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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고전 12:31-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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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에는 가짜가 많고 모조품이 많습니다. 그래서 금이나 보석같은 귀금속에 가짜가 많고 꿀과 같이 우리 몸에 좋고 유익한 제품에 가짜가 많습니다.

현재 사이비 종교 가운데도 기독교 모양을 갖춘 사이비 종교가 제일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참으로 값지고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날 이 세상에 가짜 사랑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가짜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랑에 가짜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돈도 명성도 성공도 쾌락도 보다나은 직장도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 줄 수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사랑을 한자로 쓸 때 [愛]를 씁니다. 이 사랑 [愛]자는 받을 [受]자 한복판에 마음을 써 넣은 것입니다. [마음을 받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수여받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서로 따뜻한 말과 웃음과 애정을 주고 받는 곳에 있습니다. 정다운 말과 애정을 서로 주고 받지 못할 때에 인간에게 불행이 시작됩니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할 때에도 괴롭습니다. 주고 싶은 때에 주지 못하는 것도 괴롭습니다.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없습니다. 줄 사람한테는 사랑을 주어야 하고 받을 사람한테는 사랑을 받는 것이 조화입니다.

그런데 줄 사람한테 사랑은 안주고 주지 말아야 할 사람한테 사랑을 주는 것은 비극입니다. 받을 사람한테 사랑을 받지 못하고 받지 않아도 될 사람한테 사랑을 받는 것도 괴롭고 불행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받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에베소서 3:17-19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찬송가 404장 3절에 보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있겠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 노래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 1서 4:10 말씀에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라을 전달하지 못합니까 저는 4가지의 큰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어떤 죄냐하면 이기심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차단합니다. 인간속에 있는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큰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나눌 줄도 모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사랑을 베대로 연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보고 사랑을 정의하라 한다면 사랑은 연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많은 훈련과 연습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사랑을 믿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랑과 이해를 보면서 느끼면서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릴 때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을 보면서 그 속에서 자랐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모습과 싸우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가정 안의 갖가지 갈등과 불화를 보년서 자란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렇게 결심합니다. "나는 나중에 결혼하면 내 아내를 절대로 구타하거나 하녀처럼 취급하지 말아야지"합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결혼해서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구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갈등을 해결할 다른 방법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괴롭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술을 퍼마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나 술주정뱅이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라면서 수없이 "나는 절대로 술 안먹겠다"고 결심과 맹세를 하지만 저들이 어른이 되어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나면 대부분 저들 자신도 모르게 술집으로 가거나 술을 퍼마시게 된다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식구들의 말다툼 속에서 자라고 욕설과 침무과 외면속에서 자란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훈련받은 적이 없고 사랑이 무엇인지 연습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사이비 사랑과 가짜 사랑과 잘못된 사랑을 사랑인 줄 알고 착각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우리는 사랑을 잘못 배우고 연습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저도 아들 둘을 키우기 때문에 집은 온통 수라장입니다. 사내아이들이 한창 활동을 많이 하게 되니까 깨어지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좀 잘못하면 제가 매로 호되게 때립니다. 그러나 이 사랑에 대한 것을 늘 생각하면서부터는 아주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질러서 제 앞에 와서 떨고 섰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아주면서 "네가 실수했다고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면 그 조그만 아니가 제 가슴에 파고 들면서 웁니다. "아, 아버지는 내가 꼭 잘할 때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도 나를 사랑하는구나"하는 것을 확신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랑을 받는데에는 많은 조건이 뒤따른다는 것을 익혀왔습니다. 모든 사랑에는 조건이 잇는 것으로 배우고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맞을 때에만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람이 사랑하는 학교에 입학하려면 입학금이 많이 필요하구나. 입학금을 내지 못하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해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을 받는 것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랑의 입학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절망하고 자기를 헌신짝처럼 내어던집니다. 또 사랑을 받기 위하여 가면을 씁니다. 허위의식을 갖게 됩니다. 모든 행동은 보상을 바라고 합니다. 보상을 바라고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보상을 바라고 봉사합니다. 사랑의 어떤 보상을 바라고 행동하게 되는데 바라던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온 잘못된 사랑의 교육입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도 입학금을 내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하나님의 사랑을 차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입학금이 필요 없다고 해도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과 죄악을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잘못된 인식과 장벽을 다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믿고 과감하게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우리는 사랑을 거부당한 경험을 여러번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려고 했지만 그 사랑을 거부 당하기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했지만 사랑을 주지 않아서 거부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자주 아팠습니다. 어느날 배가 몹시 아파서 저의 어머님이 들에서 일하시다가 저를 데리고 안동에 있는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의 진찰은 끝났는데 의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어머니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어머니는 감히 의사한테는 물어보지 못하고 간호원한테 가서 물어 보았더니 그 간호원이 "가 있어요! 가만 있어요!"하며 그냥 가 버렸습니다.

