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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니느웨에 대한 경고 (나 01:1-15)

첨부 1


나홈서는 엘고스 사람 나홈이 기록한 예언서입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나홈이 예언을 했을 법한 엘고스를 찾아내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나홈’이라는 말은 긍휼, 자비 혹은 위로 자로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요청되고 자비가 요청되고 위로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선지자의 이름이 주는 뜻을 깊이 새겨야 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예언에는 긍휼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500년 이상 강력한 통치권을 발휘한 서아시아를 지배했던 큰 성입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성을 거대하게 건축함으로서 인해서 그들의 죄는 교만한 죄었습니다.
바벨론은 세속의 도시의 상징으로 하나님께 대항한 죄목으로 지적되지만 니느웨성은 인간의 폭력, 자기의 근육,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또 정복한 정복의 상징으로 이웃에 대항하는, 형제를 괴롭히는 도시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하나님께 대항한 죄를 범했다면 니느웨는 하나님의 백성인 형제들을 괴롭히는 폭군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홈 서지자는 포로 되어 있는 유다를 위로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망을 안겨 줍니다.
유다가 비록 포로 되어 있으나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아 언제까지나 원수에게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구원하여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라는 것이 나홈에서의 메시지입니다.
요나서와의 차이점은 요나서는 하나님의 자비가 어떠함을 보여 주고 나홈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엄위를 보여줍니다.

1.니느웨 심판의 이유
1).투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는 투기하시며”(1:2상)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형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어떤 형상이든지 그것을 숭배하고 그곳에 예배하면 우상입니다.
우상은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자녀, 명예, 체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아는 사람은 지식을 우상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섬김에 대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하나님 아닌 것을 따라가므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따라가다가 돈 떨어지는 날 실망할 것입니다.
자녀를 너무 의지하다가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날이 올까 염려됩니다.
당신의 세력을 의지하다가 정권이 바뀌는 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명예에 우쭐대다가 신예들이 혜성과 같이 나타날 때에 비참함을 맛볼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보복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1:2중)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이유의 또 한 가지는 보복을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보복’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노켐’인데 2절에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 철학은 인과응보 사상을 주장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과응보 사상과는 무관한 것으로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내주며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보복을 하신다는 말씀은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행위를 말하며 인간의 보복 행위처럼 공의와 사랑을 결여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응답이 인간의 표현으로 보복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만대에 복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3,4대까지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 3,4대까지라는 말은 4대까지 계속 징벌을 받으며 씨가 없었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보복을 피할 길이 없습을 말했주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불의에 대해서 항상 전투적이며 의를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혼탁한 공기로 오염된 이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청량제 역활을 하도록 날마다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늘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사상으로 우리의 허물에 벌주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징계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고쳐 주시려는 사랑의 매인 것을 늘 기억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 밖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복을 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믿음 안에 있는가 믿음 밖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천대까지 복을 물려주는 길은 내가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인 줄도 알아야 합니다.

3).죄에 민감하신 하나님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중)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므로 죄인들에게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나 노하실 때에는 큰 권능으로 하시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사하지 않습니다.
회오리바람, 광풍, 티끌이 등장된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에 사람이 피할 길을 찾을 수 없어 혼돈 천지에 빠지게 될 것과 인생으로서 접촉할 수 없는 높은 구름도 발의 티끌같이 낮다는 것입니다.
달세계와 같은 고공에 전쟁 기지를 얻기 위해 우주 탐험을 강행하고 있는 현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이유는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아주 쎈스티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를 아는 것은 죄에 대한 반응에서 나타납니다.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나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서울에 공기 오염도가 위험 위치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자살을 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폐에 엄청난 것이 들어가 있으나 반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 공기가 깨끗한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김포 공항에서 서울로 오면 서울 시내가 안개가 낀 것같다고 느낍니다.
기침도 나옵니다.
기침은 공기가 탁하다는 싸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4).선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1:7상)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선하심 때문입니다.
자기가 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라도 죄를 범한 사람은 심판을 해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박해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해 줘야 되겠고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끝을 내줘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7절 말씀은 유명한 구절로서 이 구절을 잘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행할 당시 가장 위로를 받은 말씀으로 힘을 얻고 소망을 얻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백성을 심판하심으로 유다 백성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을 일곱 번이나 반복합니다.
7은 완전한 수입니다.
유대의 위로가 완전할 것을 나타냅니다.

2.심판의 방법1).물심판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1:8상)

‘범람한 물’ 은 파사와 메대와 아라비아와 바벨론 군대가 홍수처럼 밀려와 니느웨를 쓸어버리는 군대의 침략을 말합니다.
500 년 도읍지,그렇게 교만하고 자랑스러운 니느웨가 이 연합 군대의 침범으로 인하여 쓸려 버리고 말 것입니다.

2).불심판

“마른 지푸라기 같이 다 탈 것이어 늘”(1:10하)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을 단번에 끝을 내십니다.
2,3회 공격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마름 지푸라기같이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할 거입니다.

3).흑암심판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1:8하)

하나님은 대적 자들을 물로 쓸고 불로 태우고 그리고 흔적도 없이 처치하실 것입니다.
그 도시는 역사 위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니느웨성의 역사적 유물은 대형 박물관에 몇 조각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역사상에 암흑 속으로 밀려 들어간 것입니다.

4).멸족심판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입니다”(1:14중)

이름이 다시 전파되지 않는다는 말은 후계자가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이단의 특징입니다.
이단은 후계자가 없습니다. 있다 해도 3대를 못 갑니다.
그래서 이단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우쭐거리며 나오다가 다음 대를 잇지 못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박태선, 문선명도 얼마나 갈런지 모릅니다. 연속성이 없습니다.
‘비루함’은 무가치하다는 말씀입니다.
겸손치 못한 니느웨, 500 년 역사를 자랑했지만 하나님 앞에는 무가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무덤이나 예비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진멸당한 후에 다시는 동행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찬란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성도 하나님의 처치를 받으니 잔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니느웨성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폭군적인 자세가 바로 니느웨성입니다.
바벨탑이 무너질 날이 옵니다.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후손 대대로 믿는 자로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후계가 없으면 우리는 이단일 것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무가치한 생을 가꾸어 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이 되어서도 안되고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나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가는 유리할 별들이 되서는 안됩니다(유1:12-13).

3.복된 소식

“볼찌어다 아름다움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도다”(1:15상)

본절에 내용은 이사야의 말씀(사40:9)과 같습니다.
앗수르의 멸망 소식은 유다 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악인이 진멸되어 그들이 다시는 유다 가운데로 통행치 못하게 되었으니 더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앗수르의 압제를 벗어나 다시 하나님께 대한 종교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에 대한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위로가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대적하는 사람의 입을 봉하고 끝을 보게 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산성으로 삼고 그 품안에 피난한 자는 하나님의 위로의 은총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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