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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 가정의 축복 (마 08: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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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물을 받거나 물건을 사보면 포장과 내용이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 교회에서는 성탄절이 되면 각 가정을 전부 다 방문을 새벽송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탄절 이브, 그러니까 24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날 새벽까지 성가대원들이 각 가정을 방문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오셨네’ 찬양을 합니다. 일절을 불렀는데 그만 잠이 들었는지 안 나오면 한 절을 더 부릅니다. 그래도 안 나오면 집안을 향해서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축하합니다!’ 인사를 하고 다음집으로 갑니다. 성도들은 마치 이천 년전 아기 예수님을 찬양하던 목자의 심정으로 성탄절 새벽에 성가대원들과 함께 찬양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성가대원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줍니다. 그러면 그 선물들을 다 자루에 담아서 교회로 가져오는데 풀어보면 별별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겉보기와 내용물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각 부서별로 선물을 교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액수를 어느 정도로 정해놓고 선물을 교환합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하며 선물교환을 하는데 어떤 분은 굉장히 큰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을 조그마한 선물을 사가지고 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제게 아주 큰 선물이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두근두근 하는지 ‘과연 이 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하며 선물상자를 탁 여니까 상자가 또 나와요. ‘야아, 재미있구나’ 생각하며 또 열었더니 그 상자 안에 또 상자가 들고, 상자 안에 또 상자가 들고 맨 나중에 보니까 아이들 주먹만한 사탕 하나가 나왔습니다. 참 재미있던 추억이었습니다만 상자는, 포장은 굉장히 좋은데 내용이 형편없더라 그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을 정해진 액수보다 더 투자해서 값비싼 것으로 준비하곤 미처 포장을 못해서 급한대로 신문지 같은 데다 싸서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 그런 선물이 나온 사람들은 굉장히 실망을 합니다. ‘이거 오늘 형편 없는 것이 걸렸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풀어보면 내용이 너무너무 좋은게 나옵니다. 이렇게 포장과 내용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에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베드로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보면 축복이라는 포장에 싸여서 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 그 말은 요즘말로 하면 장질부사에 걸렸다 그말입니다. 장질부사에 걸렸으니 그 가정에 얼마나 큰 시험과 고통이 왔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 가정에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보면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포장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내용을 보면 바로 그 성공 때문에, 출세 때문에 오히려 지옥에 가고, 그것 때문에 그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시험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포장과 내용은 별개의 것입니다.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1.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
(1) 수제자 베드로의 가정에 고난이 닥쳐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가정에 시험이 닥쳐왔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그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축복이 재앙의 옷을 입고, 고난으로 포장되어 다가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질병은 베드로 가정에 네 가지의 큰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첫째는 이적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적은 편안한 가정에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말로 팔자 좋게 태어나서 팔자 좋게 사는 사람에게 이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는 가정에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풀어 주시고, 질병으로 인해서 괴로워하며 슬퍼하는 그 가정에 이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 베드로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장모가 열병으로 인해서 누워있는 그 때에 하나님은 이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세상말로는 전화위복이라고 표현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고난이 다가온다고 해도, 이미 어떤 고난이 다가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오후에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채수경 집사님이 폐암으로 인해서 굉장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서 기도도 해드리고 위로를 해드리고 싶어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병원에 누워있는 분이 전도하기에 바쁩니다. ‘목사님 제 옆에 누워 계신분 있죠 그분에게 제가 전도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온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렇게 그곳에서 여러 사람을 전도하며 총동원 주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드라구요. 그리고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내일 퇴원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질병이, 고난이 다가올 때에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다른 때는 이적의 필요도,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도 느끼지 않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이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 베드로의 가정에 임한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이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가족간에 유대를 강화시키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부모자식간에도 때때로 누가 아프거나 하면 오히려 단합되어지고 기도하며 더 영적으로 견고해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 참 교회에 시험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다 극복하고 나니까 그만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그야말로 탈진상태가 되어서 하는 수 없이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입원을 하니까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찾아 오시는데 병원이 아니라 부흥회 장소입니다. 오시면 기도하고 찬송하고 얼마나 좋은지 아무튼 입원한 바람에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그때 ‘목사도 가끔 입원을 좀 해야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목사 귀한 줄도 알고, 또 찾아와서 같이 기도하면서 찬송하니까 평소에는 관계가 좀 서먹서먹 했던 사람도 친밀해지고,또 평소에는 그렇게 속을 썩이고 괴롭히던 사람이 ‘아이고 목사님, 제가 목사님 속썩여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하고 회개하면서 눈물 흘립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고난이 올 때에 더 유대관계가 견고해지고 더 사랑해지고 친밀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친부모를 모시기도 힘이 드는데 장모를 모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장모의 열병으로 가족간에 유대가 강화되고 더 사랑하고 친밀해지는 그런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그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도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문에는 베드로의 아내가 살아 있었다든지, 예수님을 위해서 특별히 음식을 장만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9장 5절에 그 후에도 베드로의 아내가 살아있었다고 하는 성경의 기록을 보아서 그때도 베드로의 아내가 살아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우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기회가 되어졌다는 얘기입니다. 