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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 받은 새 일꾼 (몬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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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을 돌면서 소매치기를 하는 유명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감옥에도 많이 갔지만 계속 그 일을 버리지 못했었습니다.그러다 미시간주에 있는 있는 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자 많은 부하들이 그를 마중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그들 모두를 데리고 근처에 집회를 열고 있는 교회로 데리고 갔습니다.소매치기를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하자고 설득을 했습니다.도대체 두목님 답지 않게 왜 그러느냐고 부하들이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나는 이번 감옥생활 중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나를 변화시켰네.그 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시네” 그러면서 소매치기를 하던 오른손 둘째 손가락을 보여 주면서 말했습니다.“여기 마디가 잘린 이 손가락이 주님과 약속이며 나 자신의 결심이라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만큼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사람은 없습니다.이 세상의 그 어떤 책도 성경만큼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는 경위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그의 가슴에 꺼지지지않는 불꽃처럼 타올랐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움과 선생이신 바울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골로새를 떠나 로마로 향했었습니다.

어쪄면 도망하다 로마에 가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현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여러분 이제 그렇다면 이렇게 극적으로 바울을 만난 오네시모는 어떻게 되었을 까요 .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을까요.

1.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말하기를 갇힌 자 중에서 낳았다고 했습니다.즉 그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희미했습니다.믿음의 기초가 분명치 않았습니다.그러나 이제는 바울의 복음을 직접 듣고 그 말씀 위에 온전한 믿음을 세움으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일반적으로 3가지의 기초 위에 믿음생활을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감정을 기초로 삼고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교회출석도,기도하는 것도,봉사하는 것도,성도들과 교제하며 섬기는 것도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하기도하고 안하기도 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둘째는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기초 위에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판단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합니다.좀처럼 감정의 기복이 없습니다.권위적입니다.그러나 자신의 자신의 이성이 앞서기에 이성을 초월하는 영적인 실재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거나 체험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순종하며 사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말씀이 “예”이면 나도 “예”이며 말씀이 “아니요”이면 나도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이런 사람들을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감정도 필요하고 이성적 판단도 필요하지만 말씀을 순종하는 것 이상 앞설 수 없습니다.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키라고 했을 때 자신의 기분에 따르거나 이성과 경험만을 의지했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이까짓 막대기로 바다를 가르킨다고 무슨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하며 망설였을 것입니다.그러나 모세는 무조건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아이가 놀다가 다쳐서 다리에 깁스를 했습니다.분명 살전5:17에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했습니다.첫 번째 경우의 성도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지금 아이가 다쳐서 화가 나있는데 어떻게 감사합니까”라고 할 것입니다.두 번째 경우의 성도는 “아무리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도 감사할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감사한단 말입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세 번째 경우의 성도는 어떻게 합니까.그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다리만 다친 것도 감사합니다.그 동안 아이에게 무관심했었는데 이런 일로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기도하지 못했는데 기도의 제목을 주시니 감사합니다.”하며 이렇게 순종하는 신앙이 복된 신앙입니다.

어떻습니까.여러분은 신앙은 어떤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2.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본문 1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원래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유익하다』라는 뜻입니다.그런데 그 동안 오네시모는 그 이름 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던 삶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울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합니다.이제는 타인을 위해서도 희생할 줄 아는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있습니다.또한 있으나 마나 한 사람도 있습니다.그러나 꼭 있어야할 사람이 있습니다.오네시모는 바울과 빌레몬 뿐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에게 해를 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저런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며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그 사람은 로마의 앞잡이로서 지독하게 세금을 거둬들이던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로마정부에게는 유익할지 몰라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는 그는 전혀 무익한 사람입니다.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주님의 말씀으로 그는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그는 자신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선포했습니다.더 많은 세금을 착취한 사람에게는 4배나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이제 그는 주님을 만난 후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오로지 자기자신만 알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생각할 줄 아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가정에서 자녀들에게,남편이나 아내에게,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어떤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심지어 차라리 우리 아버지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가정도 있습니다.부모는 자녀에게 너를 차라리 나지 않았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 불행한 가정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는 어떻습니까.최근에는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한참 일할 나이에 15년 20년 직장에 젊음을 바치고도 권고사직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이제는 필요 없으니 나가 달라는 것입니다.이렇게 냉정한 것이 우리 사회입니다.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다.주님의 말씀과 같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에서나 없어서는 안될 소금이 되십시다.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다.오네시모를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를 변화시키실 줄로 믿습니다.

