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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특성 (고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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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어진 바요 받은 바이 기에 결코 자기 자랑을 앞세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랑은 생각지도 않은 채 다른 사람, 내가 사랑하는 그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 의 장점을 보면서 그의 자랑을 나의 자랑으로 삼아 아낌없는 칭찬을 하게 되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는 자이면 나의 자랑은 없어야 하며 저를 위한 칭찬과 자 랑함에는 주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아버지가 있다 합시다.

이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준일이라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어느날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든 이 아버지는 왜 이렇게 (미) 밖에 없느냐며 공부가 시원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 준일이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번에는 모두 (우)를 받아가지고 아버지 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가 하는 말이 왜 (수)는 없냐는 것입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칭찬을 받아보고 싶은 이 아이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번에는 전 과목이 (수)인 성적표를 갖다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본 이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하였을 것 같습니까 아버지의 말인 즉 "요즈음 선생들은 성적을 되는 대로 주더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준일이는 그 자리에서 크게 실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아버지 이기 때분입니다.

 교만한 아버지의 사랑, 자식에게 자기 자랑을 앞세우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면 이 러한 사랑은 자식에게 통하지도 않거니와 반갑지도 않습니다. 그 때문에 부모들이 어쪄 다 무엇을 가르친답시고 "그것도 모르냐"며 쥐어박고 구박을 할 때면 아이들이 속으로는 "나도 크면 알아요,무얼 좀 아신다고 재요"하고 나온답니다. 무슨 일에서 나 자기 사랑이 앞서는 동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는 자식을 위함이라고 하 지만 보다 먼저 자기 자랑이 앞서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 다. 따라서 그 사랑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칭찬이 많은 사람인지 비판이 많은 사람인지 여러분!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요. 얼 마나 칭찬을 해 왔는지, 아니면 비판을 하 고 살았는지를 말입니다. 사랑은 결코 비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남의 장점을 크 게 보며 칭찬합니다. 자기 자랑은 묻어버리고 상대방을 높이며 자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간적인 요소와 배경으로 보아 지난날에는 누구보다도 자랑할 것 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 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명문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교육을 받은 석학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참으로 갖출 것을 다갖춘 당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그 모든 자랑거리를 오히려 해로 여기고 배 설물과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빌 3:7-8)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에게 유익했던 그 모두는 십자가 밑에 깨끗이 묻어버리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할 뿐 나를 위 한 자랑이라면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고후 12:9) 진정 이러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사랑을 아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그분의 탁월한 삶의 질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랑이 없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큰 표적이나 놀라운 사건 이후에 무리를 피하여 한적한 곳 으로 숨으시던 그분, 병자를 고친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시던 부군, 정녕 주님의 인격은 심오한 깊이를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같 이 되려다가 영원히 추한 악의 피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이 신 예수님은 오히려 그분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심 으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자기 자랑을 극복하는 비결은 대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의 망령이 내 인격을 추하게 하거든 전능자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달리는 자랑할 것 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왜냐구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과의 사랑에 빠진 까닭입 니다.

 2.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있는 한 교만은 사라지고 녹아 없 어지게 됩니다. 이는 본래부터 그 누구에게도 교만해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 입니다. 만약 사랑 앞에서도 교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이 분 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9절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 사랑이 있는 곳엔 교만의 허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사랑하기에 그 사랑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어느 사이에 진실해진다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데가 없습니 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양자라는 사람이 송나라에서 여행 을 하면서 어느 주막집에 들렀더니 그 집 주인에게는 두 여자가 있는데 한 여인은 미 인이고 다른 한 여인은 못생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상하게도 이 주인은 그 두 여자 중에서 잘생긴 여자를 향해서는 외면을 하면서 못 생긴 여자는 극 진히 사랑해 주더랍니다. 그래서 이 양자라고 하는 양반이 주막집 주인에게 "내가 보기에는 미인이고 매력적인 여자는 이쪽인데 이 여자는 사랑하지 않고 당신은 왜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시오"라며 물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주인의 대답인 즉 " 저 잘 생긴 여자는 잘 생겼다는 그것 때문에 너무 교만하여 코가 높아져서 내 눈에는 그 잘 생긴 것이 보이지를 않고 이 못 생긴 여자는 자기가 못 생겼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겸손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못 생긴 것이 눈에 보이지를 않는 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주인의 대답은 참으로 명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잘 생기고 못 생기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느리고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 다. 그 누구이든 사랑을 받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요. 가장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던가 를...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문제는 간단히 이해가 됩니다. 내가 사랑받지 못 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알 수가 없고 사람의 사랑도 모 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저 고독하고 외롭기만 하다면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그 원인은 간단한 것으로 바로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 므로 이제는 겸손하게 낮추십시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이란 단순한 덕 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할 때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 다. 그러나 교만은 스스로를 감옥으로, 지옥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 뿌리 깊은 곳에 존재하는 교만의 영성을 극복하고 겸허 하게 이웃 앞에 설 수 있는 처방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 오십시오, 거기 당신의 모든 추한 죄를 짊어지고 몸부림치며 신음하며 피흘리시는 하 나님의 아들을 보십시오. 당신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참 자유와 사랑의 자녀로 삼으 시려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죄인으로 매달려 고통받은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마다 주께 드리는 진실한 첫 사랑의 고백 이 있습니다. "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지닌 것은 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오니 주여 이제 나의 자랑은 주님밖에 없사옵나이다.

