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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에게 좋은 것을 줌 (마 0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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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거룩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돼지가 진주를 싫어하듯 사람은 판단받기를 원치 않으며 좋은 것을 선물로 받기를 원한다. 이것이 생명의 성질이다. 어린아이들은 칭찬받고 도움받기를 좋아하고 꾸짖고 버림받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이 생명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우리 생명이 원하는 것을 받고 싶어하는 것처럼 남에게도 그렇게 행하라는 것이다. 내 생명이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준다면 그의 생명도 좋아할 것이다.
사람은 칭찬받기를 원하고, 개는 더러운 것을 좋아하고 돼지는 먹을 것을 원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성령(좋은 것) 주기를 원하신다. 그 생명마다 각기 원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내 생명이 원하는 것은 남의 생명도 원하는 것이다. 칭찬받기 원하는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며 속된 것을 원하는 자에게 거룩한 것을 줘도 안되고 탐욕을 원하는 자에게 연단의 진주를 줘도 안될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고 두드리고 찾을 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시기 때문에 좋은 것(거룩한 영, 즉 하나님의 영)을 주시는 것이다. 남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 때 우리는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내가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받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감사함으로 받았던 그것을 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남이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고, 판단받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한다. 이것은 마치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에게는 거룩한 것이 필요하지 않으며 돼지에게는 진주가 필요치 않다. 그와 같은 판단받아야 될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판단이 필요치 않다. 개는 속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줘야 하고 돼지는 먹을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가지고 놀 것을 줘야 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개는 속된 것이 필요하고 돼지는 먹을 것이 필요하듯이 이 잘못된 사람에게는 판단 대신에 칭찬과 도움이 필요하다. 내 자신이 그의 입장에 처하면 바로 이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렇게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같이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를 좋아한다. 우리가 어떻게 구하든지 아버지는 좋은 것을 주신다. 내가 혹시 뱀을 달라 하더라도 아버지는 생선을 주신다. 현명한 주인은 개가 거룩한 것을 달라 하더라도 속된 것을 줄 것이고 돼지가 진주를 달라 하더라도 먹을 것을 줄 것이다. 하물며 판단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판단하댜. 혹시 누가 "나를 좀 판단해 달라"고 하더라도 당신을 그를 칭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나를 만날때마다 자기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해 달라고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분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그 분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줄 알지만 내가 그것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를 훈계하고 판단할 자가 아니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의 좋은 점을 늘 격려했을 뿐이다.
지식을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다. 판단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일 뿐이다. 일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의 판단을 받는다. 그러나 생명은 판단할 수 없다. 생명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아버지는 생명을 내시는 분이다. 주시고 내시고 기르시는 분이다. 그에게는 판단이 없다. 오직 낳고 기르는 것 뿐이다. 그는 생명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신다.
셍명나무에는 판단이 없다. 오직 먹고 마시고 자라고 열매 맺는 것 뿐이다. 그러나 지식나무에는 공급 대신에 판단이 있을 뿐이다. 부족한 자에게는 공급이 필요하다. 사람이 잘못된 근원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의 영을 주신다. 그는 부족에 대해 공급을 하시지 그 부족을 판단하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애기가 걷지 못하는 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젖을 공급한다. 우리는 모두 이 젖을 먹고 걷고 뛰게 된 것이다. 판단은 지식에서 나오고 공급은 생명에서 나온다. 판단이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괴롭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가 괴로운 것이다. 생명의 판단이라면 남의 눈에 있는 들보보다 자기 눈에 있는 티가 더 빨리 발견될 것이며 괴로울 것이다. 나는 몇 해 전에 길을 걷다가 갑자기 부는 바람 때문에 눈에 티가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얼마나 괴로왔던지 눈을 가린 채 병원을 찾아가서 티를 빼고 나온 경험이 있다. 그 때 일이 생생하다. 내 눈의 작은 티가 얼마나 큰 들보가 박힌 것처럼 괴로왔던지!
아버지는 생명을 따르기 때문에 공급하신다. 우리는 이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와 같이 남도 나에게 바라는 것이 메마른 판단이 아닌 풍성한 공급이다. 나는 남을 판단할 때 괴롭고 공급할 때 기쁘다. 나는 나의 형제들을 영원히 공급하고 싶다.

