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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쌍한 사람을 도웁시다. (욥 31: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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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실한 신자 한분이 주님을 몹시 그리워하다가 어느 날 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뵙게 하여 주 소서,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을 그를 향 하여 내일 중에 내가 찾아 갈테니 잘 맞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그를 찾아온 것은 어떤 절뚝발이 거지 하나였을 뿐 하루 종일 기다 려도 주님은 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그 날밤 그는 주님께; 어찌하여 약속 을 어기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내가 너를 찾아갔었지만 너는 나를 냉대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내 형 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이지만 참으로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도와야 할 자는 누 구입니까

1.가난한 자를 도와야 합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16절) 욥은 '내가 언제 빈궁 한 자를 입히지 않았던가'라고 반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욥이 큰 자라 고 알려졌던 것을 그가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소유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물은 모으는 것보다 나누어주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들여 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자의 죄는 재물을 많이 가진 그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죄는 불 쌍한 나사로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 에 의하면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가난한 자는 당신의 현신이기에 이점은 오 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빈궁한 자들의 어려움에 대해 별로 아는 바도 없이 돈이 현명하게 쓰여지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도움을 베풀지 않습니 다. 또한 자신이 베푼 도움을 다시 되돌려 줄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친절 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이 건강을 회복 하면 자신의 육체를 올바르게 사용할 것인가에 개의치 않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도 강도에게 욕을 당해 길에 쓰러져 있는 이웃이 과연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자신이 베푼 도움의 대가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인지에 상관없이 그를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습니 다. 교우 여러분, 지금은 산업 사회의 영향에 의하여 살기가 예전보다 나아 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난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대부분 사회의 구조악 때문에 가난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구제는 정부 시책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살리는 일에 솔선해야 할 것입니다.(요일3:17)

2.고아(孤兒) 를 먹여야 합니다.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17절) 욥은 자 신이 젊었을 때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만 보아도 고아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두고 계시는가를 잘 알 수 있 습니다. 세상에는 불쌍한 자들이 많이 있지만 고아처럼 가련한 존재도 없습 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어린 자식이 고아가 되어 이 삭막한 세상을 정처없 이 떠돌아 다니며 굶주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어느 부모든지 그런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고아들이 많고 이 순간에도 그런 아이들이 무수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대에 는 결혼 생활을 부실하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많은 아이들이 길거리 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아들 역시 주님의 현 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도 천하보다 값진 생명 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화> 물질과 행복 인간이 가지는 큰 축복 중에 하나는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아 는 것입니다. 이란의 팔레비왕은 우리 나라 예산의 3년분에 해당한 돈을 축재해 두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망명 다닐 때에 가발을 쓰기도 하고 수염을 붙였 다 땠다 하기도 하고, 눈알을 까맣게도 하고 노랗게도 하며 이리저리 피 해 다니다가 결국에 암병에 걸려 Chicago 어느 병원에서 수술비용도 못낸 채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가 탐심과 사심을 버리고 정치를 바로하고 올바른 사람이 되었다면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이 되며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집착을 버리고 되어야할 사람이 먼저 되면 (Being), 필요한 것을 가지는 데에는(Having),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을 돌보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 다. 그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의무입니다.

 3.과부를 인도해야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18절) 본래 남편과 아 내는 하나님께서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살도록 짝지어 주신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남편을 잃음으로써 파탄이 났을 때 아내의 그 처절한 심경이 어떠하겠습니까 오죽했으면 '과부의 사정을 과부밖에 모른다'는 속언이 생겨났을까요 예수께서는 기도의 효력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한 과부가 자기의 원통한 사정을 재판관에게 호소한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 이 것만 봐도 과부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 기에 신구약을 막론하고 고아의 이야기 나오면 거기에는 반드시 과부도 따 라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초대교회는 과부의 명부를 만들어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훌륭한 전통을 세웠습니다.(딤전5:9). 그런데 오늘의 우 리 교회는 그런 전통을 얼마나 살려 가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 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살리고 고아들을 먹이는 일 못지 않게 또한 과부 들을 선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길일 뿐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나 오늘 잘 살고 있다고 하여 항상 그렇게 사는 것만은 절대 아닙니다. 내일이 되면 오늘의 부자가 얼마든지 가난한 자가 될 수 있고 내 자식이 고아가 될 수 있으며 그리고 나 역시 과부의 신 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불쌍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돌보는 일도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네 식물을 물 위에 던 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고 하였습니다. 선행은 반드시 보상이 따라 온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불쌍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욥도 그러하였다. 그는 오로지 도움을 받는 이웃의 이익에만 관 심을 가지고 선을 베풀었다. 참으로 선을 행하기 원한다면 이와 같아야 하 지 않겠는가 진정 성경은 도움을 받을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이 도움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또 도움 받은 사람들이 모두 나아져 무엇을 하 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 를 우리가 항상 현명하게 쓰지 못함과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릴 가치가 없는 자들임을 아시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필요 를 채워주라고 얘기하고 있다.

아무런 댓가도 없이 우리 모두를 당신이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 로 인정해주시고 아낌없이 당신을 내어주셨던 주님을 오늘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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