평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르던 사람이 그만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한쪽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더 원망하고 교회를 떠날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님, 생명 건져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며 감사헌금을 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나 여러분들이은 한쪽 다리가 안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감사합니까 감사 안하죠 한쪽 다리가 부러지니까 비로소 한쪽 다리 남은 것을 감사하는 것,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해보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때야 말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지막 넷째로 주님 앞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15절에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 예수께 수종들더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아무에게나 오는 축복이 아니고,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축복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성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봉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감사함으로 순종하고 봉사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신유의 비결
베드로의 장모에게 신유의 은사가 나타난 것에는 네 가지의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집에 주님을 초청했을 때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본문 14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라고 했습니다. 언제 이적이 일어났습니까 주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갔을 때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바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집에 초청했는데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병고침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초청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예수님은 그 가정의 어려움을 보시고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정말 신유의 은사를 받기 원합니까 병고침을 받기 원합니까 축복 받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 가정으로 모실 때 그 가정에 축복이 임하고, 예수님을 그 마음 속에 모실 때 그 마음속에 평안이 오고, 그 사회와 국가에서 섬기게 될 때에 그 사회와 국가가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셔 들일 때에 거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 모셔 들이지 아니하면 성공이나 형통도 변해서 오히려 그것이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외적으로 볼 때에 질병이나 고난이나 역경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모시면 그것이 변해서 축복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세상적으로는 출세하고 다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모시지 아니한 가정에는 그것이 변해서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가정은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 결과 병 나음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눈에 띄었을 때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15절에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눈에 띈것, 이것이 신유의 이적이 일어난 둘째 비결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주님이 보시지 못했으면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의 눈에 띄는 것입니다. 그러데 세상에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가운데서 자기의 재능이나 지식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눈에 띄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띄는 제일 좋은 방법은 첫째로 옷이 날개라고 하듯이 옷을 잘 입으면 됩니다. 제가 역삼동에 이사 와서 서류문제로 두어 번 동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입는 잠바를 입고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동회 직원이 쳐다 보지도 않습니다. 조금 있다가 어떤 넥타이를 맨 아주 훌륭한 신사가 오니까 ‘어서 오십시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하면서 먼저 그 분의 용건을 묻고 일을 처리해주더라구요. 저는 어쩌나 보려고 직원 앞에서 아무말도 안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저는 아예 쳐다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오니까 또 그 사람의 일을 해줍니다. 그래서 사람은 옷걸이도 좋아야 하지만 옷이 더 좋아야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갈 때는 넥타이도 매고, 옷도 잘 입고, 머리도 빗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번 저를 기억도 못하고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둘째로 세상에서 눈에 띄일려면 남보다 다른 능력과 재능이 있으면 됩니다. 특별히 음악적인 자질이나 미술적인 자질은 어려서부터 빨리 사람들의 눈에 띄입니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셋째로 돈과 권력이 있으면 됩니다. 아무리 못생겨도 돈이 있으면 사람들이 고개를 숙입니다. 제가 있는 아파트에는 차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기사가 어디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제가 직접 운전하고 갔습니다. 그때는 경비가 저를 알아보지 못했던 때인데 차를 못세우게 해서 치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니까 한 집에서 석대를 세우드라구요. 그래서 제가 물었더니 그 집은 사장집이랍니다. 그 집은 석대를 딱 세워도 아무 말도 안하는데 제가 차를 세웠더니 치우라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돈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빨리 눈에 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사람의 눈에 띄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 띄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에 띄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옷 잘입었다고, 재능이 있다고, 돈이나 권력이 있다고 하나님의 눈에 띄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는데 손수건을 가지고 흔들면서 기도를 하세요. 그래서 제가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그래야 하나님이 빨리 보시잖아요’ 하는 거에요. 하긴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 그렇게 혹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부소부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다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에 뜨이는 방법, 물론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눈에 띄입니다. 