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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임받는 제자들 (요 0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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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인 사건입니다. 오늘은 이 본문으로 이 사건에서 제들이 어떤 역활을 맡고 있는가 하는 점에 촛점을 맞추 어 살펴보고자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자들이라 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 한 백성이요, 그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며, 그의 제자인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심에 촛 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이라면 똑같은 기록을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역활에 대하 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4:14-17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 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 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 뿐이니이다"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제 저녁이 되었으니 이들을 인근 마을로 보내서 각자 저녁 식사를 하고 오도록 합시다.' 이 말에 예수 님께서는 '보낼 것 없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른 복음서 에서는 어떤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마태복음에서는 소년 이 가져온 것이라는 말이 생략하고서 제자들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것이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뿐인데 어떻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으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사건 묘사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한 가지 사건 속에 넣어둔 의도된 여러 멧세지 중에서 하나의 멧세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내용과 동일한 의미 를 담기 위하여 요한복음 6 장에서는 이 사건을 다르게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요6:5-6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여기서는 마태복음의 기록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의 역활과 제자들의 위치를 강조하고 확인시키기 위한 메시지를 여기에 숨겨 놓으 셨다는 서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일부러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이들을 먹이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그러자 빌립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가져와도 조금씩밖에는 먹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화폐 가치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이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하루 품삯을 3만원을 치면 6백만원 정도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적게 먹이는 요기할 정도의 양으로 먹였을 때의 금액입니다.

그러므로 만족하게 먹일려면 다섯배 가량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3천만원 가량이 든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6백만원 정도가 필요한데 제자들이 가지고 온 것은 아주 적은 보 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뿐이라는 것입니다. 6백만원 정도가 필요한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주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시자, 그들이 꺼내 놓는 것은 고작 '6백원 밖에 없습니다'는 대답인 것입니다.

이것을 해석할 때에 '비록 육백원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그 육백원을 사용하셔서 육억 원 정도의 일을 하신다'고 이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도 좀 무리가 있습니다. 무었이냐 하면, '예 수님께서 그 오병이어를 꺼내 놓게 하시는 것은 무슨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는 반드 시 무슨 기적을 일으킬 최소한의 것이 있어야만 그것을 이용하여 기적을 일으키시 는 분이시다'라는 해석에도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을 일으키 실 때에, 오병이어를 가지고 일으키신 것과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기적을 일으키 는 것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기적다왔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드시 는 것이 훨신 더 놀라운 기적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굳이 오병이어를 등장시키신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이것을 현대식으로 말해서 '너희가 무었이든지 주께 먼저 바쳐라! 그러면 그것이 선하게 쓰임받을 때에 기적이 된다!' 라는 멧세지가 사실은 원칙적인 멧세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이 그러 한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의도한 바가 무었이겠습니까 본문이 오병이어를 등장시킨 것은 없 는 가운데서 무었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복 음 사역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는 사역에 있어서 적어도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타나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잘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사건적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사역을 사건적으로 다 루시기 보다도 인간들, 즉 한 인격체들을 대상으로 하여 다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제자들을 끌어 들임으로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자들 을 상대로 하여 말씀하시고 이 일에 관계하도록 하시는 것은 특수한 전문인을 뽑아 서 세우기 보다도 평범한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일하시는 주님을 보여주고 있으 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믿는 자들 중에는 특수한 일꾼들을 뽑아 내는 것을 상당히 좋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원래 의도한 것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것이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서 오병이어의 사건에 제자들을 도입 하시는 것은 그들이 남다른 능력과 수완을 갖춘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 려 여기서는 실제로 필요한 일에 있어서 제자들이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하챦은 것인가 하는 것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근거라도 되게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끌여 들이는 것이 아닌 것입 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던져주는 멧세지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본문 에서 얼마나 많이 강조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빌립이 이렇게 대답 합니다. 본문 7절에서;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이 이렇게 대답하자 본문 8-9절에서;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 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에 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보리 떡 다섯 개 와 물고기 두마리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보잘 것 없는 것을 사용해 주 시는 것입니다. 그냥이라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황송하게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 사람들에게 원대로 주시니 원대로 먹고 배부른 후에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가 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크게 이익을 본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제자들입니 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기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깊숙히 보고 체험한 이들이었습니 다.

