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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행 08: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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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두 사건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증권회사 차장의 방화 자살 사건'이고, 또 하나는 '조선족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을 방문한 한 한국인 사업가의 죽음'입니다. 고객의 집에 불을 지르고 고객과 함께 숨진 어느 증권회사 차장, 그는 외부에서 볼 때는 여러 차례 '약정고 1위'를 기록한 40대 초반의 유능한 중견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고객들의 손해를 갚아주기 위해서 싯가 3억원 상당의 집 두채를 다 팔고 경기도 변두리 무허가 비닐하우스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한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주가가 하루 아침에 폭락하면서 그의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객들이 맡긴 자금을 대신 맡아 주식투자를 해 주다 손해를 끼치게 되었고 그 손해를 보상하느라 있던 집도 다 처분했지만 그것도 부족해서 월급까지 차압당하고 아내가 파출부 일로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히 생활을 꾸려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늘 '죽고 싶다'고 말하던 그가 한 고객이 증권감독원에 투서를 하자 그는 그 고객의 집을 찾아가 함께 방화동반자살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건은 사업 논의를 위해서 중국에 미화 1만 달라를 가지고 간 한국인 사업가가 그곳에서 토막난 시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만은 돈을 목적삼은 범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을 여행하는 여행객이나 사업가들에 대한 안전문제가 고려되고 있습니다만은 개방 이후 중국이 닥치는 문제는 이렇게 국민들이 점점 황금만능의 병폐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달아 터진 이 두 사건을 접하면서 이 사건의 공통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 저들의 죽음을 야기시킨 것일까 두 사건 모두 '돈'이라고 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돈이 아니었다면, 돈이 없었더라면 저들은 그렇게 비참하고 참혹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채와 독촉이 없었더라면, 수중에 미화 1만달라를 지니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저들을 죽인 겁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암시가 있습니다. 돈이 사람을 살리는게 아니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사람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생긴 것입니다. 좀 더 인간답게 살고 풍요롭게 살고자 해서 만든 것이 화폐라는 것인데 이 돈이 도리어 죽고, 죽이고, 미워하고, 분내는 사회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돈으로 말미암은 악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일까요 그것은 돈이면 안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우리가 젖어 살기 때문입니다. 이름하여 황금만능, 물질만능의 시대입니다. 정말 돈이면 안되는게 없고 돈 아니면 되는게 없는 것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어느 두 탈옥수의 외침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절규가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구호가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얼마나 가졌느냐로 사람을 재는 시대가 되었고 돈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돈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더불어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먼저는 돈이 하나님과 견주어 비교되는 엄연한 현실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러나 그것에 결코 하나님만큼의 비중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쓰신 표현 중에 '어리석은 부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왠지 말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부자', 이러면 말이 될듯 싶은데 '어리석은 부자', 아무래도 의미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부자되는 것 보셨습니까 어리숙하다가는 쪽박 차기 꼭 알맞은 세상입니다. 약싹 빨라야 부자되는 세상이고 그래야 윤택하고 편안하게 한 세상 잘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라는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 말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편리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번 두 사건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돈이면 무엇이든 다 될 수 있고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정말 돈으로 안될 것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돈으로도 안되는 것이 있고, 일억만금이 있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적 사고를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이 사람은 오늘 우리들이 지닌 생각과 아주 흡사한 생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와서 사람들에게 안수해서 성령을 받게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이런 계산적인 머리를 굴립니다. '이 권능을 내가 얻으면 나도 사람들에게 안수해 주고 큰 돈벌이를 할 수 있겠구나...'