아니 기도해야 하나님의 눈에 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장차 될 일을 말씀해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기도하는 사람을 마침내 구원해 주십니다. 본문에 베드로의 장모가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고 했는데 물론 이때는 예수님의 육안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의 눈에 띄입니다.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주님의 손이 닿았을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에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손을 만질 때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손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입니다. 요새 우리 나라에서 기공(氣孔)을 연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이 인간의 손은 참으로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과 손끼리 서로 만지고 악수해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했더니 전에 교회에 있을 때 어떤 청년 하나가 악수할 때마다 손을 어떻게나 꼭 쥐는지 그만 손에 탈골현상이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제발 그렇게는 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 손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론 꼭 안수기도를 해야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세상을 창조한 창조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죄인들을 구원해주는 그런 능력의 손이며, 주님의 손은 우리들을 인도해주는 사랑의 손입니다. 바로 그 손으로 우리를 만지십니다. 지금도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눈에 띄기만 하면, 기도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만져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넷째로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신유의 역사를 나타내셨습니다. 16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의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은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은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쫓아 냈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던 그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던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 주님이 말씀하실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권위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말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창조적인 능력이 있고 또한 파괴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말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위로하기도 하고, 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한 번 더 말씀을 드리면 베드로의 장모에게 이와같은 신유의 은사가 나타난 것은 네 가지의 비결이 있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초청했다, 둘째는 예수님의 눈에 띔을 받았다, 셋째는 예수님의 능력의 손이 닿았을 때에 능력이 나타났다, 넷째는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이사야의 예언 성취
17절에 보면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침을 마태는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인용인데 이사야서 53장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이 구약 원문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성경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아니라 헬라어로 번역되어진 번역성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마태가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며 강조하려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것을 볼 때에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인 것을 증명해 주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가 메시야 된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메시야인 것을 증명해 주셨고, 그의 행하심이 바로 메시야인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가 메시야인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3. 본문이 주는 교훈

(1) 우리 각 가정에 질병이나 고난이나 어려움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저주라고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는가 보다’ ‘우리가 그렇게 잘 믿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시지 않을까’ 하면서 한탄하거나 불평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축복의 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섣불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가정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고침을 받을려면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만나고 경배하기 위함입니다. 또 때로는 주의 종들이 여러분의 가정을 심방합니다. 예수님 대신 심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이 갈 때에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구나, 참 감사하다’그렇게 생각하시고 기쁨과 감사로 심방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심방할 때에 기도한 축복과 기도가 그 가정에서 믿음으로 받으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을 갖지 아니하고 주의 종들을 기쁨으로 받지 아니할 때에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가정들을 보면 ‘아이고 오지 마세요’ 하며 심방을 회피하는데 심방을 멀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고침을 받은 자는 주님께 수종을 들어야 계속해서 복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주님을 수종들어야 합니다. 주님께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침을 받았습니까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봉사하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성장하지 아니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 봅시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누가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까 은혜를 받았는데 봉사를 안하는 사람입니다.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 육체도 자꾸 운동을 해야 건강해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자꾸 건강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닭의 날개같이 쓸모가 없게 됩니다. 닭이 날개가 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날 수가 없는 것같이, 은혜를 받기는 받지만 봉사를 안하면 받은 은혜마저 그만 사라지고 맙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은혜받은대로 계속해서 봉사하고, 계속해서 기도생활하고, 계속해서 주님 앞에 수종을 드는 그런 분들이 다 되어서 한 사람도 헛되히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제목>>
(1)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눈에 띔을 받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이 되게 하옵시며, 고난이 올 때도 믿음으로 바라보며 감사하게 하옵시고, 은혜를 헛되히 받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2)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고 하셨는데 주님을 섬기는 자로 주님 곁에 늘 있어서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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