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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의 본질 (요 11: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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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여러가지 의심이나 불만 중의 하나가 기적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이 기적이 도대체 어떤 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일어나는가 하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많은 기적들을 보면서, 또한 복음서에 나타나는 수 많은 기적들을 보면서 왜 이 기적들이 나의 삶과 내 개인에게는 일어나지 않는가 내가 필요할 때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질문들이 생깁니다. 이것은 나중에 아주 심 각한 질문들로 확장됩니다. 즉, 하나님은 편견과 편애의 하나님이라는 불만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기적들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기적들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마가복 음의 끝부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 곧 예수를 믿 는 자는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죽지 않으며, 뱀을 손으로 집을 수 있으며, 병든 자 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서 뱀에게 물려도 끄떡 없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느냐고 물은면 모두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뱀에게 물려도 끄떡 없고, 무슨 독약을 마셔도 멀정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가 없어 지 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뱀에게 물렸는데 괜챦고, 쥐약을 마셨는데도 꺼떡 없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분명히 이 말씀이 기록되 었고, 또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마침 우리가 필 요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그런한 기적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 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신자들에게 물으면 다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말 기적이 필 요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기적을 허락하지 않는데도 다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바로 이 부분은 참으로 어려운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능히 고치실 수 있으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병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고칠 수 있습니다. 능히 우리 를 어떤 독성으로부터도 건지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적의 방향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요청할 때에 그런 약속된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지에 대 하여 깊은 혼돈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기 나사로 사건에서 보면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데서 살려냅니다. 일어나는 장면을 보십시오.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있으신 분이 수의 를 입은 상태로 나오게 합니다. 기왕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수의를 다 풀고 살아있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탁 서면 더 기적이 기적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폼나는 기적에 베로 동인 수의를 걸치고 뛰어나오는 것은 또 뭡니까 그것은 기적들이란 기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 게 설명하기 위하여 늘 이렇게 일반적인 것과 썩어서 기적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앞에는 홍 해가 가로놓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가장 멋있는 기적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 고 생각하시고 거기서 기적을 연출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홍해를 갈랐 다는 것은 기적 중에서도 상당히 차원이 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놓고 걸어서 건너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름을 불러 서 몽당 테워서 순식간에 힘들이지 않고 건너게 한다면 훨씬 수준이 높지 않겠습니 까 홍해를 갈라 놓고서, 걸어서 건너야 됩니다. 기적이 도입되지만 가야 할 길이 단축되거나 대신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그 기적 속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언제나 기적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동원할 때 기존 질서와 배치되는 것으로서 기적이 동원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고 거기에 우리 의 위로와 약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기적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적은 있 어야 하는 것에 대한 인내와 약속을 위하여 등장하는 것이지, 있는 기본 질서를 대 신하기 위하여 등장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는 주로 초월적인 것만을 신적인 것이라고 보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 연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신성시, 자 연에 대한 비신성시' 이 사상만큼 인간에게 본능적인 것은 없습니다. 이 본능은 결 국 초월로 귀의하기 위하여 자연을 배제하는 쪽으로 늘 갑니다. 즉 하나님께로 가 까이 가며 신에 가까와 지는 것이라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심을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론은 언제나 금욕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신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인간이면 누구나 자연발생적으로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 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도 금식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을 하는 뜻은 언제나 이런 신앙고백입니다. '이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라는 신앙 고백으로서 금식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마치 금욕을 통해 하나 님께 가까이 접근하겠다는 공식으로 금식을 한다면 금식이 다른 이방 종교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됩니다.'하는 것이 금식이지 금욕을 해서 초월의 세계에 발을 디뎌 놓았다는 식의 금식은 올바른 금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식을 얼마나 금욕 적이며 자학적인 차원으로 하여서 우리의 초월성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은사가 그렇습니다. 방언이 있고, 예언이 있고, 신유의 은사들이 있습니다. 그런 데 여기서 예를들어 신유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병들렸던 사람의 병을 고쳐주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 약도 안먹어도 되고 더 이상 식사도 안해도 되는 것 입니까 그렇지 않지를 않습니까 그러므로 은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인생을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과 내 편을 드셔서 역사하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심으로 그 다 음부터 우리로 하여금 인내케 하며, 담대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은사란 나를 대신 살아주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를 대신하여 살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신 앙이 조금 더 깊은 신앙의 자세로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게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 니다.

