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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동자처럼 (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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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원초적인 악과 모든 구조적인 악이 우리를 둘러 싸고 있습니다.

좌우 어디를 보아도 세상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설사 선한 것이라고 하여도 인간의 의도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죄의 와중에서 시인의 영혼은 괴롭습니다.(1절) 이 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아서 마치 위험을 당한 벼룩처럼 다윗이 쫓겨다닐 때 결백을 호소하는 시라고 일컬음을 받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별다른 잘못이 없는데,사람들로 부터 곡해당하고,비난받을 때가 있습니다.그런경우 복수심을 갖는다거나,이런 저런 변명을 한다거 나,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아 서 부끄러움이 없다면,크게 생각할 일이 못됩니다.

물론 괴롭고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걸 크게 생각하면 신앙의 위인이 못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고 배척을 받더라도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판단은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3-4) 내가 결백하다면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직함을 하나님 앞에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정직과 경건을 펼쳐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살며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경건을 펼쳐 보입니다.

(3절) 다윗이 우리 보다야 성결한 삶을 살았지만, 그 역시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가 감히 그같은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 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17:7하) 하나님의 기이한 인자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선택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15:6) 어리석고 작고,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신 중의 신이요,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이한 인자요,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이한 인자의 샘을 아는 자는 복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운 삶이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고 <주의 날개>그늘에서 보호해 주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8절) 눈동자는 실로 작은 기관입니다만 매우 잘 지켜 집니다.

눈꺼풀이 있고, 속눈썹이 있고 언제나 눈물로 적셔져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먼지가 들어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전신경이 집중 되어 있고, 언제나 적절하게 눈물이 흘러 잘 세척해 줍니다.

하나님이 작고 보잘것 없는 죄인인 우리들을 눈동자같이 지켜 주십니다.

광야를 헤매는 길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발견하시고,끌어 안으시고, 돌보아 주시며, 자신의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고 낙심하고,넘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의 인자하심을 알 때 사람의 오해도,비난도 불어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를 둘러싼 상황을 고발하지만,이 시편의 끝부분 에 가서는 매우 달라져서 정신적으로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금가지의 미움,복수심,불안,곤혹,뭘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 겠다던 초조감,그러한 마음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모든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최후에 선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평안이야말로 진정한 에너지입니다.

<나는 만족 하리이다> 이러한 마음은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손상을 입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인내와 깊은 기대를 갖고 장래를 보게 됩니다.

시인은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으로 기뻐하며, 부활의 날에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15절).

그러면 어떻게 해서 시인은 이같이 호소하던 마음으로 부터 이렇게 평정 가운데서 장래를 바라보고,평안과 신앙의 정신으로 변화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정직하게 호소하고,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얼굴을 볼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으로 부터 송사를 당합니까 억울합니까 낙심이 되십니까 하나님 앞에 호소 하십시요.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 하시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는 기이한 인자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만족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호소를 평안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의 남은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줄다리기,하도리 아끼라,최건호 편역,베드로서원 .new ──────────────────────────────-y1 시편 15편/주의 장막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각-y0 ────────────────────────────── 사람이 선을 행하고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주의 장막>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선을 행하고,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면,예수의 중보사역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율법 앞에서 노출되는 죄로 인하여 떨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설사 외형적으로는 선을 행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내면적으로는 죄의 너울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상은 저 영혼 깊은 곳으로 부터, 샘솟아 올라와 나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죄에 물들어 있는 영혼으로는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영혼은 오직 예수의 피로써만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됩니다.

시인은 <주의 장막에 거할 사람,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세상에 띄우고 있습니다.(1절) 그 질문에 대하여 시인은 스스로 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고,공의를 일삼고,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됨은 당연합니다(2절) 이웃과 형제를 모함하지 않고,상대방의 인격을 짓밟는 일을 말아야 하는 것도 성도의 도리입니다.(3절) 돈이 있다고 해서 고리대금업자 노릇을 하거나,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곤경으로 몰아넣는 일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육간에 망령되이 행하는 자를 따르지 않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실한 이들을 존경하며, 그 스스로도 서원한 것을 지키는 경건한 삶이 요구됩니다.(4절) 그러나 이러한 경건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은 예수의 중보사역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거룩하게 된 성도들의 삶의 지침일 뿐입니다.

.new ──────────────────────────────-y1 시편16편/하나님이 주신 기업-y0 ──────────────────────────────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에 대하여 불가항력적 입장에 있습 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피할길이 없는 인생은 그 자체가 감사할 뿐 입니다.(2절)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 안에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터전이고,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8절)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에 따라서 조금씩 복을 나누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곳간에 채워진 모든 것들은 이제 양자된 성도들의 것입 니다.

모두 꺼내어 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만 거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것의 모든 것 >되시는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 인생은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9절) 그러나 시인이 기뻐하는 것은 <소유>할 수 있다는데 있지 않습니 다.

죽음으로 부터 자유할 수 있고,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으므로, 시인의 영혼은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10,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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