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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요 0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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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것에는 모조품이 많이 있습니다. 진주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에 모조품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도 상당히 사이비 종교가 많고 유사 종교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보석에 모조품이 많듯이 기독교 신앙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모조품이 많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에 모조품, 즉 가짜가 많다는 것이지요.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인기없는 단어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대학생들에게 인기있는 단어라면 정의, 자유, 해방, 민중 등 뭐 이런 것이 인기가 있지, 사랑이라는 것은 의식 없는 자들이나 하는 저속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시대 가장 외쳐야 할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 일치라는 단어, 하나됨이라는 단어 등으로 바로 여러분이 부르짖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구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가짜가 많은데 진짜 사랑이 무엇이냐, 한번 정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을 한자의 단어로 풀어 보려고 합니다. 한자 애(愛)에는 받을 수(受)가 있고 그 가운데서 마음 심(心)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 사람 애(愛)자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받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따스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것을 정의내리면 "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주는 것이요, 베푸는 것인 줄만 알지 그렇게 준다거나 베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없는 사랑을 누구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속에 사랑이 재고로 쌓여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정의 내리자면, 첫번째 정의로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고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그래도 누군가로 부터 사람을 받고 있고,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사람은 사랑을 하기 위한 존재라기보다는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물은 태어나면 즉시 일어나 걸어 다니고 어미의 젖을 빨아 자신의 먹이를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달라요. 사람은 태어나도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젖도 입에 물려 주어야 빨 수 있지 스스로 찾지를 못합니다. 1년이 지나야 겨우 누구인지 분간하게 되고 또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서 다 성장한 것 같은 생각을 갖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이제는 사랑을 받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 친구의 사랑을 받고 여러분들은 살아 가고 있습니다. 동물은 태어나 1년만 되면 벌써 어머니없이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살이 뭔지 아십니까 자살을 하는 이유는 사랑을 받기 원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마음이 들어 갈 때 그때 그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사랑받지 못했다는 최후의 절규가 자살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는요,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사람이 됩니다. 오늘 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는 청소년 문제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 인생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 중에 사람들과 그래도 가까이 사는 것이 고양이와 개라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보면 대개 한국 사람들은 개는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그래서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를 훨씬 더 가까이 놓고 지내게 됩니다. 강아지를 사면 주인은 같이 놀아 주고 어디를 가더라도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하지요. 이렇듯 개는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받고 자란 개는 나중에 사랑을 아는 개가 됩니다. 그래서 주인이 어디를 갔다가 돌아 오면 멀리서도 알아 보고, 벌써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 듣고 '아, 주인이 왔구나.' 좋아하며 꼬리를 치고 반가워합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대부분 사랑을 받지 못하게 때문에 언제나 사람을 경계하고 자그만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나타내는 등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듯 동물도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데, 하물며 인간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사람이 됩니다.

