 어떤 가치가 있구나"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에 필요한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사랑 받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자기를 오하게 됩니다. 사랑의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한 자기를 증오하기 시작하며 미워합니다. 뿐만아니라, 남을 사랑할 때에도 언제나 입학금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가 살아온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맏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동산의 모든 것을 다 먹고 마음대로 하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태어나서 오늘까지 선악과만 따먹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의 영이 죽고, 사랑에 실패한 죽은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좋아 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동일시 합니다. 그러나 서로 틀리는 말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특정한 관계를 말합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좋아한다'는 차원에서 살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특정한 관계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 하시기를, 특별한 관계속에서 특별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우리보다 더 잘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은 깡패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에 대한 특정한 관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할만한 사람이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 하다가도 좋아하는 특별한 관계가 끊어지면 그것이 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 넘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어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약한 성격이나 우리와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으나 그를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사람을 좋아하려고 하는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삭게오나 세리나 문둥병자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은 좋아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들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데, 그것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주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방법은 꼭 한가지가 있는데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장 잘보여주신 것이 누가복음 15장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목자에 비교했습니다. 이 목자는 100마리의 양을 치고 있었는 데 99마리는 목자의 말을 잘듣고 울 안에 들어와 있는데 한 마리의 양은 목자위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다니다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찾기까지 찾아 다닙니다. 이 목자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99마리의 양들은 목자를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찾는 것을 보고 "아하! 우리 목자는 우리를 사랑하는 목자이구나"하고 목자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은전 10개를 가지고 있던 한 과부가 은전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하여 온 방을 뒤지며 빗자루로 쓸고 하여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찾으면서 기뻐하는 그 과부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과 종들이 다 집에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집을 떠나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 오기까지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심이나 오만으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곧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미워하고 정죄하는 그 한 사람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고 사랑하면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참 가난한 그 한 사람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가진것을 서로 나누며 깊은 친교를 맺으면 하늘아래 모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버려진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하나라도 옳게 하면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다 사랑하려고 하다 보니까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삭게오를 사랑하신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왔었는데 키가 작은 삭게오가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헤치시고 삭게오가 있는 뽕나무 바로 밑에 가서 멈추어 서셨습니다. 그리고 삭게오를 쳐다 보셨습니다. 그 다음에 삭게오에게 "내려 오너라. 내가 오늘밤 너희집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삭게오와 함께 그의 집에 가셔서 삭게오의 한맺힌 이야기를 밤새도록 다 들으셨습니다.

첫째 사랑은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시계로 잰다고 합니다. 둘째 사랑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셋째 사랑은 들어주는 것입니다. 되지도 않는 이야기라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들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남편이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 갇혀있던 아내나 아이들이 남편과 또는 아버지와 이야기 좀 하려고 가까이 오면 "저리 가라"고 하며 귀찮아합니다. "저리 가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아빠, 아빠"하며 뭐라고 하면 "듣기 싫다"고 합니다. 이 "듣기 싫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듣기 싫다보기 싫다저리 가라"는 소리를 우리가 흔히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사
랑이 매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참 사랑은 함께 머물러서 물끄러미 봐 주고 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토끼와 같아서 귀가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들어주는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의 이야기도 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머물러 있어야 풍성한 삶을 삽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이 세상 곳곳에 선이 창조되어집니다. 선을 창조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와도 함께 머물러 계셨습니다. 38년된 병자와도, 소경과도, 죄많은 여인에게도, 삭게오에게도 함께 머물러 계시며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증거되고 그들의 마음속에 선이 창조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자신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삶을 살아 드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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