제가 그때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죽어도 간호원은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오래 갔느냐 하면 제가 교역자가 되어 심방을 다니면서 병원의 환자들을 방문했을 때 의사와 간호원이 환자를 위해서 애쓰고 사람을 살려내는 모습을 보고 이해할 때까지 간호원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거부당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사랑받기를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왜그러냐 하면 또 사랑을 거부당할까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이런 모든 것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과감하게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속에 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말씀을 3전에 걸쳐서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새롭게 사랑의 삶을 시작하려고 하면 몇가지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다시 한번 "나는 죄인이다"하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실패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너무나 이기적인 인간이어서 하나님의 바라시는 사랑에 실패하면서 살아왔음을 깊이 인정하고 인식하는데서부터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느냐고 이야기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마져도 이기적인 욕심이나 이해관계에 따라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의 이기심, 자만심 그리고 우리의 이 죄를 인정하는 것이 곧 죄에서 해방되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그대로를 고백하는 것이 참된 치유와 회복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마음 속에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데 이 사랑은 성령에 의해서만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실천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고 사랑의 실패와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으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랑을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짜 사랑과 잘못된 사랑에 빠져 있을 때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완성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룬 일에다가 더 어떤 무엇을 우리는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 일을 받아들이는 길밖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해 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사랑을 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아 아니라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모든 성도는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살고 계시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9 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성령에 사로잡혀서 살지 못하고 성령에 충만해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사랑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참 사랑의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지를 못합니다. 신자이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낡은 욕심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성령과 육체의 욕심이 싸움을 벌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은 전쟁터가 됩니다. 성령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과 육체가 하고자 하는 일 가운데 싸움이 벌어지다가 마침내 육체의 정욕이 강하게 되어지면, 우리는 그 전쟁에 실패해서 육체의 욕망을 따라 갑니다. 형식과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삶의 양태는 육적인 그리스도인, 육체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셋째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낡은죄의 본성을 철저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16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땅 위에서의 육체의 욕심이 깨끗하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것이나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성령을 물리치고 육체의 욕심에 굴복해서 육체의 욕심을 추종하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립니다. 가짜 사랑에 빠지거나 사랑의 실패자가 됩니다. 성령을 쫓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아니합니다.

육체의 욕망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하는 것과 우상숭배하고 술수하고 원수맺고 사는 것이며, 분쟁하고 시기하고 분노하고 이기심에 사로 잡히고 당파심과 질투와 술주정과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살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행과 진실과 온유와 절제가 우리의 삶에 따라 옵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에 충만한 삶인 것입니다.

넷째는 성령과 함께 걸어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고 하는 일은 거기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어떻든지 그대로 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이 요구하고 있는 그 일에 우리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한복판에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한복판에 순종의 나무를 심어 두셨습니다.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에 따라 살면 칠면조 같은 인생이 됩니다. 사랑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공허하게 됩니다. 우리는 변덕스럽게 바뀌는 감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진리속에 우리 자신을 부착시킬 때에, 사랑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계명 안에 살면 내 사랑속에 살게 된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셧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인정 받고 좋은 직분이나 지위를 얻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주 불쌍한 신앙인이 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회생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세력과 힘을 추구하고 있읍니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비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까 차라리 팔공산 갓바위에 가서 비는 것
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라. 내가 제일 좋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인생의 길에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네가지 목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첫번째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생활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예수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우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부터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합시다. 제일 좋은 길을 찾아 나섭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며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을 사모하고 사랑의 길이 제일 좋은 길임을 기억하고 그것을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고, 이것을 위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 되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우리가 받아서 가장 좋은 인생의 길인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생활이 생활속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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