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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당신을 이렇게 다루신다 (신 3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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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을 향하여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마 자신있게 대답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담을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에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마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한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보았고 알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교훈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신뢰하였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 짧은 본문에서 이야기합니다. 세 가지 방향에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는 하나님(9,10절). 둘째는, 우리를 독수리같이 훈련시켜 주시는 하나님(11,12절). 마지막으로는, 우리를 만족하게 먹여 주시는 하나님(13,14절)입니다. 이 시간에는 처음 두 가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보호자 하나님

그러면 먼저 모세가 가르쳐 주는 보호자 하나님에 대해 살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기가 막힌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자기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눈동자를 가지고 계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아마 표현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배려하신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눈동자를 보호하시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참 좋은 하나님입니다. 백번 들어도 좋고 천번 들어도 좋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눈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인간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은 눈을 두는 자리를 특별히 마련하셨습니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잘 부서지지 않는 두개골에 큰 굴을 두 개 파서 그속에다 안전하게 간직해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게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눈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앞을 못보는 사람만큼 불쌍한 없습니다.
눈에 대해 한 두 가지 더 살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 두개골 속 가장 안전한 곳에 눈을 두시고 그 위에 눈꺼풀을 덮어 항상 이물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눈물단지를 가지고 늘 소독을 하여 깨끗하고 윤기나는 눈동자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곳에다 하수도를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눈을 묘하게 만드셨고 소중히 다루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자기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완전무결하게 보호할 것을 보장하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택해서 예수 믿게 하시고 죄 용서 받게 하시고 성령을 그 마음에 모시게 한 그의 자녀를 완벽하게 보호하십니다. 자기 눈을 보호하듯 보호하신다는 데는 다른 말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얼마나 우리 마음이 든든해지는지 모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 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으니 불안한 것이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을 날마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훈련하시는 하나님

다시 한번 성경 본문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모세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독수리 어미에다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자녀를 키워보는 사람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여러가지 다양한 성격을 띄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회초리를 든 아버지의 손길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길로도 나타납니다. 자녀에게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에 두시고 세심하게 생각하시는 그 깊은 애정은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는 것만으로 전부를 다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11절, 12절을 보십시다. 어떤 하나님이라고 합니까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말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대단히 값진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독수리의 이미지를 가진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교련과 체육 선생님이 제일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훈련을 받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훈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훈련을 달가와 하지 않는데도 우리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엄하게 훈련시키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실감있게 이야기 하기 위하여 모세는 하나님을 독수리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성모독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워낙 어리석고 깨닫지를 못하는 존재인지라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짐승에다 비유하시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암탉에다 비유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깨닫게만 할 수 있다면 자기 이미지가 조금 상하는 정도는 크게 우려를 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사실 독수리는 성경적으로 보면 부정한 동물입니다. 만지거나 먹어서도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를 독수리에다 비유해서 우리를 가르칩니다. 너무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히고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듭니다. 아무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곳에다가 둥지를 틀고 자기의 털이나 다른 부드러운 물질로 폭신한 침대를 마련합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르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집은 매우 튼튼합니다. 새끼들은 안심하고 거기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것을 받아 먹으면서 하루 종일 기분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눈만 뜨면 파란 창공이 올려다 보이고 둥지 아래에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집니다. 난공불락의 요새같은 둥지에서 새끼들은 날마다 아무 걱정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들을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11절에서는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새끼들은 갑자기 변한 어미를 보고 어리둥절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계속 펄럭이며 입으로 새끼들을 둥지 가장자리로 마구 밀어내기도 합니다. 새끼들은 어미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보금자리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조류학자의 말에 따르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끌어내기 위하여 폭신폭신한 깃털 침대를 전부 밖으로 물어 던져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바닥이 딱딱하니까 새끼들이 견디다 못해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학설에 의하면 어미 독수리는 가시나무 가지를 보고 그 보금자리에다 집어 넣어 새끼들이 찔리도록 한다고 합니다. 결국은 새끼들이 따뜻한 보금자리에 계속 누워 있었으면 하던 생각을 단념하고 불평을 늘어 놓으면서 기어 나오고 맙니다. 하나님께

