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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훼가 나의 목자시니(2) (시 23:1-6)

첨부 1


Ⅲ. 본문의 구성(composition) 과 본문의 유형(genre)

이제 시23편 본문의 구성과 유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학자들은 그 강조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의 운율 meter, 은유 metaphors, 사상 ideas 을 시23편 해석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리고 그 해석의 초점은 시의 흐름을 목가적으로 서술하는 데 있었다. `목자가 되시는 야훼 하나님'이라는 은유는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게 읽혀졌었다. 하지만 이런 해석만으로는 시23편의 세계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본문이 어떻게 쓰여져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의 `편집과 그 구성에 대한 연구' redactional-compositional studies 는 이래서 요청된다. 성서본문의 편집을 가능케 한 문학적 장치들을 언어적, 문법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이 지닌 예술적인 짜임새 artistic texture 를 분석함으로, 현존하는 본문의 구조와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편찬 compilation 과 구성 composition 이란 용어에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전자는 '글 모으기'이다. 반면 후자는 '글쓰기'이다.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인 편집비평이 전자에 머물러 있다면, 최근의 성서해석은 그 노력의 지평을 후자로 확장하고 있다.

시23편 본문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무엇보다도 본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칭의 수, 호칭의 변화이다. 우리말 성서는, 개역성서이든 표준새번역성서이든, 이 변화를 쉽게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서 필자의 사역을 다시 읽어보자. 필자의 사역은 이런 아쉬움을 개선하고 있다. 먼저 본문은 `나'라는 시인이 하나님을 `야훼'로 부르면서 시작된다 (1절). 이어지는 구절은 `그' (3인칭 남성 단수)로 불리어지는 하나님과 `나'라는 시인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2,3절). 그러다가 `나'라는 시인은 하나님을 '당신' (2인칭 남성 단수)라고 부르게 된다 (4,5절). 이 `당신'이란 호칭은 인칭대명사로 [아타], 인칭어미로 (4절 후반절, `당신의 지팡이', ``당신의 막대기'), 동사의 주격어미로 거듭 반복되고 있다 (5절, '당신이 …을 차려줍니다,' `당신이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다가 `나'라는 시인이 하나님을 다시 `야훼'로 부르면서 본문은 마감된다 (6절). 「야훼와 나(a)-그와 나(b)-나와 당신(b')-나와 야훼(a')」라는 흐름이 교차대구적 chiastic stru cture 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이같은 호칭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게르스텐버거 E.Gerstenberger 는 이 변화를 예배의식의 흐름에서 살피려고 한다. 물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식도 묵도-찬송-기도-설교-찬송-축도 순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게르스텐버거 식의 해결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본문 속에 나타나는 인칭의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차라리 이런 변화 이면에 말/용어의 변화 자아내는 정황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하리라. 3인칭으로 대변되는 서술이 2인칭 고백, 곧 기도의 언어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인칭/호칭의 변화 속에 주제와 동기 motif 의 변화도 a-b-b'-a'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목자 되신 야훼 (1절)-a
인도해주시는 하나님 (2,3절)-b
힘을 주시는 하나님 (4,5절)-b'
집 주인 되시는 야훼 (6절)-a

이때 `야훼, 나의 목자' ([야훼 로이]1절)와 `야훼의 집 ([베트 야훼] 6절)에 살려는 나'는 a와 a'의 중심용어이다. 그리고 `인도하십니다' ([나할] , 2절 하반절 ; [나하]3절 하반절)와 `힘을 줍니다' ([나함], 4절 하반절 ; [다셴] 5절 하반절)는 b와 b' 요소를 형성하는 중심술어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본문의 서두 (`나는 부족함이 없다')가 본문의 대단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를 것입니다')에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족함이 없는 삶'이 종내 '대단히 충족한 삶'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둘 다 [샬롬](sufficiency!) 의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전자는 그것을 수사학상 부정적으로, 후자는 강한 긍정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글의 양식 form 을 기준으로 해서 살펴보아도 본문의 교차대구적 구조가 드러난다. 신뢰의 확인 (a:1절)-3인칭 서술/고백 (b:2-3절)-2인칭 고백/기도 (b':4-5절)-서원의 확인 (a':6절)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히브리어 시가 지니는 단어, 구절상의 평행만이 아니라, 그 평행과 더불어 개진되고 있는 주제상의 리듬을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리듬이 점차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뢰의 확인'에서 출발한 시가 `3인칭 서술'과 `2인칭 고백'을 거쳐 결론적 `서원'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은 시23편이 강한 응집력을 지닌 문학 작품임을 부각시킨다. 본문은 외적 연결 속에 내적 흐름을 각인 시킨 시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히브리 시문학의 특징인 글, 단어, 구절의 외적 평행귀 parallelism 와 `생각의 리듬' thought rhyme 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주제의 흐름이 내적 평행귀로 연결되고 있다. 시23편 본문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호칭의 변화, 단어의 반복, 소재의 연결, 주제의 발전 등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시23편 본문의 각 단원은 교차대구적 틀 속에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다음은 지금까지 설명한 시23편의 구성을 도식화한 것이다.