3.그는 바울의 제자로 변화되었습니다.
12절에 보니 “저는 내 심복이라”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심복이라는 의미는 신약성서에 단 한번 쓰인 단어입니다.오직 오네시모에게만 심복이라고 했습니다.바울에게는 디모데,두기고,디도,에바브라등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다른 누구에게도 이와 같은 단어로서 말한 적은 없습니다.
먼저 심복이란 뜻은 바울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어떤 말이든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오네시모는 자신의 영적인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이 원리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여러분은 영적인 지도자인 제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물론 이 교회를 섬기지 않는다면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사랑의 교회라는 공동체로 불러주시고 은사를 부어 지도자로 세운 것을 인정한다면 모든 가르침과 목회적 권면에 순종해야하는 것입니다.
둘째 심복이란 말은 바울을 닮은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인격과 신앙을 닮은 바울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바울의 제자란 결국 누구의 제자입니까.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바울의 동역자이며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유능한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바울 곁에서 바울을 돕다보니 오네시모는 바울을 닮은 일꾼이 되었습니다.기독교신문에서 최근에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교회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주일아침예배만 참석하고 일주일을 보내는 성도들이 교회마다 늘어간다고 합니다.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오후 예배는 그 교회의 10\1조 되는 인원이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며 또 교회의 전도활동이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빈도도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저희 신학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제가 다닐 때 80년도에 만해도 사명에 불타서 학교에 왔었습니다.어려워서 기숙사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학생들이 많았습니다.도서관 지하 기도실에서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사명감이 뜨거웠습니다.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소식들을 들어보면 이제는 신학대학을 사명감보다 좋은 대학 갈 실력이 안돼서 온다는 것입니다.기도실에는 기도소리가 희미해져 간답니다.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개척목회를 하려하지 않습니다.지난번에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자기의 동기생 중에서 개척한 사람은 2사람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뜨거운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 신학대학의 흐름이 다 이런 추세로 가고 있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교인으로서는 만족하되 제자의 각오로 봉사하며 희생하며 충성하려는 일꾼들이 점점 줄어간다는 것입니다.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된 헌신자들이 줄어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하며 한탄하셨습니다.

제자는 희생을 지불하고 값을 지불해야 하지만 그에게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습니다.빛나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위로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인입니까.제자입니까.방관자입니까.아니면 일꾼입니까.
어떻게 일꾼이 됩니까.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내가 교회를 위하여 할 일이 없나를 찾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다른 사람이 망설이는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심복이라는 의미는 무엇보다 오네시모가 복음의 심부름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 감옥에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바울을 대신할 전도자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오네시모는 바울의 곁에서 머무는 동안 그에게서 복음을 듣고 배우고 깨달았습니다.오네시모는 이제 바울이 어디를 보내든지 복음을 전할수 있는 자격과 지식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할 수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상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습니까.병원에서 약을 기다리는 동안에,기차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이웃집을 방문했을 때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선생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그 분은 십자가에서 선생님을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그 분을 믿을 때 죄에서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 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복음은 전하는 것이지 설득하거나 교육시키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도 누구나 쉽게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4.오네시모는 섬기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다.바울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바울은 감옥에서 외로웠습니다.자기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바울의 본심은 그를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오네시모는 남을 잘 섬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원래 노예는 주인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그러나 옛날에는 노예라는 법에 매여 육체로 섬겼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몸으로서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섬긴다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바울과 오네시모의 상황을 볼 때 “친절을 베풀다”라는 의미가 적합할 것입니다.당시 감옥은 지금과 같이 밥도 옷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누군가 수발을 들어주어야 합니다.오네시모는 이 일을 담당했던 것입니다.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고 몸도 주물러 주고 부축하기도해 주고 필요한 것을 공급했습니다.친절하고 자상하게 바울을 섬겼던 것입니다.
고전 13장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한 두 번째 특징에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했습니다.이 온유라는 원어의 의미가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무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무엇보다 가족끼리 친절하기를 바랍니다.아내는 남편에게,남편은 아내에게 ,부모 자녀간에 친절하게 섬기기를 바랍니다.어떤 경우든지 무시하거나 교만하거나 신경질적이거나 귀찮은 듯하거나 권위적이거나 한 태도를 삼갑시다.주인을 섬기듯 서로를 섬긴다면 바울과 오네시모와 같이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관계가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룸 싸롱에서 화재로 말미암아 14명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듣고 보니 5층에서 어떤 사람이 불이 났다고 소리를 지르며 대피하라고 외쳤답니다.그런데 그만 음악을 크게 틀고 노래소리에 취해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해서 큰 인명피해를 냈다고 합니다.저는 그 뉴스를 들으며 노아시대와 우리시대를 생각했습니다.그 때도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세상의 쾌락에 젖어 노아가 외치는 심판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달콤한 쾌락에 젖어서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12:2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너희는 이 시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지금은 변화와 개혁의 시대입니다.개혁하지 않는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은 망하는 시대입니다.무엇보다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깨어서 이 세대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소리를 듣고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여러분은 주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을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심복이 되기를 바랍니다.충성스런 복음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친절히 대하며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변화는 나 스스로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나와 함께 내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사울이 바울로 바뀌고 무익한 오네시모가 이름 그대로 유익한 오네시모로 변화 된 것처럼 여러분에게 이러한 변화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변화 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오늘 말씀 가운데 여러분에게 감동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 하나를 붙들고 기도하며 삶에 적용하기를 바랍니다.우리는 모두 지금은 불완전합니다.그러기에 때문에 주님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개혁과 변화의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믿음 목표를 향해 도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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