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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으로드립시다 (고후 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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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를 전후로 해서 예루살렘을 비롯한 중근동 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행11:28).

그 중에서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 정도가 심해, 안디옥 교회가 주축이 되어 구제헌금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이때 비교적 재해를 덜 받거나 혹은 아무런 재 해를 입지 않은 지역에 있는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 마음을 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제 그와 관계가 회복된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제헌금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성도들이 보여준 실제 사례를 언급함 으로써 고린도교인들도 기쁨으로 이 일에 동참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게도냐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여기서는 특히 그리이스의 북쪽 곧 지금의 발칸반도에 위치해 있는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 교회를 일컫습니다.이들 교회는 모두 바울의 헌신적인 선교 사역을 통해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오늘 이들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드린 구제연보속에 담긴 뜻을 살핌 으로서, 물질생활과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 겠습니다.

 1.먼저 그들은 믿음으로 드렸습니다(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 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가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풍성하게 드렸습니다.당시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안 밖으로 참 어려웠습니다.외적으로는 로마의 압제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착취를 당 해(금광,은광,선박용 나무를 베는 권리 등 모든 것을 빼앗겼다.) 곤궁이 극심했다 고 합니다.그리고 내적으로는 유대주의자들의 핍바과 직접적인 공격과 이교도에 대 한 차별로 많은 어려움을 격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당한 이 영육간의 어려움을 "극한 가난"(2)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밑바닥까지 텅비어 있는 절대빈곤의 상태를 말합니다.이런 상항에서 그들 이 없는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놀랍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있다고 드리고 없다고 못드리고,부자라고 드리고 가난한 자라고 하여 드리지 못 한다는 원리는 맞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자가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돋자 이삭을 드 린 것이나(창22장),과부가 두렙돈의 돈을 주게 바친 일(막12:41-44) 모두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없다면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을 뿐입니다.하나나님이 살아계시 고 천국이 있으며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 말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는 말의 진실한 뜻이 바로여기 에 있습니다.

 2.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고 드렸습니다.(5).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5)

이렇듯 마게도냐 교인들이 자원하여 구제에 참여하자 사도바울은 더욱 놀랐습니 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그들로부터 단순히 물질적인 보조이외에 별다른 것을 기 대하지는 않았습니다.그런데 정작 그들은 연보조차도 능력 이상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주임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들의 수수한 믿음까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위들은 바울이 생각한것 과는 달리 훨씬 더 성숙한 신앙적 행위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드린 헌금은 인간적인 어떤 계획이나,혹은 동정적인 행위나 인간적인 사 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에서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 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한 가지의 이유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바로 그 물질을 드리는 우리 자신,즉우 리의 중심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물질보다도, 우리 자신을 더욱 원하고 계 시다는 사실입니다.사실 물질은 하나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십니가.만물의

다 그의 것이며 그가 지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도가 재물에 집착하는 것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드리는 헌 물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물질과 함께 드려지는 우리들의 마음과 중심을 기 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헌금속에 헌신의 의미 포함) 그렇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으로 드리거나, 억지로 드리는 헌물은 그 마음이 열 납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구약 말라기서(3:10)에 보면 십일조의 축복을 말씀 구첩용 한가지 조건을 제시하 셨는데 곧 "온전한 십일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구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 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서 관건이 되는 "온전한"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확 숫자적 의미의 10/1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아무리 자로 잰듯이 정확하게 드렸더라도, 그 예물 속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우리의 중심,정성,즉 우리자신을 드리는 헌신적인 신앙고백이 빠져 있다면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과부의 두렙 돈을 주께서 더 많이 드렸다고 평가하신 것도 역시 이런 먁략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넣은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풍족한 중에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막12:43하-44) ) 그러므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는 물질은 반드시 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 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에물을 드릴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3.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9).

 앞에서 구제 헌금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마게도냐 교인들을 모범으로 소개했던 바울은, 이제 좀더 근본적이며 차원높은 연보의 동기를 제시하 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이 물질을 기쁨으로,인색함없이,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드 릴 수 있었던 보다 중요하며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이것은

1.2 의 자 세로 물질을 드릴 수 있는 근본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자들이었습니 다.('알다':체험하다의 의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 와..."(9)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물질을 아까운 마음없이,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바로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늘의 모든 부요와 영광을 버리고 육신을 입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셔서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빌2:6-8).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이 은혜를 체험한 자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받은 은혜없이는,은혜를 알지 못하고는, 단돈 천원도 하나님 앞 에 진심으로 드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그래서 바울은 '연보'와 ' 은혜'라는 말을 겸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정말 감사한 것 뿐입니다.그래서 부족하나마 이런 우리 의 신앙고백적 마음 담아,주 사랑하는 마음 담아 적더라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없어도 어려워도,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얼마를 드렸느냐 것은 그리 크게 문제가 되 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도대체 어떤자세로 드렸는냐 하는 것입니다.잘못하며 광 고비가 될 수 있고,잘하면 천국 보고에 쌓일 수도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그리고 헌신하는 마음으로,그리고 받은 바 은혜 안에서 기쁨으로 드려 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에물을 드리는 것(십일조,감사든,구제헌금...)은 하나님을 섬 기며 산다는 것과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신앙의 표현이자 발로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나는 돈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라는 우리 신앙의 절대적 표현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마게도냐 교회의 가난한 지체를 돌아보는 실천 적인 사랑과 베품의 모습입니다.

이 은혜에 풍성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소원(7)은 바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 원이며,오늘 대부분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외침이요 탄식이기도 한 것입 니다.구제는 남은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9절 말씀을 통해 볼 때 주님은 부 요하신 자로서 우리위해 우리 부요함을 위해 친히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 모두를 즉 주의 지체 전체를 편균케 하려는 하나님의 의 도 때문입니다.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츙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 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14) (야고보서에 참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했으며,마25:31-46 의 양과 염소 비유,크로스웨이 적 삶 모두가 이것 나타낸다.)

헌금도 구제도,부자나 넘치는 자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참 부자의 절대적 척 도 없다.부자라고 생각하면 부자 언만금을 가지고도 가난하다 느끼며 나누지 못하 는 정신적 빈곤자가 더 문제이다.) 먼저 은혜 아래서 그 사랑을 께닫고,먼저 자 신을 하나님께 드린 자가 드릴 수 있으며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빌립보 교회에 약속하신 축복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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