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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법궤 (요 0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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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어떻게 정죄하지 않고 보낼 수 있었던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의 거룩하심을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사랑할 수 있고 죄를 처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구약의 법궤속에 들어 있었던 돌판과 만나와 싹난 지팡 이에 대하여 살펴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중에 싹난 지팡이에 관한 기록이 민수기 16-17장 에 걸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 비로소 법궤 속에다 세가지 물건을 간직해야 했던 이유와, 그것이 앉혀짐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아름답 게 해결되겠는가 하는 것도 아울러 이해될 것입니다.

 민16:1-3절을 먼저 찾아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 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여기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지어서 그들을 좇는 이백 오십 인의 족 장과 함께 모세와 아론을 거스렸던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는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 를 선택하셨는가 보자 하며 너희는 너희끼리 향호에 불을 담아가지고 하나님 앞으 로 나아오라고 합니다. 15절 이하를 보시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향로를 가지고 왔 다가 향로에서 나온 불이 오히려 그들을 소멸시킨 하나님의 저주를 보게 됩니다.

또한 고라와 그의 자손들과, 백 오십인의 족장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어떻게 무 너졌는가 하는 것이 나오고, 그 후에는 아직 남아 있는 다단과 아비람이 백성들이 떠난 이후에 지진이 일어나서 산 채로 땅속에 붇혀 버리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 다.

41절부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멸망한 후의 백성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 와의 백성을 죽였도다"하고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이 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서 그들에게 염병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백성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다 죽게 되겠으므로 각 지파에게 지파대로 지팡 이를 가져 오도록 명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느 지파 누구를 선택하셨는지를 알게 하 도록 행하십니다. 그래서 법궤 앞에 각 지파대로 이름을 쓴 지팡이를 두게 됐는데 다음날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혔고 나 머지 지팡이는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백 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17: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 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게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 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는 싹난 지팡이가 어떤 사건과 경위를 거쳐서 법궤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 사건에 나타나는 싹난 지팡이가 어찌 해서 앞에 있었던 사건의 답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라와 다단과 온이 모세를 거스렸던 사건이 무었이며, 거기에 대하여 백성들이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무었이 이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왜 싹난 지팡이로 답하셨어야 했는가 하는 것 을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사실들 입니다.

또한 왜 이것을 법궤 안에 넣고 법궤 위의 속죄소를 놓아서 속죄의 피를 그 위에 부어야만 했는가 하는 데까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16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을 세우고 이백 오십 인의 족장들을 자기네 편으로 이끌어 들여 거기서 무슨 싸움이 일어나는 지를 먼저 살펴보면,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명예를 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싸움이야말로 어떤 인간이든지 본능적인 죄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갖는 성격들인 것 입니다.

본래 인간들이 신을 섬기는 것은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서입니다. 그 예로 고대 문명을 보면 어떤 나라이든지 신을 등장시킬 때는 통치권 을 위한 부수적인 장식물로써 등장시킵니다.

중국의 왕의 이름은 천자(천자)입니다. 그 의미는 하늘의 아들이란 뜻인데, 그것 은 하늘 아래에 있는 두 번째 통치자를 사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높다는 뜻입 니다. 즉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오만한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신이나 마찬가지로 그 신의 아들이 있고 그 신은 바로 세상의 왕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일 때는 꼭 그렇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분명히 황제로 출발했는데 나중에는 다 황제의 상을 가지고 로마에서 섬기던 신들의 위치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로마는 군사 력으로는 그리이스를 정복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리이스 문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리이스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제우스 신이 쥬피터 신이 되고, 비너스 신이 아프 로디테가 되는 등 이름만 살짝 바꾸어서 자기들의 신으로 섬긴 것입니다. 그 가운 데 나중에 황제가 하나의 신으로서 그 대열에 섭니다.

초대 교회때에도 황제를 신으로 섬기라는 데 대한 거부가 바로 초대 교회 교인들 이 순교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큰 실제적인큰 핍박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을 들먹이는 것은 언제나 자기네들의 영광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 랍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쉽지 않아서 모든 인간들이 종교를 자기들의 장식물 로써 쓰듯이 기독교인들도 종종 기독교라는 신앙을 자기를 위한 장식물로써 바꾸어 놓기가 일쑤입니다.

지금 고라의 무리와 모세 사이에 싸우고 있는 내용이 무었입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너희만 뻐기고 있으니 우리와 나누어 가지자' 라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누가 가장 모욕을 당합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과연 아무나 하나님을 붙잡아다가 매어달 수 있는 훈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자기에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하나 님을 꿰어차고 올 수 있는 분이 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를 않습니다. 지금 고 라의 무리들과 모세와의 싸움은 하나님 앞에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고라 와 그의 일당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묻자는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라와 그의 일파들은 좋다고 나아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불이 나서 죽고, 지진으로 인해 죽 었습니다. 민수기 16:41절을 잘 보십시오.

