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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는 발전한다 (출 12:29-36, 막 1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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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옛것을 지키려고 하는 세력과 새로운 역사를 향하여 나가려는 세력 간에 마찰(摩擦)과 갈등(葛藤)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출애급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급 사건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백여년 동안 애급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자유가 없는 생활을 오래동안 해왔습니다. 애급의 왕조는 이들을 노예로 잡아 두면서 그들의 사회를 건설해 갔던 것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나 수 많은 화려한 건축들이 히브리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노예적 삶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나면 노예가 되어 애급인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애급 사회는 히브리인들의 노예적 봉사를 바탕으로 안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이런 사회 구조를 깨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에 도전을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모세였습니다. 히브리인의 노예적 삶은 정당한 것이 아님을 자각(自覺)한 것입니다. 그들도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쉽게 생각하고 이에 도전했다가 도망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애급에 내려가 히브리인들의 탈출을 지도하였습니다. 모세가 바로를 찾아가서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요구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혁명을 선포한 것입니다. 히브리인이 빠져버린 사회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그 사회의 재조직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혁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가 이런 혁명을 순순히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바로는 이제까지 이룩된 기존 사회구조의 틀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억압된 사회 제도가 올바른 것이 아니며, 히브리인도 자유인으로 살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깨어난 이상 구 체제(舊體制)를 지키려는 세력들은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구 체제를 지키려는 바로의 세력과 여기에 도전하는 모세의 세력은 치열한 대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열가지 재앙은 새로운 역사를 출발시키기 위한 진통이 얼마 컸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이 역사의 변화를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의식화된 히브리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이루시려는 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끝까지 이 혁명을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애급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새로운 역사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발전하지 결코 후퇴하지는 않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해 진행됩니다. 역사란 하나님이 인간들을 자기가 정하신 목표를 향해 이끌어가시는 과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발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그 목표를 향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이 역사의 굴러가는 바퀴를 멈추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 역사의 바퀴에 깔려 희생될 수 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가는 히브리인들을 뒤쫓던 애급 군대가 홍해에 빠져 모두 죽은 것은, 진행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멈추어 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준 성경의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도 바로 이런 역사의 전환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율법 체제 아래 굳어진 유대 사회에 예수님의 출현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가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까지 그들이 안주해 온 율법주의 체제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간들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평등하게 하나님의 통치 밑에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민이라고 자부하였는데,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마귀의 생각이라고 몰아부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율법주의 체제 하에 굳어진 유대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도전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체제가 전복될 위기 앞에서 어떻게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온갖 지혜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들의 체제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까지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구(守舊) 세력은 기존의 세력이기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언제나 거기에 도전하는 혁명 세력들을 분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이 아무리 막강해도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은 사흘만에 무덤문을 열고 부활되셨습니다. 부활은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이 이룩해 가시는 역사의 진행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언해 주는 사건입니다. 율법주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교회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가 이 새로운 역사의 선두에 서서 힘차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가 이 때문에 수 없는 박해와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역사의 물결을 타는 그를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런 역사의 발전을 배웁니다. 로마 캐톨릭이 중세를 주름잡았지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새로운 역사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온갖 협박과 억압을 동원하여 그 역사의 변화를 막으려 했지만 교황의 막강한 힘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때 강대국들이 미개한 국가나 약소국가를 식민지화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어떤 나라도 이런 식민주의를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과거에 식민지 경험을 가졌던 제 3 세계 국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근세사에 있어서도 수구파들에 의해 개화파 세력들이 항상 물러났던 적이 있습니다. 갑신정변(1884년)은 개화파 세력들이 수구파들을 몰아내고자 했던 혁명이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에 의해 구 시대는 물러가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투를 자르면 죽는 줄로 알았던 때가 그렇게 멀지 않은 때인데, 이제는 상투를 튼 사람을 보기가 어렵고 오히려 그것은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윤리적인 면으로 발전하게 마련입니다. 이 역사의 발전을 막으려는 세력은 언제나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공산권에 속한 국가들이 점점 개방정책을 채택하고 민주화 되어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구 세력들이 이를 막고 공산체제를 강화하려는 몸부림도 있습니다. 중국의 자유화 물결이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역사는 발전합니다. 자유가 귀하다는 의식을 깨우친 사람들의 열망을 그 어떤 세력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여러가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열어 보이시려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통찰하면서 그것을 향한 역사의 물결을 앞장 서서 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역사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 그것을 저지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세력들이 정부 안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번에 끝난 본교단 75회 총회는 이상하게도 역사의 변화를 바라보는 결단을 하기보다는 그 역사의 변화를 막으려는 결정들을 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작년(1988년 2월)에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선언문은 민중신학에 근거하였고, '화해와 힘'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데 화해 일변도로 치우친 이상론에 빠졌고, 또한 지나치게 남한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북한의 잘못을 지적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공정성을 잃었고, 희년의 선포는 타당치 못한 것이므로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총회교육부가 발행한 여름성경학교 교재가 문제가 되었는데, 그 주제가 "성숙한 교회와 통일교육"이었습니다. 교단 교재로서는 처음으로 통일 문제를 교육적으로 심도있게 다룬 교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재 때문에 교육부 총무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은 한반도에서 일고 있는 역사의 변화를 바로보지 못한 잘못된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곧 그 변화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오늘의 보수적 결정이 오점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전환기에 섰을 때일수록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변화하는 역사의 선두에 서지는 못할망정 그것을 어리석게 막으려고 허둥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역사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정의롭고 자유로운 역사로 발전해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主管者)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와 깊이 관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가 이룩해 가시는 역사를 이해하고 그 역사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역사에 무관심한 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르러 반드시 무엇을 했는가라고 추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에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이 변화를 막으려고 어리석게 허둥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항상 말씀을 통하여 이 변화하는 역사를 주시하면서 그 흐름을 따라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 시대에 감당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역사는 변화하며 발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며 섭리이며 그의 사역입니다. 누구도 이를 거스릴 수 없습니다. 거스리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시는 역사를 지켜보면서 그 역사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급변하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당황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 변화의 물결을 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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