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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제사문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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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지 근 2백년 동안 교인들이 크건 작건 갈등을 느겨온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도 이 갈등에서 탄생하고 있다.
젊은 천주학도였던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어머니 초상을 당하자, 그 신주(神主)를 '공산(空山)의 한낱 편목(片木)에 불과하다'면서 태워버리고 순교를 하였다. 그런지 1백 20년 후인 1920년에 이 교리와 제사와의 갈등은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논쟁으로 비화하여 사회문제로 번졌던 일이 있었다. 영주에 사는 기독교인 권성화의 아내 박씨가 시어머니의 초상을 당해 제청을 지어놓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자, 권씨가 교리를 어기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말렸고, 박씨는 시어머니의 신주를 정결한 곳에 묻고 자결한 것이 불씨가 된 것이다.
이에 민족운동과 기독교계의 지도자요, 당시 YMCA총무이던 이상재 선생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반드시 서양사람이 하는 그대로를 본받는 것이 예수를 진실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하고, 예수의 마음을 조선 형식으로 동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어떤 종교도 조선혼을 물실(勿失)하라 하고 신주를 위해 생명을 끊고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길흉화복을 그에 미루어 미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따름이지 부모 섬기는 공경심을 예수가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제사옹호론을 폈다. 이에 맞서 나선 사람이 당시 적십자 운동의 공로자요, 종교(宗橋) 감리교회의 양주삼 목사였다.
제사 모시는 것이 조선혼일 수는 없다 하고 제사는 과학지식이 천박하고 종교사상이 미흡하며 도덕관념이 유치할 때 우러나오는 미신적 풍속이라면서 이상재 씨의 지자천려 필유일실(知者千廬必有一失)이라고 반박했다. 이를 계기로 교회 투석사건이 있었으며 교인과의 통혼거절 등의 수난이 생겨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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