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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이란 무엇인가? (요 19: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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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성공 의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성공을 위하여서는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도 허다합니다. 친구나 친척 또한 경우에 따라 서는 형제나 부모까지도 잊어버리고 성공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일류학교 진학을 위하여 가진 수단을 아끼지 않는 것도 결국 은 성공을 위하여서라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성공은 만인의 염원이 며 목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 사이에 가끔 일어났던 문 제, "누가 더 크며 제일이냐"하는데 대하여 "남을 섬기는 사람, 그리 고 나중되려는 사람이 오히려 첫째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성공의 진 수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공의 심리는 두 가지 본능적인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1) 소유욕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자니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것 그리고 미래의 것 까지도 소유하려는 마음입 니다.

 그런데 이 소유욕은 탐욕과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소유욕 자체가 악 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잘 조절하지 못할 때는 큰 비극마져 초래케 됩니다. 그와 반면에 선용된 소유욕은 인간에게 의욕과 열성이 생기도 록 만들어줍니다.

 (2) 주려는 욕망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에게 무엇을 주고싶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준 는 가운데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곧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받 지 못하는 사람이 고독하다면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은 환멸을 느낍 니다.

 주고자 하는 욕망도 소유욕이나 마찬가지로 선할 수 있는 반면에 악 할 수도 있습니다. 주고자하는 욕망은 인간 마음에 깊이 뿌리박힌 명 예욕과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선적이며 가증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로 줄 수 잇는 행동은 모든 덕 가운데서도 매우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된 성령을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공이란 무엇을 얻을 수 잇느냐에 닫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어떻게 주느냐에 달린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성공자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때의 장면과 그때하신 가상칠언의 일부입니다.

 확실히 십자가는 저주와 비극의 상징이었습니다. 형벌 제도가 극히 발달되었던 로마제국에서 아무리 흉악한, 그리고 무서운 죄를 지어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십자가 형에 처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예들이나 이민족이나 당할 처참한 형벌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신이 저주한 인간이라고 규정해 버릴 정도로 저주스러운

사형틀입니다.

 예수는 33년의 자기 생애의 최절정으로 비극적이며 참으로 쓰라리고 도 굴욕적인 죽음을 죽어가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침뱉고 조롱하는가 하면, 자기만 믿고 따르던 사랑하는 여인들 앞에서 처참하게 숨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처참한 순간에도 그는 절망하거나 패배를 자인하지 않고 오히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어서 그 말만 가지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좀더 깊이 생가하면 성공이 무엇인지를 말하여 주고,의미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가장 잘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국어사전에서 풀이한 것과 같이 어떤 사회적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 부자가 되는 것이나, 권세를 얻어 자기의 언명에 따라 움직여지는 세력권이 더 넓어지는 것이나, 입신양 명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얘기만은 아닌 것입니다.

 짧게 사셨으나 예수님의 일생은 수난의 생애요 비극적인 요소가 너무 나 큰 요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이 분명하고 가는 길 즉 방법이 확연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실 때 남다른 책임과 고유한 방법에 스스로를 얽어 매었습니다.

 우리는 성성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두 가지 언른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공생에 시기 즉 세례 받으 시고 난 후 자기 사명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시려고 광야에서 40일 을 금식하신 다음에 당한 마귀의 시험을 공관복음에서 봅니다. 시험하 는 자가 말한대로 "이 돌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대로 능력을 행사하여 배고픈 대중에게 경제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메시야적 입장을 전개시켜 나갈 수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그의 발을 붙잡아 땅에 부딪히지 않게 함으로써 기이한 메시야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고개 숙이는 일, 다시 말하면 정치적 타협과 국사력에 의하 여 왕권의 목적을 성취하는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가 되는 것도 예수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을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이 시험을 거부한 이유가 중요한데, 그것은 문제 자체도 문제이려니와 시험의 주체자가 마귀임 을 우리가 명심할 것입니다.

 둘째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보 지경에 가셨 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또"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을 하셨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위대한 메시야적 고백을 베드로에게서 들 으신 다음에 주님은 자기 마음속 깊이 감추었던 사실을 말하였으니,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의 말씀대로 자기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 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은 베드로는 스승을 위하여 제자로서의 인간적 심정으로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이일이 결코 주 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면서 만류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베드로를 엄히 책망하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 라"고 하시며 자기를 십자가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이 아님과 아울러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넘어지게 하는 일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왜 주님께서 스승의 비극적인 생의 노정을 막아 보겠다는 제자의 마 음을 몰라 주고, 오히려 책망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앞에서 우리가 거론한 마귀의 시험을 거부한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지 않고 마귀가 유혹한 대로 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기이하면서도 정치적인 메시 야가 영광과 권세의 자리에서 호령하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인간의 죄 문제는 영원히 미결로 남고 그것을 기뻐할 자는 사탄인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인류 구속의 대업이 이룩될 수 없고 ,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광야의 시험에서 마귀가 노렸던 것과, 스승을 생각하는 베드로의 인 간적인 생각이 완전 일치한 것으로서 그것은 예수의 생애를 실패케 하 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완전히 해소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귀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의 도구로 삼으며,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정의까지 악용하는 교활한 존재임을 볼 때 참으로 두 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시험과 유혹과 인간의 인정에 끌리지 않고 고통과 수 난의 길을 걸어 십자가를 지시고 이제는 죽게 되었으니 자기의 삶은 보람있게 되었고, 사명 수행을 성공이요 인류 구속의 대업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없이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성공적인 삶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보람있는 삶입니까 먼저 주님은 투철할 의지로 사명의식과 그것을 수행하시어 관철한 생 애였습니다. 의지라는 것은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 지만 모든 경우에 있어서 공통된 것은 자신의 사명을 관철시키는 정신 력과 신앙의 강조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결단으로 혹은 끈기있는집 념으로 혹은 역경을 참고 견디는 인내력으로 나타나든간에 사명에 출 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선생님은 갈라디아서 5장 16-26절과 6장 11-17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는생활을 부연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인도하심을 믿는 까닭에 자기의 의지를 죽이고 그의 뜻에 자기를 속박시키는 의지와 노 예가 되는 생활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찬란해 보이는 영광의 환상을 그리고 선악과를 본 아담 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마져보고싶은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용감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파괴적인 역사 법칙에 있어서는 자기의 뜻을 살리고 주님의 뜻,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기 이기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 법칙에 있어서는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자가 승리자인 것입니다.

 주님은 남을 위한 삶과 남을 위한 죽음을 보람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보낸다는 것과는 아주 달라서 뜻 을 가지고 어던 곳으로 전진해 나간다는것입니다. 공간의 축소와 시간 의 단축과 함께 과열 경쟁을 현대 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데, 여기에서 보람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잘 죽으려는 자세가 곧 값있고 보람 있는 삶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분명한 사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뜻과 이상의 빛 아래 살다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고통과 공포가 불어온다 하더라 도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뜻과 이상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십 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나 하나가 희생됨으로 온 인류의 죄를 감당 할 수 있다는 큰 뜻과 빛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람있는 죽음에 서 연역되는 보람있는 삶인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생의 보람을 찾으려는 우리에게는 가장 큰 교훈의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부의 사명에 충실키 위하여 당신들의 의지를 꺾어 주님의 뜻에 복 종하시겠습니까비록 십자가와 죽음의 길이라도 그것이 다른 이를 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서라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성공적인 삶, 보람있는 삶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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