"야훼가 나의 목자시니":시23편의 구조

Ⅰ. 신뢰의 확인 1
A. 긍정적 명제:`야훼는 나의 목자' 1a
B. 부정적 명제:`부족함이 없다' 1b
Ⅱ. 고백 2-5
A. 3인칭 고백 2-3

1. 인도하심에 대하여 2
a. `풀밭에 누이시며' 2a
b. `잔잔한 물가로' 2b

2. 새롭게 하심에 대하여 3
a. `영혼을 새롭게' 3a
b. `의의 행로로 인도' 3b
B. 2인칭 고백 4-5

1. 인도하심에 대하여 4
a. `죽음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4 a
b.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4b

2. 새롭게 하심에 대하여 5
a. `상-먹거리를 베푸심' 5a
b. `기름부음으로' 5b
Ⅲ. 서원/희망 6
A. 확신:`선하심과 인자하심이' 6a
B. 선언:`야훼의 집에서 살으렵니다' 6b

시23편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 글인가 전통적으로 성서학자들은 시23편을 `신뢰의 노래' song of confidence 로 생각해왔다. 문체, 언어, 구조, 은유가 찬양 hymn 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시에 탄식이나 탄원 투의 말이 없다는 점, 원수에게 퍼붓는 저주가 없다는 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도움을 갈구하는 청원이 없다는 점이 이 시를 탄식시 lament 로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찬양에의 초대, 하나님의 행적에 대한 찬양, 소원과 바램등이 없다는 것은 이 시가 단순히 찬양시 song of praise 가 아님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을 목자도, 주인으로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 친교를 확인하는 주제와 소재가 본문에 시종일관하기에, 본문의 그 어느 시보다도 `신뢰의 노래'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물론 우리들 중에는 시23편을 기도문으로 보려고 하기도 한다. 본문에 사용된 고백 confession 과 기도 어투 (2인칭 단수로 호칭되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가 그런 추측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뿐만 아니라 개인 탄식시 자체가 예배 기도문 liturgical prayer 인 것을 감안한다면, 시23편을 크게 보아 '신뢰의 기도 prayer of confidence 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세분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보호를 노래한 기도'이거나, 아니면 구원받음을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의 기도일 수 있다.이 모든 견해는 시23편은 시139편과 같은 '심리적 명상의 부산물' extension of the psychological meditation 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시23편은 정녕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 서술이나 비인격적인 묵상은 아니다. 야훼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심리적 명상물은 더욱 아니다.

시23편은 베스터만 C.Westermann 이 주장했듯이 개인탄식시 Individual Lament 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이 시는 부당하게 고발당한 의인의 기도이다. 지금까지 단정해왔듯이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읊어지고 있는 찬양과 기도가 아니다. 본문 속에 쏟아지고 있는 신뢰의 노래는, 그것의 원조가 되는 탄식시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극심한 위협의 현존 속에서 불려지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를 다니는' 인생 한가운데서 시인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품 속에 던지고 있다! 시23편 4절에 `원수'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원래 시편의 신뢰가 탄식에서 반어법적으로 터져 나온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시23편 6절의 서원도 `청원' petition 의 변형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시23편의 서두에 나오는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선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목자란 칭호가 왕이나 지도자를 가리킴은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주전 3천년 전부터 익숙했다. 신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도 그 속에는 왕 되신 신이라는 전승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서도 야훼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미4:7 ; 시74:1 ; 95:3 등). 그런데 시23편은 이런 것들과는 구별되게 목자가 집단적인 존재 (나라, 민족, 사람들)나 지리적인 영역 (왕의 통치지역으로서 특정한 땅)과 연관되지 않고 개인과 관련되어 있다 (비교. 창48:15). 그 개인이 나중에는 목자 되신 하나님의 집에서 머무르려고 한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영원히 말이다. 목자란 이미지가 한 개인에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23편은 개인 탄식시에서 우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 speech to God 이 된다.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는 탄원' appeal to God 의 변형이다. 시23편은 탄식 중에 외쳐지는 신뢰의 노래다. 시23편의 목가적인 분위기는 고난받는 자가 창조주 하나님께 손을 뻗는 행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피난하는 삶 ! 거기에 구원과 치료가 있다.

