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 때문입니다. (사 53:4-6)

첨부 1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예언으로 유명합니다.
메시아가 장차 구원자로 오실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것과 그 메시아는 모양도 풍채도 아름다움도 없기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게 될 것이라는 것이 1-3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4-6절은,메시아의 고난은 자신의 죄책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야 할 질고와 슬픔과 징벌 때문이며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7-9절은 그러한 고통과 징벌을 대신 받으시면서도 침묵하시는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고,10-12절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으로 속죄와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 시간 4-6절을 통하여 주인이 겪으신 온갖 고통과 수모와 죽으심이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은 이유는 2절이 밝히고 있는 외적 조건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연한 순과 같으셨습니다.바람에 꺾이고 발에 짓밟히면 으깨지는 연한 순과도 같이 나약하고 애처로운 존재이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연한 순은 마른 땅을 뚫고 솟아 오른 싹이었고 줄기였습니다.
모든 나무는 처음엔 연한 순이나 줄기로 시작하여 자랍니다.
바위는 땅을 뚫고 자라지 못하지만 연한 순은 땅을 뚫고 자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기 때문에 흠모하고 사모할 만한 아름다움 존재가 아니셨습니다.
J.위튼은 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이성에 치우쳐 교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며,둘째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고,셋째는 죄의 포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본래 기독교는 출발 당시 지금처럼 세계적인 위세를 떨치는 거대한 집단도 아니었고 도처에 세워진 대형 교회당도 없었습니다.
이 집 저 집 골방을 전전하며 소수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고 성만찬을 행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 동굴로 숨어 들었던 때도 있었고 맹수에게 찢기고 불에 타 죽고 칼과 톱에 죽어야 했던 경우도 비일 비재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출발은 풍채도 없었고 매력도 없었고 그리고 출세의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동네에서 자란 청년 예수가 예루살렘에 웅거하는 유대 기성 종교에 폭탄을 던지고 조야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처럼,그 예수가 시작한 기독교 역시 항상 연한 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나 기독교를 선택하는 이유가 화려하다든지 출세의 기회가 된다든지 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씨를 뿌려야 열매를 거둘 수 있고 고난 뒤에 영광이 있고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우리들의 오해입니다.
4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자신이 저지른 어떤 죄 때문에 받는 보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본문은 천명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중요한 관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질고와 슬픔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잘못과 죄 때문에 매를 맞고 멸시를 당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본문 4-6절에는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 차례나 거듭되고 있습니다.그것은 주님이 겪으신 고난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우린 이 시간 “우리 때문입니다”와 “나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을 주님에게 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왜곡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당하신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주님 자신의 죄나 과오로 돌려 버리는 것은 구원받지 못할 중죄가 되는 것입니다.
더글라스 파킨스의 글 가운데 마귀의 8복이라는 게 있습니다.다시 말하면 마귀가 복인 양 꼬여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여덟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가장 믿을 만한 일꾼이 될 것임이요,
둘째,목사의 흠이나 과오를 보고 트집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임이요,
셋째,자기 교회이면서도 나오라고 사정사정하여야만 교회에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것임이요,
넷째,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임이요,
다섯째,걸핏하면 비쭉거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교회 나오기를 곧 그만둘 것임이요,
여섯째,하나님의 일에 인색하여 헌금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일을 가장 잘 돕는 자일 것임이요,
일곱째,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기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임이요,
여덟째,성경 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꼬임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니라.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도 성립할 수 없고 올바른 삶도 정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메시아 고난의 의미입니다.
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가시관과 예리한 창에 찔리고 상처받고 매맞고 천대받고 멸시를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동부 보스턴 신경 정신과 의사 한 사람이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습니다.신경 정신과 치료라는 것은 약물 치료나 수술 치료이기 보다는 정신 치료이기 때문에 환자들과 상담을 하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사는 천성 자체가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편인 데다가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정신과 의사로서는 적임자였습니다.그래서인지 그 의사를 만나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이 치료되어 건강을 되찾았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 자신이었습니다.의사 생활 30년째가 되던 해 그 자신이 정신 신경병 환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발병 원인은 30년 동안 수를 셀 수 없는 환자들로부터 보고 들었던 사건과 이야기들이 그 의사의 정신 세계에 잠식했고 마치 먼지가 쌓이듯 스트레스로 쌓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3년 후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내 속에 쌓였던 모든 정신적 노폐물과 삶의 찌꺼기들을 예수님에게 말씀드렸다.그러자 내가 걸머메고 있던 짐이 가벼워지면서 나는 건강한 정상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사람은 사람의 질고나 고통을 대신지거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종합 병원 외과 과장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6시간이나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끝나면 제아무리 건강한 의사라도 정신과 육체의 피로 때문에 파김치가 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두려움과 피로로 연속되었던 수술 시간 동안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의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과장님은 장로님이신데 장로님도 수술 후엔 때로 술을 마십니까” 그 분의 대답은 “아닙니다.저는 수술이 끝나면 목욕을 하고 집에 들어가 큰소리로 찬송을 부릅니다.그것이 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창과 가시에 찔리신 까닭은 나의 허물 때문이며 주님이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를 받으신 것은 내가 저지른 죄악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나는 평화를 찾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3.주님의 대속입니다.
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린 6절에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우린 철없는 양처럼 그릇 행하였고 제멋대로 살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멋대로 죄짓고 멋대로 놀고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 인사 12명에게 발신인의 주소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은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빨리 도망가라.”
그리고 그 다음날 전보를 보낸 열 두 사람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열 두 사람 모두 집을 떠나 어디론가 도망쳤더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너나를 가릴 것 없이 그릇 행하고 있고 그릇 살고 있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죄의 결과도 결국은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는,우리 무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담당시키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대속의 절정입니다.
4절에서는 질고를 져 주시고 슬픔을 당해 주셨다고 했고,5절에서는 징계를 대신 받아 주셨다고 했으며,6절에서는 죄악도 대신 담당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내가 져야 할 모든 나쁜 것들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다시 말하면 “나 때문이었습니다.”
우린 오늘 주님이 허락하신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성찬상 앞에서 우리가 드릴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나 때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고난도,굴욕도,멸시도,천대도,십자가도,죽음도,모두 다 나 때문에 겪으셨습니다.
주여,나 때문입니다.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