세번째,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무능력자가 됩니다. 여러분! 고아는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대부분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기 어렵다고 합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기 원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어릴 때는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만 받고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 살이 되고 네 살, 다섯 살이 되면 혼자 돌아 다닐 수 있게 되고, 그럴 때가 되면 어머니의 사랑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도 사귀게 되고, 점차 나이가 자랄수록 자기들 또래의 서로 나누는 사랑이 형성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열다섯, 열여섯 사춘기가 되면 친구간의 사랑 가지고도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또 다른 사랑 즉, 이성에 대한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학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여학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렇듯 이성에 대한 사랑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지요. 결혼 초기에는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여보! 당신!" 하며 그 사랑으로 만족하는 것 같지만 결혼 몇년이 지나면 사람은 또 다른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그런 관계의 자녀를 또한 요구하게 되지요. 그래서 자녀를 낳아 사랑을 듬뿍 주면서 삶을 살아 가게 되지요.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 노인이 되면 사랑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러나 노인은 또 노인으로서의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살아 갈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 어떤 사랑도 그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좋고, 친구의 사랑도 좋고, 아내와 남편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이성의 사랑도 좋지만 그 이상의 사랑은 필요없다고 만족해 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더 큰 사랑을 사모하고 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의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랑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같이 이 세상에는 없는데, 오직 하나 참으로 우리의 모든 인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 말씀에 보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정의내린다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는 "아!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을 받았다."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저와 여러분은 올바른 사랑을 하지 못하고 또 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저와 여러분이 사랑을 제대로 연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 사랑을 연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꾸 싸우게 되면, 어머니가 밥상 들고 들어 오면 아버지는 밥상 걷어 차고 그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녀는 좋은 사랑을 연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결혼하면 저렇게 하는구나!" 그런 것만 배웠단말이지요. 그런 사랑의 연습만 배우게 됩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사랑을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단 말이지요.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은 데도 잘못 된 사람을 하게 됩니다. 가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우리 사랑에 대해 아주 잘못 된 것을 배웠는데 사랑에는 조건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을 배울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는 아이가 점수를 잘 받아 올 때는 칭찬해 주고, 잘못 받아 올 때에는 때리고 야단칩니다. 뭐 좀 잘 하면 사랑을 베풀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매가 돌아 오고 하는 가짜 사랑을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하! 사랑에는 등록금이 필요하구나. 사랑을 받는 데는 뭔가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구나." 하는 그런 의식을 갖게 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받지 못한 이유가 있는 데 자신의 무능력, 자신의 잘못된 그 무엇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비하시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을 받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 사랑을 배웠고, 잘못 사랑을 연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랑을 거부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사랑을 우리가 못받는 것입니다. 때로 사랑을 받기를 원했지만 거부당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랑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을 연습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연습하기는 했는데 잘못 연습했습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필요하구나 그 다음에는 사랑을 받으려고 했지만 사랑을 거부당한 경험이 우리 가슴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면, 내가 착해야 하고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아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준다는 잘못 된 생각을 갖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사랑을 잘못 연습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의 삶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무리 인간에게 보여 주셔도 우리 인간들이 그 사랑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나는 너를 참으로 사랑한다. 나는 사랑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실지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통하지 않는 하나님 인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그 예수님께서 사람의 하나님을 친히 믿으시고 그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해를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되 의로운 사람에게만 내려 주시지 않으시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도매금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라곤 단 한 사람인 것 같이 우리 개인 개인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가 와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찾아 가서 싹싹 빌 때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무슨 대가를 요구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특징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합니다. 인간에게 제사를 받기 좋아하고 돈을 요구하고 각각의 무엇을 요구하는 그런 신입니다. 많은 신은 욕심쟁이입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헬라 신화 가운데 프로메티우스라는 신이 있는데, 그 신은 하늘에서 제우스 신이 관장하는 불을 훔쳐다가 불이 없는 인간에 주었습니다. 제우스 신이 너무 화가 나서 인간에게 불을 갖다 주었다고 프로메테우스를 바다 한가운데 있는 바위에 묶어 놓고 하늘의 독수리들이 간을 파 먹도록 하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세상의 신은 인간을 착취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 주시고 주시다가 마지막에는 당신 자식을 내어 주시는 그 하나님이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고 예수가 가르쳐 주지 아니한 하나님의 인식을 우리 인간을 구속합니다. 우리 인간을 착취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예수가 우리게 보여 주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제일 먼저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자기 자아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어서 가장 행복하다." 그런 마음의 자세로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저주하고, 자기가 자기를 원망하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못 살게 하는 인생만큼 비참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나같은 보잘 것없는 존재를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귀한 존재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용납하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가장 먼저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잘 났던 못 났던 자기를 그대로 끌어 안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흘러 나가는 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이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또한 남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인생에 가장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람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삶의 승리가 있습니다. 사랑이 부족하거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우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상징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갈증을 느낄 때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아를 끌어 안고 사랑하시고 또한 그 사랑으로 우리의 아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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