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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떼를 구원하시는 목자 (슥 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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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9장 전반부에서도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만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해 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장면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주전 323년에 33세가 채 되지도 않았을 때 요절했습니다.
그가 말라리아에 걸리고 술 취하고 몸에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역사는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되어 희랍 제국은 삼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희랍은 세계를 지배하는데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던지 가는 곳마다 도시를 세우고 특별히 애굽에는 알렉산드리아고 하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심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이지만 알렉산더 때문에 구약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이 나오게 되고 그 후에 온 천지에 헬라 말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유익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셨습니다.
알렉산더 죽은 후에 유다 지방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하는 사람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 삶은 주전 175년까지 유다지방을 점령하여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악질인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올림프스 제우스 신전을 세워 놓고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강요하고 뿐만 아니라 돼지를 잡아 돼지 피를 발라서 제물을 삼았습니다.
또한 안식일을 폐지하고 할례를 금하며 예루살렘 성정 지하실에는 희랍의 체육 시설을 만들어 놓는 등 무시무시한 일들을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11장 31절과 12장 11절에는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 성전 한복판에 제우스 신전을 세워 놓고 예배를 드리던 그 날, 성전은 캄캄한 밤이 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온통 통곡으로 물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던 주전 167년 12월 25일의 일이 예언으로 기록이 되었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이방 사람들이 성전에 와서 이방 신을 섬기게 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서북방 지역에 있는 한 도시의 제사장인 미타티아스라고 하는 사람이 뛰어나와 독립운동과 자기들의 신앙 운동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 다섯과 아들을 따라온 독립군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유대의 독립과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위하여 게릴라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몇 명되지는 않았지만 율법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결사적인 전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타티아스는 죽게 되고 그 셋째 아들인 유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유다의 본 이름은 유다 마카비우스인데 마카비라는 말의 뜻은 두드리는 헴마, 망치인데 마카비의 다섯 형제의 얼굴 모양이 망치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마카비입니다.
어쨌든 이들이 유대 민족의 원통함과 분노를 대신해서 안티오쿠스와 대항하여 싸우므로 드디어는 이스라엘 회복하게 되었고 성전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놀라운 일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주전 63년,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올 때까지 독립을 이루고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를 드리는 열매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70년에 디도 장군의 침략으로 로마 군대에게 점령이 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마카비 형제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에서 도망을 쳐서 남쪽의 사막 가운데 있는 마사다산으로 들어가 마지막에는 자결을 하는 사건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유대 민족은 지금도 독립 사를 쓰는 가운데 마카비 운동을 가장 중요한 역사로 적고 있으며 또한 마사다 사건은 소설로 심지어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9장 11절 이하는 바로 이 마카비 시대의 예언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1.마카비 시대의 예언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슥9:13)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양떼들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부터 구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14, 15절에는 군사적인 용어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유다를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활로 삼아서 시온의 적들에게 활을 당기는 전사로 나타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용사의 칼과 같게 하신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당해 낼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네 자식’은 이스라엘, 시온의 백성이며 ‘헬라 자식’은 그리스 사람들, 헬라 문화에 충성하는 사람들로서 율법에 충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비록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이지만 충성한 그들의 운동이 유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에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도 이 마카비형제에 속한 열심 당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나 성경 연구를 통해서 볼 때에도 근거가 없는 학설입니다.
다음으로 14절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유다 만 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번개도 화살같이 번쩍이게 하시며 천둥을 나팔 소리같이 우렁차게 하여 저항할 수 없는 군대를 갖는다고 하십니다.
남방에 회오리 바람이 분다고 하는 것은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더이상 고통 당하는 것을 묵과하시지 않으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자기의 영광이 찬탈되고 성전이 망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더 이상은 보이지 않으시며 그대로 눈을 감고 계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어서 15절에는 피비린내 나는 정복, 무섭게 피흘리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승리와 평화의 예언

승리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승리하시고 더불어 평화를 주십니다.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1).이스라엘의 구원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슥9: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양떼같이 구원하십니다(16절).
구원은 마카비 형제들의 열심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전사와 사자는 이제 더이상 전쟁하는 전사, 무서운 사자가 아니라 목자와 양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목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양을 물어 간 이리를 향해 달려들어서 다 삼키워진바 된 양의 뒷다리 하나를 잡고서 이리의 입을 찢고 목속에 들어가 있는 양을 끌어내십니다.
가을 나무에 잎이다 떨어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하나의 잎새와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 인간적으로는 완전 절망이요 도무지 소망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사 없는 그런 캄캄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양떼같이 구원하신다고 하는 말씀이 곧 복음입니다.
이 말씀 하나가 우리에게 복음이며 하나님 앞에 복음입니다.

2).이스라엘의 번영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슥9:16)

구원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또한 영광을 주십니다.
우리의 행한 대로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도 없는 죄인들인데 하나님께서는 면류관의 보석과도 같은 영광을 주십니다.
이간은 하나님이 올려 주셔야 올림도 받는 것이고 끌어 주셔야 올라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3).이스라엘의 영광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슥9:17)

17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고 절기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기쁨을 갖게 되어 “그의 형통함과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찬송하였습니다.
이것은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받을 만한 자격도 없고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리하리로다’는 영광과 기쁨을 말합니다.
만족과 환희의 세계가 열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닫혀지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가슴을 치던 유대 민족들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누리고 환희의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조화와 질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조화와 질서가 있는 세상, 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조화로운 인격을 갖추고 질서 있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모습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시는 은혜를 충만히 받아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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