이스라엘 회중이 오히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 은 아직 이 일에 항복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를 보고서도 항복 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상이나 됩니까 결국은 무슨 일이 발생하였습니까 이번에는 염병이 이스라엘 회중에게 번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방지책을 마련하셨습니다. 각 지파들이 가져온 지팡이들 중에 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을 내고 꽃을 피우게 하심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어셨습 니다. 이제 이 뜻을 잘 살펴보기로 하시겠습니다. 우리가 이 과정에서 중간에 넘어 오는 과정을 풀기 위하여 결론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히는 것으로 이 사건의 끝을 맺어야 했겠습니 까 이때의 지팡이는 전부 나무로 했습니다. 나무의 본분은 나무로서 생명을 결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팡이는 이미 생명이 없어진 죽은 막대기로 만듭니다. 원래 생명이 있는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박혀 있어서 그것을 들고 남을 때리거나 찌를 수는 없습니다. 잘려서 죽은 나뭇가지만이 어느 손에든지 들려서 상대방을 길 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토막만이 남을 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잘라낸 나뭇가지가 아닌 한 지팡이로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반드시 열매 를 맺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답인 것입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 3장7-10절의 마씀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 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 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 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 리라" 이 장면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는 장면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놓아 두고, 그렇지 않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우겠다는 말입니다. 어떤 열 매를 맺는 것을 좋은 나무라고 합니까 성경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는 대표 적으로 무화과와 포도를 들고 있습니다. 포도를 맺는 나무를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에 다른 열매가 맺힌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포도나무는 포도밖에 맺지 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포도더러 나쁜 열매를 맺으면 찍어 불에 던진다는 말씀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선택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무가 A라는 열매도 맺을 수 있고, B라는 열매도 맺을 수 있는데 A를 맺으면 살려주고 B 를 맺으면 죽인다는 선택으로 생각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입 니다. 열매를 맺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더 고찰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 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 성령의 열매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었입니까 이 열매들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서로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인 관계적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열매를 맺어 놓고서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속고 있는지 아십니까 대표적인 것이 사랑과 희락입니다. 혼 자 좋아하고 혼자서 사랑을 베푸는데, 그 사랑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사랑도 아니고 그 기쁨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상대방을 죽이는 희락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언제나 대인 관계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육체의 열매들을 보겠습니다. 갈라디아 5:19-21절을 보시겠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 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기에서 보듯이 육체의 열매들에서도 가장 주류를 이루는 것들은 대인 관계적인 것들입니다. 또한 충실하지 못한 시간의 낭비에 관한 것들입니다. 성경이 한 그루 의 나무에 대해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이야기 하는 것은 그 나무가 심기워져서 자기의 열매를 맺느냐, 아니면 지팡이가 되어서 남을 때리고 찌르고 다니느냐 하 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게 생명을 준 이가 요구하는 그 본연의 열 매를 거부하고 죽은 나무가 되어 누구의 손엔가 붙잡힌 바 되어 남을 때리고 찌르 고 다니는 역활을 하고 다니는 지팡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 를 맺어야 할 나무가 그러지 못하고 죽어서 남의 손에 들려 쓸데없이 누군가를 때 리고 다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지적하고자 하는 의미입 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부분에서 혼동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누구보다도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것이 남을 괴롭히고, 심적으로 죽이고 있는지에 대하여 는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산에서 기도하고, 또 오랫동안 금식기 도를 했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남에게 기도 안 하고, 금식 기도 안 한다고 정죄를 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결단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어딘가에 가서 집회에 참석해서 성경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고작 편을 갈라 놓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성령의 열매입니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더 깊이 깨 닫는다는 것은 한 사람을 용납한다는 것이요, 온유와 절제로 참아 내는 것이요, 기 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가 잘난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밖에 되지 않 는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다시 민수기 16장의 싹난 지팡이의 사건을 머리 속에 그려 보십시오. 고라와 다단 과 아비람과 온이 이백 오십 인의 족장을 데리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같은 행동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셨다는 것이 어디서 판가름났습니까 그들이 들고 나온 향로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다 죽여 버림으로써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 사 건을 보고 바로 깨달았습니까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올라오지 않았던 아비람과 온은 자기의 장막에서 아직도 살기가 등등합니다. 그때에 두번째 심판으로 무었이 행해졌습니까 지진입니다. 이 지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여태껏 없었던 방법으로 죽게 했으니 그것이 바로 지진입니다. 지진이 일어남으로 모세는 무었까지 증명해 보였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방법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고,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하였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몽땅 뛰어 나와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염병이 나 돌았 습니다.

