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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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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한 이후에도 계속 장막을 옮기며 순례길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이제 그는 백세를 넘은 고령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이삭이 있어 노령의 황혼기에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최근까지도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가슴 아픈 시련을 겪었습니다.

순례길에는 휴가도 은퇴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에게 더 받아야 할 시험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1절> 그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번 나타나셔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는 "그 일 후"<1절>였습니다. 여기서 '그 일' 은 '그 일들' 이라고 옮겨야 더 정확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거쳐 온 모든 시험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21장에서 이스마엘을 쫓아낸 사건과 브엘세바에서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사건들이 일차적인 문맥입니다.

이스마엘의 추방은 사실상 아브라함이 육신을 따라 자의로 선택하고 결정했던 옛 사람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갈 4:29>를 단절시키고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께 장래를 온전히 의탁하고 신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했을 때의 '내가' 는 육신의 이스마엘이 없어진 자아였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최고봉을 향하여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삭이 번제할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고 했을 때에도 "내가 여기 있노라"<7절>고 즉시 대답하였습니다. 이삭이 어떤 뼈져린 질문을 던지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굽히지 않고 시행하겠다는 결의가 서린 말이었습니다. 그는 또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던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11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헌신은 시종여일하게 즉각적인 순종으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아브라함을 모리아산으로 하나님이 부른 것은 준비된 순종의 꽃봉우리들이 믿음의 정상에서 활짝 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이것이 육신의 이스마엘을 내쫓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인 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은 자기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생명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 앞에 나열된 수식어들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삼중 사중으로 이삭의 소중함을 강조한 이 말씀 하나만이라도 아브라함의 가슴 속에는 이미 비수의 칼날이 깊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삭은 백세에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인생 최대의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였습니다. 더구나 이스마엘이 없기 때문에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위로며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감정과 논리로는 이같은 요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낳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 을 인신제물로 태워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번제로 제사를 올리는 것은 고사하고 독자가 장성하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어찌 이루어지겠습니까 다시 데려가실 자식이라면 25년간이나 기다리게 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같은 명령을 내리는 가혹한 하나님을 자신의 신관에 맞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자신이 과거에 자주 저질렀던 죄와 실책들에 대해 하나님이 보복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또 어떤 일도 불사하겠으니 제발 사랑하는 독자 이삭만은 데려가지 말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탄원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학에 빠질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자를 잃어본 사람이라면 그 고통의 순간들을 지날 때 가슴을 짓누르던 이같은 갈등들을 생생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마디의 불평도,질문도,탄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3절>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범상인의 믿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그의 비결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이 인간의 논리와 이해를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익힌 자였습니다.

그는 백 세된 노부와 구십세 된 노파 사이에서 어찌 자식이 생길 수 있겠느냐고 따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불가능한 상황을 개의치 않고 이삭을 낳게 한 사실을 체험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은 이삭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차원이 인간들의 차원과 다르다는 것을 대면 하는 증거였습니다. 이같은 확고한 체험에 기반된 신앙은 하나님의 또 다른 능력의 차원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좁은 논리와 제한된 사고의 영역에서 벗어나 계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들의 건전한 논리나 상식적인 판단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신학과 전통과 논리에 어긋나는 말씀들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스케일이 크고 무한히 위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티끌과 같은 '내가 하나님을 나의 작은 틀 속에 집어 넣고 그 말씀과 의도를 판단해가면서 시비 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재판관의 자리에 앉을 자는 우리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숙지한 자였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자였습니다.

백세가 넘도록 장수하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배운 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으로부터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해 주신 것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를 목격하였습니다. 또한 자식과 땅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시며 남이 이미 차지한 땅까지도 임의로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는 주권적인 절대자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욥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욥1:21>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시 찾아가실 때 원망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세째,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의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긴 순례길에서 스스로의 힘과 머리로 난경을 극복하려다가 정로에서 벗어나 헤메어 본 자였습니다.그때마다 그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조달책이 최선이라는 교훈을 절감하였습니다. 모든 인생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방안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의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친히 준비하시리라"<8절>는 믿음의 선언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네째, 아브라함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슴에 새겨놓고 사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는 자는 하나님이 극한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임을 또한 믿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증언처럼 이삭이 죽은 후 에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부활신앙에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5절>"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따라서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순종 만이 주 앞에서 행하는 완전한 걸음이라는 것을 알고 모리아산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자세를 다시 조명해 봅시다.

"일찌기 일어나-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3절>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이끌어 낼 때에도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21:14>준비하였습니다. 내게 한 가지 이상의 귀한 것들이 있을 때에는 최악의 경우 다소 가치가 덜한 것들은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을 때에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공통된 반응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쫓은 후에 어린 독자 이삭을 위로로 삼고 살아 왔습니다. 이제 그 이삭마저 잃게 되는 극렬한 풀무블의 시험 앞에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습니다. 지체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순종에는 마지못해 동의하는 피동적인 요소가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그가 장작을 메고 이삭과 함께 '지시하는 곳'으로 곧장 향했다는 것은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는 말씀을 실천에 옮긴 빛나는 모범입니다. 이런 뜻에서 순례자의 걸음은 죽음을 불사하는 결의로 단행되는 극적인 걸음입니다.

"죽으면 즉으리라"<에 4:16> 고 말하며 왕궁의 안뜰로 향했던 에스더의 비장한 각오처럼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갠 것은 곧 '이삭을 잃으면 잃으리이다' 라는 비장한 결의의 고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행은 예수님의 십자가 행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9:51>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단단히 작정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오정革십자가 만을 향해 걸었습니다. 아무것도 그의 이 굳은 결심을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불굴의 십자가 행을 언급한 눅9장의 마지막 부분은 모두 제자직에 대한 교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즉 예수님을 따르려면 '굳게 결심'하고 한 걸음으로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일찌기 일어나 땔감을 장만하고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향한 흔들리지 않는 이 굽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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