(6) 생명 안에서 행함 (마7:13-37)

지난 몇 차례에 걸쳐 '천국 백성의 본성과 원칙과 행위'에 대하여 말한 바 있다. 그 나라의 백성의 본성은 가난하며 목표와 원칙(율법)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어떠함이며, 그의 행위는 그 아버지의 어떠함을 공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낳아 주신바 된대로 가난한 영으로 사는 사람은 아버지의 어떠함을 받은 자이고 이 사람은 아버지께로 받는대로 남에게 공급하는 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지식의 문제가 아닌 생명의 문제이고 생명의 소산의 문제인 것이다.
나무는 그 나무의 어떠함에 따라 열매를 맺기 때문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것이 진실이다. 포도는 진실이고 엉겅퀴는 거짓이라고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포도나무의 포도는 진실이지만 엉겅퀴의 포도나무는 포도의 거짓인 것이다. 포도라고 해서 무조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포도나무에 열린 포도만이 진실이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포도나무가 아닌 엉겅퀴에서 포도가 열릴 수 있느냐" 고. 그렇다. 자연계에서는 엉겅퀴에서 포도가 열릴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서만은 엉겅퀴에서 포도가 열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하신것이다.
세상이란 코스모스다. 이것은 꾸민 것이라는 뜻이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린 것은 세상이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 인류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 왔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은 꾸민 것이며 이것을 세상이라고 한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성을 쌓고 라멕의 아들들은 야생동물을 잡아다가 육축을 만들고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수금과 퉁소를 만들었고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 이것이 인간 문화의 모든 것이며 코스모스다. 그들은 결국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과 대를 쌓고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그러므로 넓은 문이란 코스모스를 말하고 좁은 문이란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지식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 엉겅퀴에 포도를 맺게 할 수 있는 것이 지식이다. 그러나 생명은 그 나무에 그 열매 밖에는 맺을 수 없다. 이것이 좁은 길이다. 지식의 위력은 금세기에 와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엄청나게 드러날 것이다. 지식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을 지도 모른다. 지식은 물질에서 생명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기계를 만들던 인류가 앞으로는 생명을 만들려고 연구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할지 그렇지 못할지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 지식의 길은 넓어졌다. 그러나 생명의 길은 여전히 좁은 길이다.
과학의 세계에서 지식의 가능성이 이렇게 넓어져가고 있는 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의 급격한 발전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이고 종교적이며 정신적인 세계도 사람이 창조된 이후 선악과를 먹자마자 시작되어 하나님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대로 이루어져 거대한 발전을 한 것이다. 영적 지식과 기술은 사람들을 매혹케 하고 마력으로 사로잡는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난 것은 거짓이었다. 창세기 3장은 이 사실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첫째는 몸을 가렸고 둘째는 자기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했으며 셋째로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핑계하였고 넷째는 둘이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하였다. 가인은 아벨의 재물을 보고 분개하였으며 아우를 죽이고도 자기 죄벌이 너무나 무겁다고 하였고, 라멕은 자기는 그의 아비보다 칠배나 보복하겠다(창4:24)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기 쉬운 넓은 길이다. 이 길은 자유자재로 조작이 가능하고 때를 따라서 임기웅변할 수 있다. 결국은 꾸며 놓고 거기 경배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사랑하고 그것으로부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기뻐하기도 하게 되었다. 애굽을 나왔던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추고 노래하였으며 오늘날 많은 사람은 만들어 놓은 의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꾸며놓은 제도를 옹호하고 따르며 잘 정리된 교리를 맹신하고, 예수나 바울의 외모를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이것들이 모두 선악과로부터 시작된 모조품의 세계이며 손으로 만든 우상이며 임의로 변경할 수 있는 넓은 문이다.
그러나 천국백성 즉 예수의 나라의 백성은 영의 가난함, 선천적 가난함을 변경할 수 없으며 아버지의 어떠함을 비켜 태어날 수 없고 그로 말미암지 않은 어떤 것도 남에게 줄 수 없는 좁은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사과 값이 좋은 때라도 포도나무에서 사과를 딸 수 없는 것과 같이 좁은 길이고 배추 값이 폭락하여 수만평의 작물을 그대로 버린다 해도 그것을 무우로 바꿀 수 없는 좁은 길이다.