Ⅳ. 본문의 삶의 자리 Sitz-im-Leben 와 의도

시23편이라는 `탄식 중에 외쳐지는 신뢰의 노래'는 하나님께 무엇을 털어놓고 있는가 그 속에 담긴 신뢰와 고백과 확신과 서원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위에서 우리는 본문의 구조, 유형과 관련된 해석상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그 기도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확인할 차례다. 성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성서본문이 어떤 정황에서 쓰여졌는지를 세밀히 묻는 노력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누가, 어디에서, 왜 이 시를 썼는지를 물어야 한다.

누가, 어디에서 이 시를 읊고 있는가 얼마 전 프리드만 David.N.Freedman 은 시23편이 출애굽-광야유랑-가나안정착으로 이어지는 전승에 뿌리를 둔 이스라엘의 신앙을 나타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주전 6세기 포로기 시대에 나타난 익명의 시인이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을 기대하며 읊었다는 것이다. 시23편에 광야유랑과 땅에의 정착이 중심 언어로 새겨져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리드만의 주장을 따른다면 이 시는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노래' song of passage 가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룬드봄 J.R. Lundbom 도 시23편을 '유랑 중에 부르는 노래'로 이해한다. 다만 다른 점은 이 시의 배경을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났던 다윗이 피난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부른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시23편은 시3편과 내용상 대칭을 이룬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시의 연대 결정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의 연대를 어느 특정한 때로 결정지을 수 없다.
이 시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읽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시23편 6절 ("야훼의 집에서 나는 살으렵니다")의 해석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관건이다. 시인은 '야훼의 집에서 살겠다'고 서원하는 자다. 아니 '야훼의 집에서 살게 해달라'고 탄원하는 자다. 그가 누구인가 제사장인가 본문 6절의 서원이 본래 탄원에서 비롯된 양식이란 분석이 제사장을 그 주인공으로 여기기에는 곤란하게 한다. 그렇다면 예배 용어로 표현된 어떤 은유나 신비적 영성을 가리키는 것인가 탄식시의 원수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은유적으로 해석하기는 곤란하다. 시23편은 글의 형식상 크게 둘로 나뉘어지는 것을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바로 야훼 하나님을 3인칭으로 언급하며 털어놓는 서술/고백 (1,2-3,6절)과 그 하나님을 2인칭으로 하여 이야기하는 고백기도 (4-5절)가 그것이다. 이 네 단위 (1,2-3,4-5,6절)가 수사학적으론 교차대구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과, 구조상으로는 신뢰의 확인(1절)-고백(2-5절)-서원(6절)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관한 (또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글의 의미상 기도에서 탄원으로 옮아가고 있음에 주목하자. 탄원시의 전형적인 구조, 즉 시인-원수 (여기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하나님이 거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시인(본문에서 '나')이 야훼 하나님을 `당신'(2인칭 남성 단수, [아타])이라고 부르면서 고백하는 틀 속에, 시인이 쫓기고 몰리는 상황이 암시되고 있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다. 그는 먹지 못해서 기진맥진해 있다. 그는 종내 야훼 하나님의 집에서 살아야 될 처지의 사람이다. 야훼의 집에 거한다든 것은 단순한 식객 노름으로 그치지 않는다. 거룩한 곳, 성소에서 피난처(도피성)를 발견한 자의 확신을 노래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야훼의 집이 감당하는 기능이 중요하다. 그곳은 제의적 의미에서 예배드리는 공간이다. 동시에 그곳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무고한 자가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 도피처이다 (출21:13-14 ; 신4:41-43 ; 19:1-13 ; 수20:1-9 ; 민35:9-28 ; 비교. 왕상 1:50-52 ; 2:28-34).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가난한 사람들, 특히 세금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해질 엄한 형벌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가 성전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시23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의 추격자를 피해 도피처를 찾은 한 이스라엘 신앙인의 노래가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하고 사회적인 지배자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자신들의 권리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걱정해야만 하는 약자, 박해받는 자를 편드시는" 주님이 되신다. 시인은 왜 하나님께 도피하는가 물론 하나님은 시인과 그의 세계를 속속들이 인도해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전은 그에게 생존을 약속하는 보호막이다. 하지만 성전으로 피난처를 삼는다는 것에는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시인은 의의 행로로 이끌어 주셨기에,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야 바른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23편이라는 신뢰의 노래 속에는 이스라엘 시인이 경험하는 정의의 하나님 이야기가 진솔하게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집은 박해자를 피해 사는 약자의 보호처 shelter 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집은 무고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고, 최후의 법정 court 이다.