보통 우리가 기적을 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 눈 앞에 있는 어떤 문제를 풀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풀어 주 시옵소서! 이익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에 기적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지,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요청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보고서 가 장 크게 놀라고 새롭게 도전 받아야 할 중요한 문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 에 관한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즉, 기적은 우리의 어떤 문제를 풀기 위 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힘을 얻게 하고 인내케 하고 충성케 하 기 위해서 밖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이 죽을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하늘문이 열리고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경의 묘사에 의하면 항상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만은 서 계십 니다. 그래서 늘 이 렇게 설교되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순교당하는 것을 얼마나 크게 여기시는지 모릅니다.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던 것입니다.'라 고 말씀되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기억하셔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서 기적 을 행하고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돌을 던지자 그냥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왕에 돌에 맞아도 죽지 않는 기적이 일 어났더라면 금삼첨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기적이 우리가 의도하고 생각하 는데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된 것으로 말마암아 기적이 도입되어 서 무엇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들이 필요로 하는데 기적이 도입되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적 밖에 도입시켜 주시지 않습니니다. 즉 '내가 네 곤고함과 네 어려움을 보고 있다.

낙심하지 말아라. 견디도록하라. 당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대로 쉽 게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인생이 이 땅에서 움켜쥘 것도, 뺏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더 얻고 싶으신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뺏길 것이 있어 불안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요청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 리가 이 세상에서는 뺏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과 돈과 명예뿐입니다. 목숨까지 뺏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것 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엣 것인 영적인 것들 은 결코 세상이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우리의 신앙, 그 성령을 어떻게 빼앗아갑니까 뺏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적의 도입을 요구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이상한 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 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40절을 보십시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더냐" 기적은 언제나 믿음으로 다리를 놓아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기적을 도입 하고 우리 생애에 기적을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 권에 대한 바른 이해로 도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눅8:22-25절을 보십시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 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게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 워하고 기이히 여겨 가로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여 순종하는고 하더라" 성경이 기적을 도입해서 우리를 끌고 가고 싶은 자리는 '저가 뉘기에'라는 자리 입니다. '어떻게'가 아닙니다. 다시말해 기적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촛점이 있 는 것이지 기적 그 자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베드로와 요한 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 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하자 일어나 걸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도 기적의 도 입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졌습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의 권위와 도대체 그 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명하였는데 이 기적 이 나타났단 말인가 하는 데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을 한 번 정검해 보십시오. 내게 기적이 요청될 때에 거기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을 때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고래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신앙을 보십시오. 하늘에는 하늘신, 땅에는 지신, 나무에 는 목신, 강에는 용왕신이 있다고 하여서 어디든지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 서 어디서든지 정성만 드리기만 하면 무슨 신이든지 어떻게 감동을 안 하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온 말이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좋 은 것입니다. 조용한 곳에 스스로 신심이 우러 나오는 장소를 만들어서 새벽마다 정성을 드립니다. 자학적이고 금욕적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초월적 인 신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 초월적 신의 대 상이 누구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한 기적을 따내면 되는 겁니다. '내게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신다면 내가 무엇인들 못하오리이까'라는 식 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주시는 그 신적 대상과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의 목적과만 연결될 뿐입니다. 내가 얻고 싶은 목적을 이루어 주시는 신이라면 누구라 도 좋은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사고방식이 우리의 가장 큰 대적입니다. 그러므 기 기적을 위한 정성과 믿음이 어디로 연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은 성경이 우리 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입니다. 눅9:57-62절을 보시겠습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 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다른 사람에게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내가 주를 쫓 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 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제가 주를 쫓겠습니다.'하자 예수님이 '너가 나를 쫓 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나는 머리둘 곳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잠 잘 곳도 없는 사람이다. 넌 네가 결심한 데가 어디며 무엇을 향하고 있는 자리인지 알기나 하고서 그렇게 말하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들을 향하여 꾸짓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좇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니라!' 