생명을 따라 살게 되었던 지난 이십년 동안 나는 많은 비웃음과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고난 후에 내 속에 없는 것을 만들어낼 수 없었고 생명 아닌 것을 말할 수 없었으며 아무리 효과가 있는 일이라도 생명으로 되지 않는 것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영원한 것을 위하는 일이라도 생명으로 되지 않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나는 교회 회복의 문제로 어떤 사람들과 교제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의 목표는 교회 회복이라고 하였다. 나도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라는 것을 알았으나 교회는 우리가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내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만한 교제가 이루지 못했었던 일이 있다. 그 후 그들은 우리를 보고 교회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교회가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고 맞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는 땅이 물 위에 드러나듯이 드러나고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과연 그러했다. 물이 드러나듯, 싹이 솟아나듯, 태양이 떠오르듯, 교회는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이 교회를 보고 있고 누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기성 교단이나 교파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겼고 예배의식이 없고 교회조직이 없으며 특별한 교리가 없기 때문에 이상한 것이며 위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계통에 속한다느니 어떤 파와 유사하다느니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달리 어떤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만들고 꾸미고 조직해 놓은 것들을 그냥 답습할 수도 없었고 남들이 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든가, 현실적이라든가, 효과적이라든가 하는 의견들을 따를 수도 없었다. 나는 그런 길이 꼭 옳으냐 그러냐 하는 문제에 매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 생명이 그것들을 어색해했으며 부자연스럽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극이 있는 옷을 입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듯이 무엇인가 자연스럽지 않는 것에는 민감하게 거부반응이 일어났고 꺼림칙했으며 서툴렀기 때문이다. 전에 나도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다. 수십년간 예배에 참가했고 십년간이나 예배를 인도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것이 당연했고 이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그외의 어떤 것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살아내고 그 생명을 표현할 뿐이다. 그 이후 나는 생명의 살아남 아닌 어떤 것도 부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도 말했고 선 자리에서도 말했으며 앉아 듣기도 하고 서서 듣기도 하는 우리의 주고 받는 삶이 나타났다. 서로가 자기를 조성하신 하나님, 자기 안에 조성된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 안에 함께 통제 받으며 그리스도를 함께 누리게 되었다.
이 길은 우리에게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길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매하고 모호하며 규율이 없고 목표도 없는 것같이 보여서 발딛기 어려운 좁은 길이었다. 그래가지고 교회가 되나 그렇게 해서는 발전이 없어! 그런 것이 교회냐 엄숙도 거룩도 없고 조직도 체계도 없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습은 어떤 규격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이질적이며 혼란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깊이 관찰한 사람은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조직이 없으면서도 영원히 흩어지지 않으며, 교리가 없으면서도 혼란이 없고, 제도가 없으면서도 질서가 있는,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무언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주제는 하나이고 개성이 다르면서도 한 성품 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십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어설프다 할지라도 그리고 모든 세상이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할지라도 오직 그 외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전에 알던 모든 것, 모든 방법을 배설물로 여겼으며 방법 없는 길을 걸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방법이 될 수 없었다. 누가 이런 방법을 택하겠는가. 사탄은 모든 방법을 택하여 하나님께 도전할 수 있었지만 오직 십자가 앞에 와서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방법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계교를 능히 파괴하는 강력이며 닫힌 문이다.
내가 내 생명을 두고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방법을 버리자는 것이다. 이 방법 때문에 최초의 살인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길은 하나 뿐이다. 좁은 길, 그것은 생명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피하면 곧 방법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방법의 차이대로 분열하고 싸우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자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분열고 싸움도 할 수가 없다. 방법을 따르는 것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라 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니까 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내게서 떠나라' 하셨다.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거짓 선지자는 누구이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누구인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해서 좋은 열매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그 열매가 어디에서 열렸는가를 보아야 한다. 