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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나를 좇으라 (마 0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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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은 奇蹟의 障입니다. 8:1-4은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 8:5-13은 중풍병에 걸린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사건, 8:14-17은 베드로의 장모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사건, 8:23-27은 풍랑을 잠재우신 사건, 8:28-33은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8장은 온통 기적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전에 말씀드린 것 같이.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기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인데, 이 기적의 障인 8障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의 길을 요구하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병자를 고친 것이나, 풍랑을 잠재운 것이나, 귀신을 내어 쫓은 것과 같이 기적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건이 기적의 記事들로 꽉 차 있는 이 마태복음 8障에 기록되었겠습니까 그것은 제자가 되는 일, 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 그 자체가 위대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本論:弟子의 길

1.弟子의 길이란

19節: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모여 있는 곳을 벗어나서, 다소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한 서기관이 나와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신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서기관입니다. 유대교의 율법 전문가인 것입니다. 그의 임무는 율법의 규칙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온통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든지, 성전을 모독한다든지, 문둥병자와 같은 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든지 하는 식으로 율법의 규칙들을 자주 어기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유대교에 대해 아주 위험스러운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서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적대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의 희랍어 원어는 [디다스칼레](διδασκαλε)입니다. 히브리어의 [랍비](Rabbi)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부른 호칭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놓고볼 때, 그는 예수님을 유대의 위대한 랍비처럼 권위 있는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그의 말은 ‘위대한 스승을 따라서 진리를 탐구하는 제자가 되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의 이러한 고백은 확실히 놀라운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대의 랍비는 학식과 경건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기관의 고백은 예수님의 학식과 경건을 배우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해 가운데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자의 길>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는 <제자의 길>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예수님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2.예수님이 걸어 가셨던 길

20節:20절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여기서 [여우]는 헤롯과 헤롯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는 로마 당국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세상 권력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분봉왕 헤롯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 권력자는 왕궁을 소유하고 있었고, 온갖 부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인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왕은 이 세상의 왕과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영광은 이 세상이 주는 영광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거처가 없는 불안한 삶, 세상적인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고난과 위험에 자신을 내 던지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값을 치르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9:21에서, <재물을 버리고 좇는 자만이 참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14:26에서, <자기 가족과 자기 자신까지 버리는 자만이 참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0:38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는 자만이 참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제자가 되는 길>은 1)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2) 자기의 가족과, 심지어 자아까지도 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3)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땅의 소유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결코 하늘의 소유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가족과 자기 자아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온 세상 사람이 한 가족이 되는 축복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사람은 결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의 길은 결코 편안하고 안이한 길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영광이 약속된 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고, 그와 함께 죽지 않으면 그 영광의 약속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지금 決斷하라!

21節:예수님이 이처럼 <제자의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임을 가르쳐 주셨을 때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또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 상당히 잘못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구절을 보면, 이 말을 한 사람은 지금 막 부친 상을 당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 큰 오해입니다. 유대인의 특징적인 관용 표현을 알지 못하면 바로 그러한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가령 누가 여행을 함께 가자고 청할 때에, 유대인들은 [내가 부친을 장사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부친이 위독하거나 이미 사망해서 장례식을 치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친을 봉양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뜻입니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까지는 자식된 도리를 다 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을 장사기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 몇 십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지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먼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부친을 봉양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우선되고 있는 것입니다.

4.산 者가 할 일을 하라⇒죽은 者의 일은 죽은 자에게!

22節:이처럼 결단을 지연하고 있는 제자를 향해서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이 구절은 가장 난해한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일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잘못된 해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열쇠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지내는 일은 죽은 자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사지내는 일은 죽은 자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말을 뒤집으면, <장사지내는 일은 산 자가 할 일이 못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장사지낸다>는 말이 <부친을 봉양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친을 봉양하는 일은 죽은 자가 할 일이지, 산 자가 할 일이 못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친을 공양하는 사람은 과연 죽은 사람입니까 부친을 공양하는 일이 그렇게 무가치한 일입니까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친을 공양하는 일이 죽은 자나 할 일>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죽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생명이 죽는다거나, 가치가 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서 결단을 뒤로 미루는 사람은 <꿈이 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결단을 뒤로 미루는 사람은 꿈이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제자가 되는 꿈이 죽어 버린 사람입니다. 영광된 면류관의 약속이 죽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모두가 다 신앙안에서 위대한 신앙의 꿈을 가지시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살아가셔서 약속된바를 다 받으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結論: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 되자

1.야곱의 경우⇒꿈이 살아있는 人生

야곱은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속임수를 써서,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러고도 무사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망쳤습니다. 너무 급히 도망쳐 나오느라고 그에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질 않았습니다. 그는 벧엘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서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돌로 베개를 삼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집에서 잘 때, 돌로 베개를 삼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집에서는 돌로 베개를 삼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은 돌로 베개를 삼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야곱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는 꿈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시는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가 꿈 꾼 그곳에 단을 쌓고, 그 꿈을 이루는 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2.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어떠한 고난에 처해 있습니까 어떠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까 척박한 현실 때문에 혹시 여러분은 꿈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을 향해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제자가 되기를 꿈꾸며, 결단하기를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여러분은 위대한 사명을 꿈꾸며, 제자의 길을 결단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위대한 사역에 귀히 쓰임받고, 그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참예하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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