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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에 기록된 기적-손 마른 자의 치유 (마 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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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예수님, 둘째는 손 마른 사람, 셋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어느 사건에서나 마찬가 지로 예수님은 구세주로 등장합니다. 환자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원 의 기적을 방해하는 훼방꾼입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 ^ 본문의 기적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살펴보겠습니다. 예 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회당에는 한 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 었습니다. 회당에는 예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의 유지들과 권력자들도 있었을 텐데 성경은 예수께서 특별히 손 마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모습을 조명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연약한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과 관심을 쏟으심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

 본문에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손이 불구 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독 누가만 오른손이 말랐다고 기록하였 습니다(눅 6:6). 누가는 의사의 통찰력을 가졌기에 다른 복음 서 기자와는 다르게 자세히 보도하였습니다.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오른손은 힘의 상징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권능 있는 사역을 묘사할 때도 주(主)의 오른손(출 15: 6 참조)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은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생활 능력을 상실하 고 무력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무력한 사람들을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합니다. 주님은 이 손 마른 사람을 돌아보셨고 고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다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계명을 어긴 죄로 예수님을 난처한 지경 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라면 어떤 곤경도 감수 하실 작정이셨습니다.

사랑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결 심할 때 우리는 항상 사랑의 수고를 치러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 음 날 손 마른 자를 고치셨다면,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 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에서 당장 병자를 고치실 정도로 그 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실천은 언제나 즉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 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는 명령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 에 부담을 주셔서 이 귀중한 일을 지금하라고 하실 때 실천해 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 감동을 소멸하면 나중에는 그 명 령을 수행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언제 나 지금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음 속에 손 마른 자에 대한 부담이 있었을 때 그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 난을 듣지 않아도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해야 할 일을 하 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이처럼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필요한 때 즉시, 그리고 가장 적절하게 나타납니다.

 손 마른 자의 모습 ^ 예수께서 손 마른 자에게 두 가지 사항을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일어서라(막 3:3/눅 6:8 참조).

둘째, 손을 내밀라(13절).

이 두 가지 명령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번째 명령은 순종할 수 있는 일입니다. 손 마른 자는 회당 안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손을 내밀라는 명령은 손 마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문에는 정확하게 손 을 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명령에 다 순종 했는데, 문제는 두번째 명령입니다. 손을 내밀라는 명령은 의심에 가득 찬 질문으로 거부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손익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손 마른 자의 순종이 탁월 한 것은 그가 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했다는 사실 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명령들이 그렇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는 명령도 쉽게 순종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 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분께 감히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 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마 16:1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 자체가 기적입니다.

 예수께서는 할 수 없는 일에 기꺼이 순종하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손을 내밀라는 명령에 손을 펼 수 없습니다가 아니라 의심 없이 손을 내민 손 마른 자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것, 주님을 깨닫는 것,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도 인간의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실 때 인간이 제때에 올바르게 순종해야 합니다.

손 마른 자의 순종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손이 나았습니다. 이 기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신 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 ^ 회당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관심을 쏟는 부분은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바리새인들의 관심과 초점은 의식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가, 어떻게 회당 예배를 잘 운영 할 것인가, 어떻게 의식을 집행할 것인가 따위가 바리새인들의 중 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날 병자를 고치셨다는 이유로 바리새인들은 분노하 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1 4절).

예수께서 사랑을 베푸신 사건을 트집 잡아 죽이려는 음모가 바리새 인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 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 은 오늘날 교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심각한 교훈이고 도전입니 다.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교세를 확장 할 것인가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태도가 그런 보기들입니다. 사 람을 사랑하고 불신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 입니다. 구속(救贖)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한 영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우리가 하려는 행사 계획에 몰두하기가 더 쉽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 교회 가 확장되는 꿈을 꿉니다. 세계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는 꿈을 꿉 니다. 그러나 교회 발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주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 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을 종교 체계나 형식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의 구 원에 두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 나아오는 사람을 방해하 는 훼방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리새인들의 관심과 초점은 하나님과 이웃이 아니라 자신 에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 때 문에 유대교에서 자신들의 명예와 지위가 흔들린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결국은 종교적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도 존재할 수 있는 이기심입니다.

 본문 바로 앞 부분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당신의 신앙 생활은 자비를 강조할 수도 있고 제사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기독교는 제사의 요소가 짙습니다. 새벽 부터 밤까지 예배를 여러 번 드리고 여러 가지 계명을 지킵니다.

그러나 나눔과 사랑과 섬김이 부족합니다. 제사의 측면을 더 강 조해서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을 때 제사의 무용론을 주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귀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알 필요 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날 예배드렸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것으로 우리의 신앙 의무가 끝난 줄로 착각합니다. 예배를 드리면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배 이후의 생활이 신앙의 성숙도를 반영합니 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까닭은, 아마 7절 말씀 의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계획하신 일인 듯합니다. 우리는 이 기 적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교회의 외형이나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혹 시라도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같이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봅시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들 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지금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인지, 바리새인의 그릇된 신앙관 을 좇고 있는 훼방꾼인지 자신을 점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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