오늘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사건에서 꼭 제시되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습 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건 속에 같이 있었다면 언제쯤 회개하였을까요 향로에서 불이 나왔을 때입니까 지진이 일어났을 때입니까 염병이 돌 때입니까 아니면 싹 난 지팡이를 보고 나서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 어느 때에도 회개치 아니했 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서 구원의 감격 속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옆에 있는 사람을 붙잡 고서 '당신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에 게 꼭 알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지진이 일어난 것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서 회개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회개케 된 사람인 줄 아십니까 그 어느 것으로도 항복하지 않아서 그것들을 법궤 속으로 넣고 그 위에 피를 흘려서만이 우리를 고칠 수 있었다고 성 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혹시 '나는 지진을 보고 돌이켰는데, 당신도 싹난 지팡이를 보고서 돌 아서라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상당히 심각하게 틀려 있습니다. 싹난 지팡이가 법궤 속에 들어가 있고, 그 위에 피를 흘렸다는 것 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까지도 아직은 해결이 아닙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 하여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많은 기적으로도 사람들은 결코 돌이키지 않았다 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기적들이 있었지만 그 많은 기적으로 인해서도 인간들을 돌이키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기 위한 책입니다. 주님께서 태어 나실때 동 방박사들이 오고, 하늘에서 별이 비취는 등 신비로운 일들이 있었지만 그 어떤 것 으로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수 밖에 없다 고 하십니까 결국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취하신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일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했고, 이에 대해 예 수님은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니라'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는 말 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베드로는 '안됩니다!'라고 강격히 반대했습니 다. 베드로에게 그만큼 깨우쳤는데도 알아 듣지 못하자 예수님께서는 죽는 방법밖 에는 너희를 고칠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복음서든지 죽으시고 부 활하신 것으로 끝을 매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거기에 피를 붓게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법궤를 피로 덮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세가지는 인간의 인간된 것을 가장 잘 고소하는 것들로서 첫 번째 돌판이 주어지기도 전에 그들의 불신앙으로 깨뜨려 져야 했으며, 그래서 다시 주어진 두번째 돌비와 만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만나 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자마자 '돌아갑시다! 애굽 에서 고기 가마가 있었고 떡가마가 있었습니다.'라고 아우성을 치자 그들에게 40 년 동안이나 만나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 시하는 이유는 무었입니까 수많은 심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아서 결국은 이 싹난 지팡이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싹난 지팡이가 해결책이 아닙니다. 불이 나와도 대들고, 지진이 나는 심판에도 대들고, 염병이 나돌아도 항거하여서 할 수 없이 잠잠케 하기 위해서 임시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제대로 보이시기만 하면, 혹 은 낱낱이 설명하시기만 하면 즉시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 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생각할 때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죽은 나무토 막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모두 다 지팡이에 불과합니다. 지팡이끼리 일어나서 서로 전쟁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참답게 뿌리를 내리고, 자기 생명으로 말미암는 꽃과 열매를 맺고 있지 못 합니다. 바로 이 지적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나무가 나무끼리 칼 싸 움을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무만큼은 언제나 싸울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자의 손에 잡혀서 자기도 모 르는 춤을 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중생시켰다고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데, 그 열매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 기쁨을 아시겠습 니까 자랑할 수가 없고, 남을 경멸할 수도 없고, 오직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감사 만 있다는 복음의 복음된 메시지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남보다 잘나서도 아니요, 우리 스스로가 깨우쳐서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 으로 알 수 없는 은혜 속에 우리를 그의 피로 덮어 이 자리에 앉히신 것을 아시겠 습니까 혹시 우리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설마 나같이 엉망인 사람은 아직 해당 사항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라면 교회에는 교회에는 왜 출석하십니까 '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왔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싶 은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강요한다고 해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강요한 다고 해서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오기 싫은 교회는 왜 억지로 나오시는 것입니까 이건 불가시이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는 교회는 나가지만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러나 우리가 교회에 나가 앉아 있는 것만큼 우리의 인생이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어 떤 큰 은혜의 손길에 있다는 것을 보다 더 잘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무슨 조건들 이 있기에 교회에 나와 있습니까 내가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이 사실보다 더 신비 로운 일이 없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보다 좀더 나은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 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더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자 중에 남보 다 더 조건이 낫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 의 은혜만이, 법궤 위를 덮은 피만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존전에 있게 하는 것입니 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겠다고 아니라 하나님께서 데려다 앉혀 놓고, '내가 네 죄를 씻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 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훨씬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랑하는 쪽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은혜가 은혜인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기 위한 근거를 추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은혜 된 것을 위하여 근거를 추적하지 마십시오. 은혜의 은혜 된 것을 위하여 성경을 제대로 추 적하십시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소를 왜 법궤 위에 놓 았어야 했는지를 통해 은혜와 구원을 제대로 알 수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 씀을 어떻게 하실 수 있었는 지를 이제는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모두 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노라' 이 말씀이 어떻게 가능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피를 쏟았노라'라는 주님의 복음 대문입니 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속에는 감사밖에 없고 예수 그리 스도를 아는 자랑밖에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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