9절에 보면 그의 직업은 마술사였습니다. 애굽에서 배운 마술로 백성들을 놀라게 해서 낮은 자, 높은 자 할 것 없이 그를 다 청종하는 바였고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까지 일컫게 했던 자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카파필드'와 같은 대마술사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술은 속임수입니다. 눈가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악한 영의 도움을 입어 행하는 사술입니다. 9절의 저가 '사람을 놀라게 했다'는 것은 엑스타시스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상태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을 이렇게 놀라게 했던 시몬 스스로가 참으로 놀랄 일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그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보다 더 큰 능력 행하는 그 권능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제안합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본문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시몬은 자신이 그 영을 소유하려 한게 아니었습니다. 그 영과 자신이 하나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안수를 통해서 영을 받게 하는 그 능력을 사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몬의 잘못된 시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성령의 역사를 특별한 마술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을 마술과 동일시했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마술이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마술은 사람이 행하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이 행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성령의 체험을 사람의 기술 곧 마술로 이해하고서는 베드로에게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 능력을 내게 파시오..."이런 사람이 옛날에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신령한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성령체험은 마술이 아닙니다. 성령은 사람이 마음대로 주고 받는 물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사고 팔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시몬이 그것을 돈으로 사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호되고 날카롭게 저를 질책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선물을 화폐가치로 환산하는 것만큼 불쾌한 것은 없습니다. 선물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받는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주는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이 스승의 날인데 아침신문을 보니 어느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께 1원짜리 하나도 받지말라고 엄명을 내렸답니다. 이렇게 살벌할 수가 있습니까 오고 감이 그쳤다는 것은 삭막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선물 아닌 뇌물이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담은 물건은 선물이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은 물건은 뇌물입니다. 하나님의 베품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물을 화폐가치로 환산한다, 그건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그냥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선물, 곧 그냥 주는 것이라 해서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선물입니다.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주는 까닭은 그것이 값싼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값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값이 없어서 거저 주는게 아니라 너무 값진 것이기에, 도저히 돈이라고 하는 이 땅의 가치로는 환산불가한 것이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겁니다. 그 값어치를 평가절하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 가치를 그대로 전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려드는 시몬이 베드로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시몬에게 "네 은과 함께 네가 망할찌어다"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돈과 함께 지옥에나 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범죄한 교인을 출교시킬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시몬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는 세례도 받고 교회도 나왔으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교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이 시몬에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령의 능력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술적인 것으로 보았든 어쨌든 그는 성령의 권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들여서 그 권능을 베푸는 방법, 그 기술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이 시몬보다 더 못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성령의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그 권능을 체험조차 해보지 못한 그런 자신들은 아닙니까 물세례만 받고 성령의 세례는 체험하지 못한 그런 우리들은 아닌가 말입니다. 16절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 성령을 받질 못했다"고 했습니다. 13절에 보면 이 시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몰랐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고, 마음엔 악함이 여전했고, 악독과 불의가 가득한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자칭 큰 자'라 했다고 했습니다. 23절에 보면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악함이 있다' 했습니다. 21절에 보면 '마음이 바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세례받았어도 이럴 수가 있는 겁니다.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면 이런 겁니다. 거기엔 사랑도, 희락도, 화평도, 오래 참음도, 자비도, 양선도, 충성도, 온유도, 절제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것들만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의 행동에서 고무적인 것은 그가 성령을 어렴풋이나마 알았을때 그것을 얼마든지 투자해서 그 권능을 자기 것 삼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기야 잘못되었지만 그 자세야 가상하지 않습니까 그가 돈을 들고 사도를 찾아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권능을 가짐으로서 여지껏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삶이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랬기에 그는 자기가 가장 귀히 여기는 돈을 들고 사도들을 찾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시몬과 같은 자세나 방법으로 체험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여기질 않고 비인격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사려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하려 한 것이 아니라 수단화하려 했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노리는 목적이 다른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성령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겁니까 14절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내려 보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밭이 돌짝밭이나, 길가밭 같이 굳어있지 아니하고, 가시덤불밭 같이 헝클어있지 아니하고 깨뜨려지고 부드러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마음밭이 정돈되었을 때 성령강림의 역사가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시몬과 성령을 받은 다른 사마리아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말씀의 유무에 있지 않았습니까 시몬에게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표적도 보았고 능력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질 못하고 절반의 개종자일 수 밖에 없는 한계성을 드러냅니다. 그에게는 구원으로 이끄는 생생한 믿음과 순수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부재에서 오는 현상이었고 그것은 결국 성령을 낮선 것으로 여겨 여전히 성령의 신비를 파악하지 못한채 계속해서 마법적인 기교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게 했던 것입니다.