관중의 입장에 있었던 것과 이 문제를 놓고 직접 의논하고 걱정을 한 제자들의 입 장은 아주 다릅니다. 제자들 쪽에서는 배부를 뿐만 아니라 나누면서 기쁨도 맛보고 실지로 이 사건이 가졌던 기적성에 대하여 깊숙히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렇게 굳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행하 실 때에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은 제자들로 부름받는 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싶어서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름 받는 제자들은 그들이 남다른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 아니라는 것도 거듭 확인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한 교회에 목사가 있고 장로 가 있고 집사가 있는 것은 우리보다 그 직분자들이 낫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생각입니다. 모두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먼저 믿었기 때문이요, 먼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 받은 것을 가지고 남보다 낫다고 자랑 할 건덕지를 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그 특성상 그렇게 내세우고 자랑할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랑하고 내세우기를 좋아하느냐 하면 거저 받은 은혜를 가지고도 자랑하고 두고 두고 국물을 울궈 내려 하는 족속들입니다.

우리는 단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먼저 은혜를 받았기에 그 분으로 부터 흘 러 나오는 양식을 먹고 배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것을 나누어 주는 자 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로 말미암아 이 양식을 나눠 먹는 이들이 들어와 그 들도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이 한 일이 무었이냐 하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가진 것을 꺼내 놓은 자도 아니었으며, 가진 것으로 일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 식을 공급받고, 그것이 너무 풍성하였기 때문에 남에게 넘겨 줄 수 있는 자리에 있 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거저 받아서 넘겨주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자 들의 이같은 봉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그리스도에 게로 들어오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어떤 면에서 더 갖고 있다거나 더 실역이 있다거나, 더 능력이 있다고 볼 수 는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 을 보게 되기 까지는 아무것도 그 필요를 해결할 없었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사실을 강력한 대조로 우리에게 각인 해 주고 있습 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하게 새겨 주십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의 전능하심에 비하여 우리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느냐 하는 사실을 짚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 믿는 자들에게 능력이 나타남을 나타내 주십니다. 그러나 그 능 력은 천부적이고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능력 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이시 며 우리는 오직 그것을 누리는 자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서 나누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과분한 대접을 주님께로 부터 받는가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눅22:28-10절을 보시면;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렇게 제자들은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나라를 맡기신 것같이 이제 제자들이 그 나라를 맡습니다. 이 복음 사역과 하 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모든 책임 뿐 아니라 거기서 누리게 될 영광 까지도 그들에 게 약속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부분에 가서 조금은 이상한 이야기 가 나옵니다. 눅 22:31-34절 까지를 읽어 보시겠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 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이상한 말이 앞 뒤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앞에서는 그렇 게 큰 축복을 약속해 놓고서는 바로 그 뒤에서 처절하리만큼 비참하게 전락되어 버 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사건이 제대로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없습니까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이 말씀은 이미 예쑤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을 알고 계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아 주시지는 않고 처절하리 만큼 비참하게 전락되도록 방치하시는 것입니다. 그 러면서 한마디 무었이라고 덧 붙이시는가 하면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사건 만큼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것 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대사도가 되기 위하여 걸어야 하는 모든 길 중에서 가장 큰 길이 무었이었느냐 하면, 그것은 인간이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가를 뼈에 아로 새기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대사도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달 할 수 있는 능력있는 대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 은 그 능력이 자신에게서나 자기가 가진 보리 떡 다섯 개나 물고기 두 마리에 있지 안았음을 깊이 확인하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크게 위인으로 꼽는 모세나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위인 됨이 어떤 남다른 조건을 갖추었을 것 이라고 보는 과오를 잘도 저지릅니다.

우리가모세를 이야기 할 때에 종종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모세를 보라! 역시 뭔 가남다른 데가 있다. 40년간 왕궁에서 모든 정치. 군사. 경제. 사회에 관한 것을 왕자로서 훈련를 받고, 그 다음 40년간은 영적으로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받고,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이 서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위 대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조건들을 부지런히 찾아 나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오히려 훨씬 꺼꾸로 말합니다. 성경은 비록 그가 왕궁에서 40년 동안을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결국 무용지물이 었다고 말씀합니다. 공연히 자기의 혈기로 한 사람을 쳐 죽인 사건으로 인해 도망 간 것밖에는 그 40년의 배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나라도 못 구하 고 애급의 관원 하나를 죽인 것이 40년 세월의 전부였습니다. 40년의 교육이 미디 안 광야로 가서 양치기로 뭍혀 사는 신세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다시 미디안에 서 40년을 보내니 이제 그 나이 80 세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멧세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인간이 보기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 는 강력한 멧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른 지팡이로 많은 역사를 이루십 니다. 이것은 비록 마른 지팡이 같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멧세지입니다.