고 하십니다. 표적의 본래의 의미는 '내가 누구냐'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사 람들이 본 표적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서가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꾸짓고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바로 이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 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기록들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도 정검해 보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좇고 있습니까 그분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무엇을 배제시켜야 되는지를 아십니까 그를 믿는 문제는 오늘 본문에 있는 것같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 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계획을 위하여 하나님을 요청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 님의 계획과 약속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한 것들 을 자연인들은 가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더구나 신자인 우리들 조차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들을 다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고 놀라운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 재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외인이었고 죽었던 자리에서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며 또한 그 축 복이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약 속된 축복을 소유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쪽에다가 나의 운명을 걸겠 다고 약속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도박이 아닙니다. 확신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들이 얼마나 사실인가 하는 점은 아직 다 체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마치 구름을 잡는 것 같은 것입 니다. 그러나 그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 운명을 내 손에 잡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편이 더 이익이며 낫다는 것에 항복한 사 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렇게 항복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기적을 도입하고자 할 때에 여러분의 인생을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이 부수적 으로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정작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죄를 좋아하며 죄에 물들어 있으며 그 죄의 결과가 얼마 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고서 일차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죄 아래에서 떠나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복된 것임을 비교하 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큰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를 다만 편안 하고 바람 불지 않고 비 오지 않는 비닐하우스에나 가두어 놓는 것이 전 목적이 아 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가장 오해하게 만드는 부분 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연출 하시는 분이 바로 이 자연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일반법칙 속에서 살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요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빌어서 하나님의 법칙들을 깨어 달라고 하는 식의 요구가 너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 현재를 살게하신 하나님의 뜻과 삶의 의미를 더 깊게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현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욱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생은 편해지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나 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 조건적으로 환경적으로 이익 을 본 신자들은 어떤 이미에서는 아직도 신앙의 초보 단계입니다. 이익만이 기독교 의 전 내용이 아니며 핵심이 아닙니다. 일 부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제 어려운 날들이 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서 편하게 살것이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자기 것이 아니라서 괄시하는 것이니라'고 미리 말씀해 주고 있습니 다. 이같은 사실을 우리가 세상을 조금 살아가다가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럴때에 세상이 우리를 치고 괴롭히지만, 우리가 그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것 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나아가는 집단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주여, 세상이 나를 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여기서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시 우리를 세상 학교에 편입시 키는 방밥뿐입니다. 즉 비 신앙인이 되는 길밖에는 편해질 다른 길이 없다는 뜻입 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신앙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과는 원수가 될지언정 하나 님과는 원수가 될 수 없다고 결심한 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와 축 복만큼 세상과는 불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기적은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 잘한 것이라는 위로를 위하여 문득문득 기대치 않은 곳에서 등장할 것 입니다. '참 잘했지!'하는 위로를 줄 뿐이지 여러분을 대신 업어 주거나 대신 살아 주는 것으로써 기적이 도입되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것을 물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에 내 마음 깊은 곳 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가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 면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결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성 경이 제시한 바와 같이 자신의 목숨이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기독교의 진리됨과 영원한 생명을 지켜 왔습니다. 물론 지금이 목숨을 요구하는 그런 위기 상황은 아 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평화로운 시기가 육체적인 핍박이 있는 때보다 신앙을 지키 기가 더 어렵습니다. 대강 대상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함정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갔더니 교회가 왜 이래 목사들이 왜 저래 하면서 교회를 편하게 다닐 려고 투덜거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걸리는 것이 있고, 아픔이 있고, 속이 터질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는 곳이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주를 위해서 죽고 목숨을 걸 며 실천하며 살기로 자꾸만 마음 속에 결심하여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시게 되 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와 아픔들이 나를 통해서 걸러져 사랑과 화해와 용서 그리고 성숙이라는 열매를 맺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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