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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 (요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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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속에는 베데스다의 못가에서 38년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예수님 을 만나므로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으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 입니다만 말씀의 촛점이 병을 고쳤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어려운 지 도 모릅니다. 물론 사건 자체가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쳤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 가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멧세지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이 사건 속에 들어 있는 풍성한 비유들입니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나는 이름들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이 여럿 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다고 나오고 거기에 38년된 병자가 있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 성경에 나와 있는 명칭들은 모두 상당한 의미가 있는 명칭이라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문이라고 할 때 양은 소, 염소, 양 할때의 양(양)을 말합니다.

옛날의 예루살렘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 한양이 성으로 둘러 싸여 있었던 것과 같이 성으로 둘러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그 성곽에 따라 각기 4대문 4 소문을 두었고, 시구문이란 문도 있었는데 이 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곽에도 본문, 샘문, 어문(생선이 들어 오는 문), 양문등이 있었는데 양문은제사드릴 제사용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었습니다. 그 양문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들어서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바로 그 양문 곁에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원래 구약 언어인 히브리 말로 '베이트'와 '헤세드'가 합성된 언어 인데, 각각 은혜와 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집'이란 뜻입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베이트와 레헴의 합 성어인데 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로써 내려온 산떡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시켜 볼 때에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음을 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때에는 이렇게 원색적 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예수님 상징화 하여도 우리는 잘 알아먹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도 구약의 풍성한 사건들과 내용들이 어떻게 함축되어 있으며 어 떻게 상징화 되어 있는 지를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의 '양문'곁의 '은혜의 집'에 누가 모여 있습니까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움직일 때 거기 에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어도 다 낫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38년된 중풍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병자에게 찾아 와 묻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예, 낫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그 병자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할 때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언제나 먼 저 들어간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 사람은 중풍병자이기 때문에 늦을 수 밖에 없 습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오직 물이 동할 때 자신을 먼저 물에 넣어 주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병자를 어떻게 낫게 해 주십니까 친히 그를 물에 먼저 넣 어 주셔서 낫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그냥 낫게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제시한 모든 조건들이 어딘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등장하셨고, 그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물에 먼저 넣어 줌으로 가 아니라, 말씀으로 그냥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좀 어려운 대조입니다만 차근차 근히 대조해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여기에 세 종류의 병자들이 등장합니다. 소경과 절뚝발리와 혈기 마른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혈기 마른 자란 일반적으로 중풍병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여기는 '은혜의 집'입니다. 은혜란 성경적으로 이야기 할 때 행위 와 구별되는 말입니다. 행위는 자기의 결과에 대하여 자기의 조건과 근거를 제시하 여야 한다는 말이고, 은혜는 자기가 얻은 결과에 대하여 자기 노력의 근거나 조건 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의 집에 와 있으면서도 이들은 은혜와 상반되는 것인 물이 동할 때 들어가야 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십오. 물이 동할 때 재빨리 물에 들어갈수 있는 사람은 이 물에 들어갈 필요가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물이 동할 때에 재빨리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병자 죽에 들어가는 사 람이 아닙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이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소경과 절뚝발이와 중풍병자입니다.