 그러며 사도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대사도가 되어서도 끝까지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무었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나 는 만삭되지 못한 자"라고 스스로를 낮춥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겸손을 나타 내기 위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바울이 하나님을 향하여 갖고 있던 잘못된 열심이 오히려 스데반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인하여 후에 회심한 바 울은 평생을 그 현장을 기억하며 괴로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가지고 가장 종교적이요 가장 하나님 편을 들었다는 것이 고작 그리스도를 핍박한 일이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라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는 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뼈저리고도 처절한 경험이 그로하여금 자기가 가진 것을 꺼내 놓 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도무 지 무었이라도 꺼내 놓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었이냐', '네가 무었을 할 수 있단 말이냐'라고 성경은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가진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쓸모없니 좌 절해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마28:17-20절을 보십시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 라사대 하늘과 땅의 권새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 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 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그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명하 십니다.

옛날에 어명을 받들고 온 전령자가 오면 비록 그 어명을 받들어 온 자가 하챦은 직위의 사람일지라도 어명 앞에서는 임금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큰 절을 하고난 다 음 무릎을 꿇고서 정중히 두 손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로 더 불어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마28:20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걱정하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낮아짐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의 높은 권세와 권위의 그 당당 함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되는 문제 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권세와 권위와 더불어 보냄을 받았을 뿐이지 우리로부터 생명이 나가거나. 우리로부터 진리가 나가거나, 우리로부터 어떤 일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꺼내 놓은 것을 가 지고 일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왜 헌금은 받느냐'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것 가지고 무었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물론 헌금이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낸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그것은 돈이라기 보다, 여러분이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이며 필요한 것을 위하여 여러분이 낸 헌금으로 다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위하 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절대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 적어도 우리가 최소한의 것이라도 내 놓아야만 하나님이 일하실 줄로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에 우리를 끌여 들이시고 우리가 낸 것을 받으시는 것은 "우리는 똔이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 다!'라는 고백을 받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꿇어 덮드려 고백하기 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 는 것을 인정시키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디서 신앙의 상당한 손 해를 보고 들어가느냐 하면 '모으자, 모으자'하면서 오병이어를 모으는 것에서 실 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 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을 내게 하시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그런 뜻이 없 습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행위는 바로 '우리는 돈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것은 우리에게 필요없는 것입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그 헌금에는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가장 필요한 분이 계신다면 바로 '하나님! 당신입니다!' 라는 고백이 헌금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에 게 있어서 최고로 필요한 분은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과 이삭 중에서 선택을 하라면 무었을 선택을 하겠느냐 하는 신앙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하나님 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택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정리해야 하 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옴으로 교회가 이익이 되리라고 생각하십이까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무었이 크게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교회로 불러 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극히 크신 사랑으 로 여러분을 훈련시키시고 키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있어서 제자들은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을 이 사건에 개입시키시는 것입니까 사실은 제자 들도 다른 관중들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거저 주는 것을 받아 먹기만 하 면 그만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기어이 이 사건에 부름을 받 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을 가까이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지게 하시는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를 키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무슨 일을 맡기든지 거절하지 말고 하십시오! 그것만큼 축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을 안 시키거든 제발 날 일 좀 시켜 달라고 조르십시요!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오천명 의 관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떡을 직접 주님의 손으로부터 나누어 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십시오! 이 기쁨을 여러분이 친히 보고 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로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르셔서 그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시키시면서 우리를 키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행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최고의 목표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을 배불리고, 하나님 앞에서 항복을 시키시며, 늘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만족하여 찬송부르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불러 내신 것입니 다.

여러분이 와서 교회에 도움이 되는 문제라면 여러분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와서 유익이 되려면, 부족하다고 느끼는 만큼, 소용 없다고 느끼는 만큼, 여러분은 더 많이 하나님께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이 이러한 진실들을 확 인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왜 도망을 가십니까 관중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형편 없고 부족한데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엄청난 사역에 우리를 끌 여 들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도 주님을 우리를 향하여 사랑하시며, 우리를 향하여 그 크신 능력으로 간섭하시는 기적들을 맛보고 항복하는 일들이 풍성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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