" 이 사랑을 참으로 체험한 사람-그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3.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랑의 부족과 이기심 으로 가득찬 육신적 교인들의 무례함을 인하여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례함은 대표적으로 네 가지의 사건 속에 잘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 우선 그들의 애찬식에서 이 무례함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모일 때마다 늘 사랑의 애찬을 나누어 먹으며 교제하는 일이 있었는 데 어떤이들은 이 교제시간에 교제보다도 먹는 것을 더 탐하여 모임이 시작되기전에 먼저 와서 먹어 치워버리기 때문에 정시에 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 교제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단순한 낭만도 아니고 구호도 아닙니다. 이런 공 적인 교제 석상에서 이웃을 생각하고 형제를 위하는 심정과 덕을 세우기를 원하는 마 음으로 취하는 조심스러운 낱낱의 태도에서 참된 사랑의 실천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2) 또 하나의 경우는 성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애찬식과 마찬가지로 고린도교회의 어떤 이들은 거룩한 만찬의 상 조차 자기들의 배 를 채우기 위하여 성례를 남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보혈을 묵 상하는 일보다도 차라리 포도주에 취하여 성만찬 석상에서 주정하는 추태까지도 일으 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고 "그런즉 내 형 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33-34절) 고 말씀했던 것입니 다.

 3) 다른 경우는 고린도교회 내의 여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여성들이 부당하게 편견으로 다루어지던 당시의 시대에서 여권은 생각조차 할 수 없 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그들은 억압의 사슬을 벗고 인간으로 서의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더러 이 자유를 남용 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권위에 대한 순복과 정숙한 여인의 표상으로 머 리에 수건을 쓰던 여인들이 수건을 벗어 던지고 가정에서 남편에게 대한 태도와 교회 에서 남성 지도자들에 대한 태도가 강팍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고린도 전서 11장이 쓰여집니다.

 자유의 남용은 곧 무질서의 어둠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런 여성들은 교회의 예배에서 조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절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더우기 이 들 가운데 어떤 여성들은 방언을 한답시고 예배중 질서없이, 저마다 통역없이 해독이 불가한 소리들을 높여 예배의 참된 덕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 장의 방언에 대한 경고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아픔의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붙들려 멧세지를 보 냅니다. 이 모든 무질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참 사랑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 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무례히 행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영어에서는 (예절)이라는 말이 <코티어스> 란 단어로 쓰여졌는데 이는 본래 "궁중에 서의 왕자의 예절"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예-철종이 강화도령 예절을 지 미기가 얼마나 어려웠든지 몇번씩이나 왕자안하고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왕자의 예절이란 얼마나 준엄하고 당당하며 흐트러짐이 없습니까-그리스도인들 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자들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시 민이며,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말합니다. 그래 서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공 적 규범에 덕을 세우는 행동을 뜻함)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오히려 더 예의바른 삶의 규모와 특성을 간증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답고 향기있는 삶은 주님의 아름다움을 나 타내려는 주님께 대한 애정, 그리고 이웃을 주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 려는 간절한 사랑에서만 비롯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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