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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이 베푼 잔치 (에 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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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부터 에스더스를 앞에 놓고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앞으로 몇주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데살로니가서 강해가 끝나고 나서 여름에는 쉬었다가, 가을쯤부터 강해를 시작하려고 계획했었는데, 지금의 혼란하고 급변하는 정세를 바라보면서 성도들로서 어떻게 이 시대와 시국을 바라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당혹해 하고, <나라를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앞에서 죄 지은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또 하루 이틀 철야하고, 금식기도 했다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일들을 자주 볼 때에 그런 열정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무엇인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시대에 대처하는 옳바른 자세가 무엇이며, 진정한 나라사랑이 무엇인가를 말씀 속에서 스스로 찾아 낼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7-8월이 행사가 많고 무더위 때문에 새로운 강해를 시작하기는 좀 무리가 되고, 설교준비를 위해서 시간을 충분히 쓸수 없는 여건이기는 하지만 뒤로 미룰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큰 산에 오르기 위해서 첫발을 내딧는 심정으로 에스더 강해에 임합니다. 부족한 종에게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지혜의 샘을 솟아나게 하시고, 피곤치 않도록 새 힘이 솟게 하실줄 믿습니다.
그리고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무더위에 지쳐서 강으로 산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예배당에 나와서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여러분들에게도 놀라운 은혜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주일 저녁에 에스더서를 공부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시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는 1장을 공부하면서 아울러 에스더 전체에 대한 서론적인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에스더서는 유대나라 사람들이 범죄한 탓으로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약 50-70년 동안 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포로생활이 끝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다룬 것입니다.
고레스왕이 유대나라 포로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성을 수축하라는 놀라운 명령을 내립니다. 이 포고를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지금까지 몇십년 동안 기반을 닦았던 바벨론의 모든 것들을 다 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첫번째 귀한자들은 총독 스룹바벨의 지휘아래 약 45,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십년이 흘렀습니다. 그 몇십년 동안이 지나는 사이에 이 에스더서 기록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나라 사람들 중에서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고, 그들보다 믿음이 좀 약한 사람들이 바벨론 땅에 남아 있었는데, 이 남아 있는 바렐론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 제사장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면서 상당수의 귀환민을 데리고 바벨론을 떠나갔습니다. 그그러므로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에서 얼마 후에 에스라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간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서는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낄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에스라 6장까지는 스룹바벨이 인도한 귀환민들
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가, 그 다음에 7장 부터는 에스라가 인솔한 두번째 귀한민
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더 전체의 이야기는 10년 동안에 걸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서 모르드개가 실권을 쥐고 유대인들을 보호하던 기간을 10년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서에 나타나는 왕은 아하수에로 왕인데, 이 왕은 20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왕후가 된 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메대-바사 그러니까 잘 모르지요.
바벨론이 고레스왕에게 정복 당했습니다. 파사에게 정복 당한 것이지요. 이 파사는 지금의 이락을 말합니다. 그후에도 여러 정권이 교체되다가 하나의 큰 제국이 드디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제국을 소위 메데바사라는 말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페르시아제국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왕은 페르시아제국의 황젭니다.
페르시아나라가 어떤 제국인 줄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동화책에도 많이 등장하는 나라고 말좀하는 사람들이 잘 들먹이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상식적인 그런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왕은 주전 485년 전부터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해서 약 20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야의 역사에서도 상당히 출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룹바벨 총독의 인솔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고 남아 있는 유대인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 대부분이 바벨론세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바벨론에서 자란, 즉 바벨론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그 나라를 떠나서 고국으로 돌아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나중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할 시간이 있습니다만, 모르드개나 에스더 같은 신앙적으로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세속화 되어 가지고 그 땅에 눌러 살기를 원했고, 뭐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생각하지 않을려고 하는 일종의 세속화 된 유대나라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 이들에게 무서운 위기가 닥친 것이 바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것에 비취어 보면 현실적으로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교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누가 썼느냐
아직도 아무도 모릅니다. 어디가서 누가 에스더서를 누가 썼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거야 에스더지요]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런데 에스더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꼭 찝어서 말하라고 하면 에스더서 전체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면에서는 꼭 소설책 같아요. 우리가 오늘 1장을 읽었는데 하나님이 이라는 말을 찾아 보섰어요. 아마 생각도 안하고 읽으셨을 거에요.
그래서 이것 때문에 과거에 어떤 학자들은 에스더서는 성경이 아니라고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경성을 부정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도 [에스더는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비록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역사상 놀라운 일을 성취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좀 부족한 데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지도자의 지도를 받고 바른 해석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말이라고 다 존경하고 무조건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런 논쟁은 없어졌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오히려 에스더서의 매력과 에스더서의 능력과 에스더서의 감화력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들어나는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표면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으시면서 에스더 1장부터 10장까지 전개되는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비구비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안 보인는데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 위력과 그 감화는 도무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영력하게 줄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이도록 나타나셔서 일하는 것 보다도 보이지 않는 면에서 그렇게 엄청나게 일하시는 데 대해서 우리는 더 하나님의 존재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지 아니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이런 부분에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스토리-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에스더서를 말해 줄 것입니다.
섭리가 무엇인지 아세요
섭리는 라틴어 프로비디오라고 하는 말이 섭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라고 하는 말은 전문적인 선수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것-하는 말입니다. 미래에 속하는 것이라는 의밉니다. 그 다음에 비디오는 무엇입니까 보는 것이예요 듣는 것이예요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로비디오라고 하면 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의밉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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