따다 붙인 열매인가. 아니면 그 나무에서 열린 것인가를 보아야 한다. 그 나무에 열린 것이 사실이라면 좋은 열매 맺는 것은 좋은 나무일 것이며 나쁜 열매 맺는 것은 나쁜 나무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의 가장 복잡한 문제는 만들어진 열매 때문에 생긴다. 그 열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생명에서 나왔는지, 이것이 거짓인지 불법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열매라도 그 사람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은 경계하라는 것이다. 생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꾸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아버지이지 공장장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그의 앞에서는 거짓이며 불법인 것이다. 거짓과 불법이라는 말을 도덕적이고 법률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도덕이나 법률 이전에 생명의 아버지이시다. 내가 아들을 낳을 때 그 아들이 천하에 둘도 없는 미남이라 하더라도 내 생명과 같지 않다면 그 아들은 거짓이며 불법일 것이다. 검은 사람은 검은 아들을 낳고 흰 사람은 흰 아들을 낳는 것 외의 그 어떤 것도 거짓이며 불법인 것이다. 고양이가 표범을 낳았다 해서 위대하다고 여겨서는 안되며, 표범이 고양이를 낳았다 해서 비참하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이것들은 모두 거짓이며 불법인 것이다. 하나님은 위대하냐 비참하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냐 거짓이냐,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보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양의 가죽을 보지 않으시고 그 몸을 보시며, 주여, 주여 하는 것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보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며 권능을 행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보시는 것이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을 보라. 그것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무너지지 않을 이치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모래 위에 세운 집을 보라. 그것이 무너지는 것이 우연인가, 필연인가. 아무리 양의 가죽을 입었더라도 속이 이리라면 이리의 근성이 드러날 것이며 주여, 주여 할지라도 아버지의 생명이 없으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수 없고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많은 권능을 행해도 그 자신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거짓이며 불법이다. 이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포도나무에서는 포도가 열리고 엉겅퀴에는 엉겅퀴가 열린다. 지금 안열린다 해도 결국은 열린다. 올해에 무슨 사정으로 열매가 없었다 해도 내년에는 열린다. 이것이 생명이다. 그러나 이 길은 지극히 좁은 길이다. 포도나무에는 꼭 포도나무 밖에 열릴 수 없고 아무때나 포도가 필요하다 해서 그것이 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가 필요해도 어쩔 수 없이 포도를 거두어야 하고 지금 담장 먹고 싶다 해도 가을까지 기다려랴 한다. 이것이 좁은 길이다.
기술과 능력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천국은 즉 예수의 왕국은 기술과 능력으로 말미암은 꾸밈과 조작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자라남이고 흐름이며 번성이고 나타남이다. 씨를 뿌렸다면 나타남을 기다려봐야 하고 그 나타남을 보면 그 씨가 참인지 아닌지를 알 것이다. 이론과 논쟁이 필요치 않다.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이 아닌 것은 결국 무너지듯 이 생명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심판 받을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옛 하늘과 옛 땅이 없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을 것이며(계20:12)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이 불못에 들어갈 것이다(계20:12). 오직 그 나라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로 구성될 것이다.

(7)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침을 따름 (마7:28-29)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기관이란 그려지고 쓰여진, 즉 기록된 것을 따라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실재하신 이로부터 허락되어진 합당한 이치를 가르치시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었다. 서기관이란 명칭은 글자, 즉 그려진 것을 표시하는 'gramma'에서 나온 말이고 권세 있는 자란 실재하신 이로부터 허락되어졌다는 뜻인 'exesti'에서 나온 말이다. (EK:..로 부터, Eimi:나는 존재한다에서 유래됨)
서기관들은 글자를 따라 가르치고 있었고 예수님은 실재를 따라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실재를 보고 그 본 것을 문자로 기록하게 되면 자신은 글자만을 보고도 그 실재를 알 수 있지만 실재를 보지 않은 사람이 기록된 것을 보고 실재를 알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사과를 본 사람이 사과라고 써놓은 것을 보면 즉시 자신이 보았던 것이 살아나지만 사과를 전혀 본 일이 없었던 사람이 사과에 대해 기록된 것을 볼 때는 그 사과 자체를 알기 어려운 것이다. 성경은 실재를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실재를 보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그 기록을 보고 그대로 가르치면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권세 없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이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기록만 읽고 그것을 본 일도 경험한 일도 없는 사람이 그 기록을 그대로 가르친다든가, 주 예수를 믿고 자기와 자기집이 구원 받은 일이 없는 사람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가르친다면 이런 것이 서기관적 가르침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말을 하면 권세가 있는 가르침인 것이다.