이 중에 아무도 자력으로 물이 동하는 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 이 무었을 의미하는 지를 간파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중풍병자를, 그것도 38년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찾으 셨을까요 신명기 2:14-15절을 찾아 보십시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 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여기 서 38년이라는 연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과 오늘 본문의 38년된 중풍병자 사이 에 일맥 상통하는 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몇년을 지냅니까 40년입니다. 방금 읽은 신명기에서 38년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2년동안은 어디서 지냈을까요 이스라엘 이 출애굽하여 맨 처음 간 산이 시내산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왔고 그리고서는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동합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을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거기서 정탐꾼 열둘을 보내었 는데 그들이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도무지 못들어 갑니다! 우리는 원주민 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고 가면 틀림없이 전멸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울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 하였습니 다. 그런데 열두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냥 들어가자!고 우겨댑니다 그러나 다수의 백성들의 반대로 인하여 할 수 없이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약속대로 그 곳 에 들어가지 아니한 너희, 홍해를 건넌 모든 자들은 여기 광야에서 40년 동안에 다 죽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40년의 기간에서 광야 생활 초기의 2년 간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을 받기 이전이었고, 가데스 바네아 이후의 생활은 율법을 받고 38년입니다. 그 38년이 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느냐 하면 가나안 입국이란 은혜로 약속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기 위함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한 것은 그 땅이 내 힘으로 빼앗아 쟁취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 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땅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우리가 가서 싸우려 하는데 상대방의 키가 9척이나 되고 우리가 스스 로 보기에도 그들 앞에서 메뚜기 같이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싸우나 마 나 질 것이 뻔한데 무었 때문에 죽으러 나갑니까 못들어갑니다.'고 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획득해야 할 결과들을 자신들의 힘과 손에 의지하고자 했던 것입 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할 때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행위'라고도 말합니다. 율법 은 어떤 법칙을 지키는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얻어야 할 결과를 자신 의 힘과 자신의 것으로 말미암아 얻어 가지는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 사건이 바로 이와같은 문제에 대해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 니다. 분명히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할 때에 누구든지 이 못에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습니다. 그러나, 들어갈 방법과 힘이 없는 것이 율법을 손에 쥔 모든 인류의 현 실이요,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적으로 제시해 놓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떤 사 람도 구원받고 싶지 않아서나 방법을 몰라서 구원을 못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힘도 없고 내게 가능한 구원의 길이 무었인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같은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자 세 가지 병명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중풍병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는 끊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될텐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 얻은 다음에 불신자들에게 가서 기독교에 대한 이야 기를 할 때 제일 먼저 부딪치는 싸움과 비슷한 것입니다.

불신 세상은 사람들은 우리들을 향하여 공격하기를; '너희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찌 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느냐 네가 나보다 공부를 잘하니 잘 생 기기를 했니 똑똑하기를 히니 도대체 나보다나은 것이 무었이 있느냐' 이것이 바로 신자들을 향한 불신자들의 일반적인 공격 내용입니다.

신자들은 이미 스스로 중풍병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데스다 못에 제일 먼저가 아니라 꼴찌라도 들어가려던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왜 포기했습니까 그것은 우리는 스스로에게 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세상 불신자들은 다릅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난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기어서라도 가려고 애를 씁니다. 들어가기에는 실력이 없다는 것이 뻔한 사실인데도 자신들이 정해 놓은 눈금까지는 갑니다. 그러고서는 신자들을 만나면 자기들 보다 못하다고 공격을 해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불행한 것은 신자들마저 여기 불신자들의 이러한 태도에서 한 걸 음이라도 더 나아가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께 이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주여, 저를 제일 먼저 저 못에 넣어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요구를 한 적이 없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물이 동할 때 못에 제일 먼저 넣어줌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알게 하시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의 핵 심인 것입니다.

 구약 느헤미야 3:1절을 보십시다.

"때에 대 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 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 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 별하고"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거 귀환하기 시작한 때의 사건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복구하기 시작합니다. 성을 쌓을 때 맨 처음에 다시 재건시킨 곳이 바로 '양문'이 었습니다. 망루를 짓고 문을 짓고 문과 문 사이에 성벽을 중수해 나가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31-32절을 계속해서 보면 제일 나중에 세운 성문이 '함밉갓' 문입니다 '밉갓'은 '심판'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입니다. 최초의 문으로 '은혜 의 문'을 건축하고 차차로 여러 문을 복한 다음 마지막으로 '심판의 문'을 재건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에게는 심판이 임한 다는 것입니다. 행위라는 것은 그것을 성취하는 자에게는 상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지는 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행위와는 상관이 없이 주시고자 하는 분의 뜻에 따라 무상으로 베풀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주 님 앞에서 심판이 따르는 율법과 행위의 법칙을 갖고서 응답한다는 것이 중요한 쟁 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살펴보기로 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베데스다 못에 오셨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은혜의 장소에 모여서 무었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은혜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먼저 뛰 어갈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란 우리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쪽에서 베푸시는 것 이므로 값 없이 받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풀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입 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병에 걸려 있던 한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 '예, 살려주십 시오!' 마땅히 이렇게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 생활이 거의 이와 비슷합니다. 인간이면 거의 대개가 자 기가 얻고자 하는 결과에 대하여 자기가 내세울 것을 갖기를 아주 좋아 합니다. 반 면에 신자의 신앙을 얽어매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자기가 얻은 것에 대하여 자기 것을 제시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죄는 자존심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구해 야 되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하는 것만큼 인간이 본질적으로 싫어하는 것도 없습 니다.

