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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성숙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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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의하면 (1986년) 한해동안 미국에서 자살한 사람의 수가 7천명이 넘는 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인구의 반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까운 일본에 서는 2만 5천여명의 자살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자살 심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학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자살 심리에 있어 서의 공통적인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특징의 하나가 배고픈 사람이 자살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단지 배고픔의 고통만 있는 것이라면 어떻 게 해서든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의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굶주림 그 자 체가 자살의 이유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경제적 인 문제가 아닌 까닭에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부한 나라일수록 자살 인구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두고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기적인,즉 자기중심적 사람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 자살의 순간에, 나 아닌 단 하나의 다른 사람이라도 생각을 해 보았다면 그렇 게 죽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나 하나만을 생각하므로 그 생각이 자살로 몰고 가 는 것입니다. 다음 또 하나의 공통적 특징은 대체로 교만한 사람들이 자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협소한 자존심에 매이기 시작하면 이렇게 외곬으로 빠져드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터널 비유로 말을 합니다. 이는 터널 속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멀리 끝에 둥그랗게 딴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분명 그 외에 보다 넓은 세계가 있음에도 지금 내앞에는 저 조그마한 동전 한닢 만한 구멍 밖에는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협소한 마음의 소유자인지라 이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큰 근본적인 공통 문제는 하나 같이 사랑을 모르며,사랑의 대상 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부모의 사랑이나 사회에서 인정을 못받고는 물론 적어도 그 순간만은 이세상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는 생각에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사람은 밥만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정신 세계에 있어서 는 언제나 사랑과 보람을 먹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이러한 것들이 없는 삶이라면 그 인생은 이미 죽어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따 라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최종 문제는 사랑의 성숙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인간의 심리학적인 발달단계를 두고 네 가지의 재미있는 유형으로 분리해 놓은 것을 한번 생각해 볼 까 합니다.

 첫째는:병원 침대의 모델 같은 사람이 있따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마취 된 사람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환경에 수동적으로 응하고 있 을 뿐 아무런 자유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의사가 째면 째이 는 것이고 간호원이 피를 뽑으면 뽑히는 대로 모두를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그러 한 사람입니다.

두번째는:유원지 모델로서 이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것과도 같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위험하고 복잡한 문제가 많음에도 소풍을 가는 어 린 아이의 마음은 마냥 들떠 있어서,막상 가보면 별 일도 없는 것을 꼭 좋은 일 만 있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낭만적이고 꿈같은 생활을 원하는 그런 유형을 말합 니다.

 세번째는:수영대회의 모델이 있다고 합니다. 수영장의 수영 선수는 많은 사람 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복잡한 분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출발 신호가 땅 하고 울린 다음에는 앞,뒤,그 누구도 의식함이 없이 오직 자기 앞에 놓인 코스만을 향해 전력을 다하여 독립적으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와 같이 자기의 코스로만 줄달음치는 그러한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는:정구대회의 모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친 공을 내가 어떻 게 받아 넘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절대적인 실력도 필요하지만 상대적인 여건이 문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저 앞의 상대 선삥가 나보다 실력이 나은 경우 에는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나로 하여금 긴장케 합니다. 어떤 모양으로 서어브가 올 것인가 그리고 그에대한 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이러한 긴장관계 속 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쯤 되면 상당히 성숙한 단계라 하겠습 니다.

 여러분! 이를 두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네 단계 를 거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강보에 싸인 어린 아이 때엔 그 저 주는 대로 먹고 누이면 누이는 대로 안으면 안는 대로 지내야만 했고, 그러다 가 조금 자라게 되어서는 마냥 좋은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엔 세상이 거 꾸로 가는지 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좌우간 피난가는 트럭을 타고 가며서도 피 크닉을 가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입시 지옥에 빠져서는 원하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죽자 살자 공부하면서 고독하게 경쟁에 임해야하는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치기도 하 지만 받기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모델들을 두고 여기에 사랑의 문제를 놓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 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사랑의 수준은 어 느 정도에 이르고 있는가 하는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어서 아예 선택의 여지도 없이 부모 형제의 사랑은 물론 전적으로 보호와 사랑을 받기 만 하며 사는 때가 있씁니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유약한 단계에 있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게 되어 지금까지 받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만족한 사랑을 받지 못할 때에는 불평과 원망을 하며 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 에 유아기에는 매사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저 모두가 나를 위해 있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의 심리를 두고 어떤 분이 묘사하기를 "어머니의 젖이 왜 둘이냐 할 때에 하나는 내가 먹으라는 것이고,하나는 내가 가지고 놀 으라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느 한쪽도 나누어 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사과가 하나만 있어도 저것은 내 것이다. 아버지는 필 요한 것을 가질 수 있게 돈을 벌어오는 사람,어머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 람,오빠는 내가 말타기 하며 놀기 위한것,이런 식으로 전부를 자기중심적으로 생 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내가 우주의 중심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나를 위하며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 자라 동생이 생기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때는 사과 한 개가 있으면 반은 동생 것이고 반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성장해야 되는 것입니 다. 그러다가 조금 더 자라게 되면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니 사분의 일만 내 것 이라 할 정도는 성장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성년이 되고 성인이 되면 이젠 사회중심적, 혹은 타인 중심의 보편적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다른 차원에서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 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생각하는 것이 어른스러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 우리는 흔히 건강하면 축복이라 생각하는 반면에 병이 들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성숙된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사업이 실패하였을 때 여기 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때로는 하나님의 채찍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음을 깨닫 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내게 되어지는 모든 일이 다 은사요 축복이며,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앞날에는 하나님 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기에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어려운 과정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로 생각하며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입니 다. 적어도 이 수준에서 이해해야 함은 물론 이렇게 될 때 그것이 어른이 아니 겠습니까

어린이들은 주고 받은 일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받으면 사랑이고 주게 되면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에는 받는 것이 사랑 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 반면에 주는 것이 좋고, 게다가 사랑하면 자꾸만 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조금 더 성숙해지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가 대접 을 받고 선물을 내가 받았다면 배가 고파서 또는 못살아서 선물을 받는 것이겠습 니까 아무리 하찮은 선물이라도 마음으로 주는 것이기에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 다. 이것이 어른들의 성숙에서 주고 받는 정리요 이치입니다. 여기에 누구를 무시한다거나 무시를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흔히들 걸핏하면 무시한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마는 그러한 이야기가 다 유치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이 성숙하고 보면 받는 것도 사랑이요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고 받는다 는 것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줄 때도 감사하고 받을 때도 감사하 며 모두가 고마운 것 뿐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보고 사랑으로 들으며,사랑으 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사랑의 말,사랑의 행위가 어색해 지는가 하면 그 이유는 다 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변변치 못한 자존심 때문에,자기 의라고 하는 그 쓸모없는 교만이 있어서 그것이 다치고 상할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을 완전히 꺾어버릴 때에 비로소 부드러워지게 되어 이제는 줄 때에도 고맙고 받 을 때도 고마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만약 요즈음 청년들이 탕자의 처지가 되었더라면 차라리 자살 을 하고 말더라도 끝까지 돌아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일찌기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자식이 무슨 낯으로 돌아온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탕자는 돌아왔 고,돌아올 때의 그 자신은 죽은 것입니다. 특별히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 때에 그가 무슨 체면으로 앉아서 그 음식을 받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의 의는 완전히 매장해 버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염치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 잔치를 잘 받아 먹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요 여 기에 사랑의 성숙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아무런 공로도 없이.염치없이 받을 때 에 여기에는 나라고 하는 자기 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주 신 그 의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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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 10. 수요예배설교 김 성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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