주 예수님은 영이 가난함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권세가 있고, 생명에 이끌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은 사실은 그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보다 더욱 온전하신 분이있기 때문에 그 말씀은 그의 일면일 뿐이었다. 우리가 참으로 그를 온전하게 안다면 그는 그의 말보다 엄청나게 온전하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록된 것으로는 성경만큼 완전한 것이 없지만 그러나 성경이 그 분 자신보다 더 클 수는 없고 더 온전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기록된 문자를 보고 그것 이상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표면적인 사람이며 얼마나 가련한 사람인가! 애인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그 애인에 대한 기록만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가련하겠는가. 그보다 더 가련한 것은 그 사람이 사랑하고 있는 기록 안에 있는 사람이 실재로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같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허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서기관들은 소경과 다를 바 없다. 날마다 하나님을 가르치지만 한번도 하나님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고 날마다 예수를 가르치지만 예수를 만난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천국을 본 적 없는 사람이 천국을 가르치고 선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믿었으며 천국을 보지 못하고 천국을 믿고 있었다. 부르심을 받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나는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전했으며 천국을 모르고 천국을 선전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왜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가. 나는 예수를 전하고 천국을 선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며 그 길 밖에는 사람이 구원 얻을 길이 없다고 가르침을 받았고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나는 서기관들에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겼고 심지어는 예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지만 하나님을 믿었고 그를 보지 못했지만 그를 섬기고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되게 하셨던 것처럼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지상 명령이며 축복이라고 믿고 일하고 있었지만 그를 알고 그를 만날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권세 있는 분을 만남으로써 서기관의 가르침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세상에는 서기관도 있었고 권세 있는 자도 있었다. 나는 서기관의 가르침을 떠나 권세 있는 분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음을 주님께 감사한다.
문자적이며 전설적인 예수를 믿거나, 표면적인 그의 행위를 모방하려는 것은 오늘날의 서기관적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영적이며 실재적인 예수를 알고 믿으며 그의 생명을 받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권세 있는 자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나의 삶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아 나타남인가. 아니면 옛날의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행위를 답습하고 훈련하는 것인가 예수의 전기를 읽고 그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과 예수의 생명이 있어서 사는 것은 겉 보기에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떤 종교든지 역사가 있고 교훈이 있다. 그 역사와 교훈을 본받아 사는 생활은 어느 곳에도 있는 일이다. 역사 안에 지나갔던 성인들의 삶과 행위와 교훈들은 얼마나 훌륭하고 고상하며 선한 것들인가! 그것들을 바로 듣고 지킨다면 인류는 얼마나 올바른 길로 걸어가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흘륭한 교훈들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던가! 물론 역사를 바꾸기도 했고 훌륭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음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용수철을 눌러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용수철은 무거운 물건으로 눌러놓았을 때는 짜부라져 있지만 그 물건의 누름이 없어지자마자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 가고 만다. 그러므로 역사는 눌렸던 용수철같이 간신히 그 본성을 누르고 지탱해 왔던 것이다.
유대인이 배우고 보존했으며 또 가르치고 전파했던 율법은 아마도 이 인류사에서 가장 완전한 교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방법 만큼 완전한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 사회의 모든 방면은 율법의 힘으로 움직였고 모든 행위의 원동력 또한 율법이었던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율법 안에 있었고 출생에서 임종까지 그들은 율법이라는 공기 속에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앞에 섰던 율법의 전문가요 우등생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던가. 예수를 잔인한 형틀에 못박고 박수를 치고 있지 않았던가. 이것이 수천년동안 가장 완벽하게, 가장 좋은 교훈을 배우고 따르며 실천했던 사람들의 결과였던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리고 그 후 목회를 하면서까지도 유대인들은 천하에 유가 없는 악인들이라고 믿었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선한 자를 죽이고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했을까. 얼마나 악하면 이천년이 되어도 회개할 줄을 모를까.....
이런 나의 생각은 유대인들의 표면적 기록만을 보고 알았던 피상적 지식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참으로 선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깊이 연구해서가 아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유대인의 유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율법적인 사람들을 볼 때에 그들은 참으로 경건하고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속에 예수를 죽일 수 있는 성분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예수를 핍박하고 죽인 사람들이 불량배나 악당들이 아니고 최고 종교 지도자들과 가장 율법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표면적으로는 결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율법의 교육을 받고 그것을 실천하며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고 서기관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얼마나 완전하게 보이는가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표면을 지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의식적이고 문자적이며 교리적이고 교훈적이었지 생명에서 넘쳐 나오는 권위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신의 어떠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말씀은 표현된 그 분 자신 이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그들 자신이 아닌 기록된 것들이고 예수의 가르침은 그 분 자신으로 풀어놓으신 것이다. 풀어내어진 그 자신의 말씀은 그 분이 권세 있는 분이듯이 권세 있는 말씀이며 가르침이었다. 권세 있는 자는 권세 있는 말을 하고 권세 없는 자는 아무리 권세 있는 기록인 성경을 그대로 말한다해도 권세가 없다.