인생은 스스로 못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압니다. 더구나 못에 넣어줄 사람도 없습니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통하여 그걸 이행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래도 한사코 들 어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못에 들어가려는 것은 무었 때문입니까 병이 낫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건강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하면 들어갈 필 요가 없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모순된 싸움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궁여지책으로 누군가 나를 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들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넣어준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결국, 물에 들어 가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 사건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이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 고 걸어가니라"(9절).

이리하여 인간의 율법과 행위에 관한 노력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은혜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음 구절을 보면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드러내 놓고 맙니다. 다음 구절인 10절을 보면 이 사건이 안식일 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 날 일어나느냐고 율법을 가지고 따지며 덤벼듭니다 율법이란 나은 자, 즉 생명이 있는 자에게 필요한 제도요 규칙이지 그것 자체가 사람을 낫게 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지상주의로 외치는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 오히려 증오의 이빨을 드러내 놓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 다.

병자들 끼리만 모여서 누워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낫는 것입니다. 모두 갈망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일 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시자 그 병자는 즉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같이 누워있던 병자들이 말합니다. '안식일인데 어찌하여 일어나 가느냐' 이러한 싸움에 집착해 있는 우리 자신을 여기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도덕도 윤리도 아닙니다. 오직 생 명입니다.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소생하는 것 이요 영원한 운명에 관한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쓸데없는 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에 보면 두 소인국이 싸우는데 왜 싸우는가 하면 '계란를 뚜꺼운 쪽에서 자를 것이냐, 얇은쪽에서 자를 것이냐'를 놓고 싸웁니다. 이때 걸리버가 제안을 합니다. 공평하게 가운데를 자르자고. 마침내 가운데를 잘랐더니 '꽝!'하고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이와같습니다. 사람은 생명에 관해서도, 다른 사람에 관해서도 관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유일한 관심은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 뿐입니다. 이와같은 생각을 깨어버린 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아는 자요, 자기가 죄 인임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은 겸양 지덕과는 다른 것입니다. 참된 자아를 발견하 는 것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여 유대인들이 시비를 하는 것이엇습 니다.

요5:12-13절에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ㅈ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 서 이미 피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병자 자신도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병자는 이 날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전부터 알고 있어서 고쳐주기를 간청하거 나 고쳐 잘라고 뇌물을 바친 적이 없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고쳐 준 것입니까 예수님 마음대로 되어진 일입니다 . 이 말은 은 혜란 언제나 구하는 편에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편에 권리가 있다는 말 입니다.

신자는 누구입니까 은혜를 구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 므로 신자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자리에 설수 있게 되었느냐 하면 그것은 은혜를 받고나서 입니다 우리 몸이 성해지고 나서 모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게 능력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존재한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는 것에 놀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참 신자가 고참 신자에게 신고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생 명의 원리와 은혜의 원리가 흐르는 곳입니다. 교회야말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집 단이기에 그 속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포용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아무든지 좋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만 하면 여기 있는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집단이 바로 우리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 자리에 온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결론>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병자를 일으키셨 듯이 그렇게 우리도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신을 생각할 때에 마땅히 은혜입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쓸데 없는 자존심을 세우며 다짐을 하면서 남을 향하여는 얼마나 눈을 가늘게 뜨는지 아 십니까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곳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저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잡혀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고, 아직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을 보면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은 감회와 민망함 밖에 가질 것이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생명과 은혜를 제대로 세상에 전달시키기 위하여 우리 다와져야 합니다. 즉, 우리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라기 보다 정직이요, 용기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교회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색깔로 우리를 치장하자 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와같은 것들을 벗어버림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생명과 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약함을 드 러내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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