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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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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점진적인 논리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그 당시 헬라사상에 의한 여러 철학사상이 발달된 환경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2.본문은 명절에서 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그 명절은 틀림없이 유월절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은 그 지역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방문하셨다. 그곳이 베데스다였다.

3.그리고 그 날은 안식일 이었다. “명절과 안식일” 무언가 공통점과 유사점이 있다. 성경의 절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축제의 날이라는 점이 비슷하다. 그것이 바로 이 두 행사가 같는 특징이다.

4.그러나 베데스다에 있는 사람들의 형편은 어떤가 그들은 모두가 비참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불구자거나 아니면 불치병의 환자였다. 도저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이라고 즐거워 하였지만 이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안식일도 이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7.온갖 불행을 짊어진 이들에게도 유일한 희망은 있었다. 그것은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이었다. 이것만이 이들의 희망이요, 삶의 목표였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전설과 같은 것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도 없다.

8.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소문들이 헛소문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은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항변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없다면 이들의 삶은 아무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삶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 오셨다.

9.어떤 사람들은 절기를 지키고 안식을 지키면서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참 안식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를 몰랐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베데스다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지프라기라도 잡으려는 간절한 사람들이었다. 오죽했으면 “동병상린”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밀쳐내고 자기 혼자만 연못에 들어가려 했겠는가 그만큼 그들의 여망은 간절했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10.참안식을 모르고 살기에 이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도취되어 있는 사람도 그렇고, 비참한 자신의 운명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이들 모두에게는 참 안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중에서 38년된 가장 비참한 환자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참 안식을 주셨다.

서론

1.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도 질병이 있었을까 물론 병이 없었다. 병은 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병을 주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람마다 병의 종류도 다르다.

2.병이 죄에 대한 형벌로 주어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더 죄가 많다고 할수는 없다. 그리고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 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3.성경에는 종종 병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특히 여러번 병을 치료하셨다. 그래서 예수님 주위에는 언제나 병자가 따라다녔다.

4.지금 우리는 첨단과학의 현대의학으로 병을 치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치료가 안되는 불치병이 있다. 그래서 그런사람들을 전문으로 치료하려는 기도원도 생겨났다.그리고 가끔 가다가 기도원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도 전해지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5.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데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본문

의 말씀을 통하여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서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깨닫도록 하자.

I.모든 병자들은 치료를 원한다(1-4).
A.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다.

1.어느 사회에나 불구자와 병든자가 있게 마련인데, 예루살렘에도 원치않는 불구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던 모양이다.

2.오늘날처럼 의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치료약도 변변치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댈 곳이라고는 민간요법과 전해 내려오는 미신같은 이야기를 의지하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었다.

3.그런 중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끊을 때 그 속으로 제일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치료 받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주위에는 자연히 많은 사람이 몰릴 수 밖에 없었다.

4.하여튼 병자란 병자는 다 모였고, 불구자란 불구자는 다 모여들었던 모양이다. 이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한 이유는 단 하나다. “혹시나”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5.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한 곳이었다.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 모두가 치료받는 것이 아니고 “제일 먼저”들어간 사람만이 치료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더라”하는 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일 뿐이었다.

B.누구나 다 병에 걸릴 수 있다.

1.이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도 그런 병에 걸릴 수 있다는 말이다.

2.만일 내가 그런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될까 베데스다 연못이 어디 있나 하면서 찾아다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3.지금 교회에 나와서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일 우리가 그런 막연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면 그래도 안온것 보다는 훨씬 잘한 일일 것이다.

4.어떤 사람은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몸에 좋다고 한다면 어떤 약이든 닥치는 대로 먹으려 한다. 그래서 외국에서 뱀을 수입하고 개구리를 수입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만큼 아우성이다.

5.신앙을 빙자한 불건전한 기도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가정제단을 찾아가기도 한다.

II.38년된 병자가 있었다(5-8).
A.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1.지금 모든 사람들은 명절이라고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무리들과 함께하지 않으시고 소외된 자들이 외롭게 모여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오셨다.

2.그리고 그 수많은 병자와 불구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주목하셨는데, 그는 38년 동안이나 그곳에 있던 사람이었다. 말이 38년이지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

3.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상항 질문을 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만일 낳고자하는 소망이 없다면 왜 그곳에 와 있겠는가

4.그러나 이 질문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질문이야 말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씀이다. 만일 내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5.다혈질인 사람은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를

향하여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불난집에 부채질하느냐고 항의했을지도 모른다.6.그러나 이 환자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드렸다. 7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 까지 말씀을 드렸다. 현재 그곳에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어떤 기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이야기 였다.

7.그럴수 밖에 없는 것은 치열한 경쟁을 이길만한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B.지금 나의 상태는 어떤가

1.낫기를 원하느냐는 말씀의 의도는 “지금 너의 상태가 어떤지 아느냐”는 질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하셨다.

2.아픈 사람이 낫고 싶은 것이야 두말하면 낭비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왜 뻔한 사실을 물으시냐고 항의할만한 일이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물으시는 이유는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스스로가 인정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다”는 바울의 논리와 동일하다.

4.지금나의 모습은 어떤가 나의 실상이 어떠냐는 말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돼 있지만 그 실상은 어떤가 정말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5.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너의 실제 모습을 내게 말하라.

III.말씀을 든는 즉시 치료가 되었다(9).
A.기적이 일어 났다.

1.이 사람은 연못에 들어가야지만 나을 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연못에 “제일 먼저”들어갈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비 신앙적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수 없는 불행한 세상이다.

2.그러나 이 사람은 도저히 다른 사람과의 경쟁을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걸었던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꿈에도 상상치 못할 일이었다.

4.그것은 이 사람이 주님의 질문에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B.주님은 나도 일으키신다.

1.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쟁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무언가 남보다 뛰어난게 있어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특징이 없다면 살 수가 없다.

2.대학을 나오면 뭔가 될 것처럼 기대를 했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만만치는 못하다. 수없이 많은 경쟁자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3.더군다나 그런 형편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정은 더 비참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기만을 38년 동안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4.하지만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주님이 바로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나에게 질문하신다. “너는 너의 형편을 알고 있느냐”

5.우리는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된다. 주님의 마음을 동하게 하자. 술수와 간계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심과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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