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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수아의 대관식 (슥 0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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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메시야의 예표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슥6:11)

본문은 스가랴가 본 아홉 번째 환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오는 백성들의 대표자가 가지고 오는 은과 금을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는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유대인 대표들은 성전을 재건하려고 바벨론에서 은과 금을 가지고 왔는데 그들은 그것으로 면류관을 만든 것입니다.
이 면류관을 여호수아가 쓴 것은 여호수와의 왕됨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호수아에게 왕직과 대제사장직, 두 가지 직분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메시야가 오시는 예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왕도 되시고 제사장도 되시고 선지자도 되십니다.
뿐만 아니라 스가랴서의 모든 환상은 메시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서 구약 성경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두가 메시야를 향해서 집중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부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스가랴의 환상은 단순히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전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기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대표자가 네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 네 사람의 이름은 헬대, 도비야, 여다야, 요시아로 10절과 14절에 나옵니다.
헬렘은 강하다 헬데는 건강하다는 뜻으로 비슷한 말이 됩니다.
다음으로 도비야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직도 힘이 빠진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다야란 하나님이 아신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금 힘있는 사람이 자기 친척이 되거나 하면 아무개가 우리 외삼촌이고 아무개가 우리 사돈의 팔촌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 이름을 자꾸 내세웁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누가 우리를 보고 내가 너를 알아준다고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마지막으로 요시아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이 됩니다.
요시아라는 사람은 나중에 헨 이라고 이름을 바꾸므로 요시아는 헨과 같은 사람입니다.
헨은 히브리어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세우신다는 뜻이 됩니다.
헨의 아버지는 스바냐인데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어 세우신 사랍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옵니다.
이들의 이름의 뜻을 보면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제 힘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파사의 고레스왕의 힘으로 자유를 얻어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머리에 은과 금으로 만든 면류관을 씌웁니다.
면류관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예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적은 없었지만 마귀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꽁꽁 묶어서 때로는 혈기를 부려서 하나님을 대적하게도 하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게 하여 하나님을 섭섭하시게 도 하고 음탕한 일로 하나님 앞에 버림도 당하게 하며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서 불신의 죄를 범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로 불러 주시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손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셔서 새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의 여망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귀의 손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됩니다.

2.메시야의 칭호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6:12)

순이라고 하는 말은 메시야의 칭호입니다(슥3:8,렘23:5,33:12).
순이란 연약합니다.
마른 땅에 돋아난 그 싹을 사람들은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합니다.
또 땅에 돋아난 그 순을 보고 사람들은 초라하다고 멸시하고 천대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에 마른 땅에 돋아나는 순처럼 오셨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하는 곳에 굉장히 큰 예배당이 지어져 있지만 그 곳 말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하는 장소가 10여 년 전에 발견되었습니다.
그 곳은 동굴인데

2.000년 전에는 그 동굴이 어느 정도인가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 태어난 곳이 마구간이든 동굴이든 말들이 살던 곳임에는 틀림이 없는 곳인데 그 천박한 곳에서 예수님이 비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천박한 데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호화롭게 이 세상을 즐기고 이 세상을 즐기고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비천한데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올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비천한 사람들, 노예들이 모인 곳이 초대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이 흩어져서 전도한 소아시아 지역의 고린도교회나 에베소 교회 또는 서머나교회는 굉장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 그 교회 터에 가보면 작고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게 지극히 작은 곳에서 세계를 불태우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3.왕직과 제사장직의 연합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6:13

평화의 의논이란 평화를 산출하는 의논을 말합니다.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직을 말하며 그 위에 또 제사장이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왕직을 겸직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이 왕이시고 왕이 제사장 되시고, 왕직과 제사장직의 연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제사장으로서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지성소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왕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므로 이 두 가지 직분이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죄 지은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고 하나님과의 전쟁뿐입니다.
죄 지은 사람은 마귀에게 끌려 다니며 고통을 받습니다.
죄 지은 사람만이 아니라 홀로 다니는 사람에게도 평화가 없습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왕되신 예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다스려 주시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므로 평화의 의논이 있고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먼 데 사람이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을 예표하는 말입니다.
먼 데란 지역적이고 공간 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먼 데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죄가 아무리 큰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부름을 받고 메시야 앞에 모여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 안에서 평화의 한 날을 이루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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