말씀없이 성령을 보았더니 그것은 얼마든지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성직 매매'라는 말입니다. 즉 거룩한 것을 돈으로 사고 파는 성직 매매를 라틴어로 '시모니아', 영어로 '시모니(simony)'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생겨난 단어입니다.
시몬에게 말씀이 없었을 때 그는 거룩한 것도 속되게 여기고 탐욕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질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동시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없는 성령은 성령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같이 다 저들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성령을 체험하는 현장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15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저들을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안수할 때에 저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 터 위에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내려주셨던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사모하는 것입니다. 갈급해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기도의 관을 통해서 성령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생활의 필수적인 도관입니다. 기도없이 영적 생활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수도시설 없이 수돗물을 받아 먹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습니다만은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하늘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늘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사과맛에 대해서 설명은 해 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먹어봐야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성령과 더불어 이루어 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럼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눅11:13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한구절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에는 그와 똑같은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똑같은 문장에 한 단어만 다릇습니다. 누가는 마태의 '가장 좋은 것'이라는 단어를 '성령'이라는 단어로 대체해 놓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성령이다, 그 말입니다. 누가에게 가장 좋은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돈이 아닙니다. 재물이 아닙니다. 일확천금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영입니다. 성령은 돈이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사랑이 그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희락이 그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화평이 그것입니다. 참평안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모든 것들은 돈으로 가능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 속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과 이것들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인생의 자산들임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그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것이 있다는 것을 잊게 만듭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그것은 진리입니다. 돈의 맛을 아는 부자가 쉬이 어리석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삶의 궁극적인 가치를 대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릇된 고정관념을 깨고 올바른 삶의 시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일주일 내내 성경 한구절 들여다 보지 않으면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루가 다가도록 영혼의 호흡인 기도의 교감이 없으면서 하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나 바쁘다고, 생업이 바쁘고, 직장생활이 바쁘고, 공부가 바쁘다고...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밤 내가 너를 부른다면 네가 장만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부패를 막지 못하면 부패한 사회가 교회를 부패케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신앙으로 세상살이를 해 나가고 있는 겁니까, 세속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겁니까...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가고있는 오늘 우리 시대가 귀담아 들어야할 메시지입니다. 성령에 인도하심 따라 살지 않는 자는 부패된 세상과 함께 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함께 썩지않는 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참신자가 되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부활 승천 후 여러 날을 간절히 기도했고 그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럴 때 저들은 능력있는 제자가 되어 세계를 변혁시키는 한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오늘은 신학교주일이기도 하고 청년주일이기도 합니다만은 신학생도, 청년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종이요 푸르른 청년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돈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우리는 겸손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돈으로 누릴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회개로 누릴 수 있습니다. 돈으로 날을 수 없는 하늘을 우리는 성령으로 날을 수 있습니다. 성령, 그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며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가장 복된 삶을 이루어가시는 성도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이는 세상에 익숙해져 있고 세상이 주입하는 것들에 취해 살던 저희들에게 하늘의 소리를 들려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가치가 혼돈된 이 시대 속에서 참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분별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정신없이 텅빈 주머니에 신경쓰다 텅빈 영혼을 발견하고 때늦은 후회에 사로잡히는 저희되지 말게 하옵시,고 말씀과 기도가 있는 영성생활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참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저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지혜로운듯 하지만 가장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게 하시고, 가장 어리석은듯 하지만 가장 지혜로운 삶을 선택하며 사는 저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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