Ⅴ. 설교를 위하여

우선 본문 주제의 흐름부터 살펴보자. 시23편의 시작은 `목자 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부터이다. 이 고백은 특히 본문 1-3절을 하나로 묶는 중심 소재이다. 이 때 목자 되신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시인을 의의 행로라는 좁은 길로 이끄신다. 넓은 길이 아니다. 편안한 길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시인이 4-5절에서는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에서만 새 힘을 얻는다. 하나님이 차려주시는 상을 받고서야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셔야 새 힘을 얻는다 (5절).

`죽음의 그림자,' `위험,' `지팡이,' `막대기,'는 지금 이 시인이 절박하게 쫓기는 상황에 몰려 있음을 암시한다. 무엇보다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를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그것을 암시한다. 시인의 희망은 성전이다. 성전만이 그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다. 성전에서만 `좋은 것'과 `사랑스러운 것'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무고하게 고난 당하는 자다. 좁은 길, 의의 길을 따라 걷다가 죽음의 계곡까지 다다르게 된 자다. 그가 지금 고발당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이 시인을 판단/재판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지식의 신' 시23편은 `고발당한 자의 기도' das Gebet der Angeklagten 인 것이다.

두번째, 시인은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시기에 나는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소리친다(4절). 시인이 어디로 가든지 그는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이 암시되고 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또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고백이 거기에 있다. 야훼 하나님에게 시인의 일상 생활은 낱낱이 인도되고 있었다. 그의 실존은 처음부터 하나 하나 야훼 하나님께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니다. 시인과 아무런 교제가 없는 전적인 타자(他者)도 아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알고 계신다. 시인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소리가 아님에 주목하라!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훤히 아시고 (시94:11 ; 비교. 욥23:10 ; 잠24:12), 마음의 계획을 살피고 계시며 (시44:21 ; 요31:6 ; 시40:10[9] ;렘12:3), 사람이 야훼를 사랑하든지 안하든지간에 우리를 시험하고 계신다 (신13:4 [3] ; 비교. 신8:2 ; 삿3:4 ; 대하32:31).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호받고 판단 받을 근거가 된다. 환난 날에 그가 우리의 도피처가 되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세세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1:6 ; 8:4 ; 31:8; 37; 18[7]; 144:3). 하나님이 우리를 낱낱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의 확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진실함을 입증해 주시는 '최고 재판관' the judical champion 이시다. 그러므로 시23편의 하나님 이야기는 하나님 정의 신학 theology of Justice 을 구성하는 한 장이다.

셋째, 하나님의 집이 감당하는 기능에 대한 깨달음이다. 시23편 6절은 지금까지 살핀 1-5절에 대한 결론이다. 지금까지 밝힌 고백(1-5절)에 근거해서 그가 하나님을 찾는 참 이유(6절)를 털어놓는다. 이때 1-3절이 하나님과 기도자의 관계를 신앙고백과 신앙긍정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4-5절은 시인과 원수와의 관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절규와 탄원을 기도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원수에 대한 언급(4 전반절, 5 전반절),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확인(4 후반절, 5 후반절), 서원(6절)은 본문이 드러내는 탄원문의 전형적인 요소들이다. 그렇지만 시인이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은 내용상 하나이다. 즉 "나를 야훼의 집에서 살게 하소서" 뿐이다. 이 때 야훼의 집은 이 시인에게 있어서 단순한 예배 처소가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법정이요, 도피처이다. 예배처소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경험되고 실험되어야 한다. 예배 처소에 약한 자, 가난한 자, 무고한 자의 고백과 감사, 찬양과 탄원이 들려지고 응답되어야 한다.

넷째, 시23편의 증언에 대해 신약성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시23편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목가적으로 고백하는 교리가 아니다. 시23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신앙인을 해부한다. 아무리 세월이 악해도, 그 악한 세월이 아무리 시인을 우겨 싼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 '나'를 보호해주시리라는 신념이 토로되고 있다. 로마서 8장 31-39절의 말씀-"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은 바로 그러한 시편의 케리그마를 교회에 실현하는 말씀이다. 시편의 시인이 당한 문제는 사실 확실하지 않다. 그가 대적하여 부르는 '원수'는 실상 모든 괴로움/악을 다 포함하는 함축적인 용어이다. 시인의 아픔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왜 내게 이런 괴로움/악이 닥쳤는지를 묻는 외침이 시인의 아픔이었는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시인은 괴로움/악이 자기를 짓누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숨어버리심' eclipse of God 을 결코 겪지 않는다. 그의 모든 것은 그런 암울한 시절에도 하나님이 철저히 함께 하신다고 확신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니 그에게 하나님의 집은 자신의 세상살이의 시비를 가려주는 최후, 최고의 법정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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