교회는 성경을 설명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권세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서기관들은 거룩한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예수는 무시당했고 버림받았으며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자기 생명에서 소화되어 재창조된 권세인가. 아니면 기록되고 그려진 그 힘을 가르치는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 예수 안에서는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육체 안에서 소화된 영양분으로 가르쳐진다면 그것은 권세 있는 가르침이 될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느냐, 예수를 가르치느냐, 성경을 전하느냐, 예수를 전하느냐, 성경을 주느냐, 예수를 주느냐 하는 문제도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아주 다른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이다(딤후3:16). 이 호흡은 흙에 부어 넣어져서 산혼이 되게 하였던 바로 그 호흡이다(창2:7). 이 호흡은 하나님 자신이며 그의 생명이다. 호흡이 있는 자는 산 자이고 이 호흡이 없는 자는 죽은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호흡을 불어넣는 것이 권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기록된 성경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기록하게 한 호흡을 불어넣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내 일이고 호흡을 불어넣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설교를 잘하고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나는 곤고했고 내 안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사명으로 받은 사람일 뿐이었고 그외의 어떤것도 아니었다. 물론 나는 이것이 거룩한 사명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힘과 정성과 마음을 다했고 이 일을 위해서 오로지 기도했던 것이다. 내 평생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런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나를 불러 이 일을 맡기셨음에 대하여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겉보기에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장사를 하던 사람이 신학을 공부하여 어느날 설교자가 되었고 전도자가 되었으며 성경교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었지 결코 다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코 직업적이었다거나 삯군이었다거나 형식주의자였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 때에 나를 알았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 있고 나의 성실과 진실에 대하여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보여지는 것은 그 때에 나는 일이 다를 뿐이었지 사람이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증거로서 내 속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웠으며 사람 앞에서는 나를 가려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 내 모습을 가려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거룩한 말씀만을 전하게 해주옵소서. 나를 보지 말게 하옵시고 하나님만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나의 전하는 이 말로 저 사람들이 감동, 감화를 받아서 주님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자기 일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리라고 믿었었다.
나는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고 있었고 그를 따라 역사하리라는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믿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전하기만 하면 내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그에 관계없이 성령이 역사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물론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역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발람의 당나귀처럼 입이 없는 하나님의 도구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사실이 나와 하나님을 분리시켰고 나는 이럴지라도 성경은 진리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나를 합리화시켰던 것이다. 사람의 언어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과 그 말씀들을 전파하고 가르친다는 사실은 얼마나 축복인가.
그러나 그 말씀과 내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권위는 땅에 거하지 못하고 영원히 저 높고, 손 닿을 수 없는 하늘에 거하지 않겠는가! 서기관들이 땅에서 그들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면 하늘의 하나님은 땅에 내려와 거하실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서기관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책이라는 형식 속에 보관하고 수호하는, 외관상으로는 거룩한 직분을 가진 자이지만 땅에 거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소원을 가로막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고 나도 못들어가는 본의 아닌 일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소원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으며 그의 나라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었지만 나의 소원과는 관계없이 딴 길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세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권세 있는 말씀은 나를 뒤집어 놓았다. 권세 있는 말씀은 권세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이 되고 육신이 된다. 권세 있는 말씀이라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손에 있는 한 그것은 그려진 것이요 의문이 되고 만다. 고린도 후서 3장에서 바울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후3:3) 하였고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라. 돌로 써서 새긴, 죽게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도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3:6-9) 하였다.
나는 의문의 직분이며 정죄의 직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렸었고 바울은 영의 직분이며 의의 직분 안에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차원 다른 사역이었으며 다른 사람이었던가!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리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며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형상으로 화하여 영과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6-18) 하는 세계 안으로 나를 인도해 주셨음을 감사한다.
나는 권세 있는 사람을 보았고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사람을 보았다. 이런 사람이 단지 예수님 뿐일 것이라고 여겼던 나의 고정된 관념을 깨고 내 앞에 선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는 나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고 다시 지었으며 정금의 바닥 위에 새로운 집을 짓도록 해주었다. 권세 있는 자의 말은 권세 있고 권세 없는 자의 말은 같은 말이라도 권세가 없다. 호흡이 있는 자는 호흡을 주고 생명이 있는 자는 생명을 준다. 권세 있는 자는 또한 권세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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