서도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 합니다. 대부분이 보금자리 속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행복해. 나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아]하며 꿈같은 세상을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 속에 몹시 불안한 감정이 일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심각한 문제가 개입될 때도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모가 원하지도 않던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날개로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히신다고 판단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몹시 가까이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몸을 묻고 있던 자리에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자기 자녀로 선택해 놓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둥지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끌어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일이 잘 되었다면 두손 들고 예수님 앞에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어지럽히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에 회개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예를 자주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가끔 잠을 잘 때가 있습니다. 독수리 새끼가 둥우리 속에서 태평스럽게 잠만 자듯이 우리가 육신의 잠에 깊이 취할 때가 있습니다. 대개가 세상적으로 형통하면 이런 시험이 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경고하십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육신은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 굴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8:7-8). 가끔 우리는 이러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영적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를 하나님이 깨우시는 날이 옵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날입니다. 흔히들 이것을 [징계]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어려운 시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빠져 있던 자리에서 빨리 나오라고 깨웁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두번은 모두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환경 가운데 있다면 빨리 그 자리에서 나오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 앞에 빨리 나오라는 경고입니다. 잠을 깨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형편을 보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불안한 것도 사실이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안된 것도 사실이고, 신문을 볼 때마다 우울한 기사거리가 가득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불안한 요인이나 가슴 아픈 사연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금자리에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교회가 많은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이웃에 있는 일본처럼 편안하고 돈 잘 벌고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예수 믿고 돌아오는 사람, 타락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자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많은 교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일본을 가본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은 너무나 많은 자들이 세상의 잠을 자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캄캄합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교회 찾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많이 벌고 직장이 안정되면 걱정이 없을 것 같은데 돈많은 그들은 또 다른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일본의 십대들이 왜 그렇게 많이 자살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잘 먹고 즐기다가 그 이상의 무엇을 찾지 못한 청소년들은 정신병자가 되고 나중에는 죽음을 택합니다. 그 일본문화가 우리에게 밀려오고 있습니다.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왜 정신적으로 그렇게 불안합니까 왜 그렇게 안정을 못합니까

왜 그렇게 수면제를 먹어야 합니까 왜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야 합니까 왜 길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합니까 제가 볼 때는 하나님께서 날개를 가지고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섭리라고 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 어디를 가보아도 교회가 있습니다. 밤에는 수없이 많은 십자가 네온이 빛납니다. 우리가 과거 수십년 동안 피눈물나는 형극의 길을 걸어 오면서 좌절을 수없이 당했지만 그런 고난이 우리의 둥우리를 흔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 세계에서 예수를 가장 잘 믿는 나라가 되게 하였다는 사실은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중에서 떨어뜨리시고

독수리 새끼들이 이제 둥우리에서 기어 나오면 어미 독수리는 10피트나 되는 긴 날개 위에다가 새끼를 얹어 고공으로 올라갑니다. 새끼는 잔뜩 겁에 질려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미가 새끼를 사정없이 떨어뜨려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나 죽는다!] 비명을 지르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어미는 공중에서 새끼가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한참 지켜 보기만 합니다. 조금만 지체하면 새끼가 당장 바닥에 부딪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쏜살같이 내려 가서 힘있는 날개로 안전하게 받아 다시금 하늘로 솟아 오릅니다. 이 일을 새끼가 제 힘으로 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시련

하나님께서 종종 이것과 흡사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잔인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에는 어려운 문제가 끊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것은 절대 안들어 주시고 1년, 2년을 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즉시 고쳐 주실 것같은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불평을 그치고 잠잠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요 능력이 없어서 그러실까요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목적을 두시고 공중에서 우리를 반복해서 떨어뜨리시는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회의에 빠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지쳐 버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다루시는 것입니까 높은 하늘을 힘있게 날 수 있는 믿음의 날개가 생길 때까지 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생활이 힘들고 고된 일이 자꾸 반복되면 하나님이 공중에서 떨어뜨리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신없이 추락할 동안 누가 지켜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분명한 두가지 사실

여기에서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두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수리가 그 새끼를 부딪치게 하여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망하도록 방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큰일났구나!]하는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계속 연단시키지만 절대로 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코우만이라는 신앙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 속에서, 가장 큰 시련 속에서, 가장 심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도 그때 그때 필요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그가 직접 나타나셔서 도움을 주셨다]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면 코우만의 간증이 옳다고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소망이 없어 보이는 환경인데도 이상하게 하루 하루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날개로 받아주시는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 앞에서 망했다고 합시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완전히 끝장이 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독수리 새끼가 땅에 머리를 부딪쳐 즉사했다면 그 어미의 체면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독수리처럼 다루신다고 하시면서 독수리 같은 하찮은 날짐승도 하지 않는 실수를 하나님이 하실리 없습니다.
둘째로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독수리 새끼가 여러번 떨어지는 훈련을 통해서 결국은 스스로 날 수 있게 되듯이 우리 역시 어려운 고통과 역경을 수없이 거치는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날 수 있는 믿음의 날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은 한 순간에 금방 자라거나 완성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철야기도를 이틀 사흘했다고 해서 우리 믿음이 금방 완성단계로 발전하는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독수리의 날개와 같습니다. 날개에 힘이 생길려면 시간과 연단이 필요하듯이 믿음 역시 강한 힘을 가지려면 시간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험한 경로를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그가 가진 신앙의 날개는 더 튼튼합니다. 이 사실은 목회자에도 진리로 통합니다. 강단에 서는 목사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과거 경력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그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인지 아니면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이 둥우리에 앉았다가 나온 사람인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면 일반적으로 믿음이 좋은 편입니다. 그의 믿음에서 매우 강한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어려움이 별로 없습니까 너무 행복한가요 그렇다면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아직도 둥지 안에 있는 새끼 독수리의 날개와 비슷한지 모릅니다. 스스로 날지를 못하는 어린 믿음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공중에서 던지는 훈련을 통해서 자라지 못한 믿음은 날으는 흉내는 낼지 모르지만 실은 한마당도 나르지 못합니다. 고작해야 땅에서만 바둥대고 맙니다. 행복이 믿음을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추천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불행이 강한 믿음을 만들어 주었습니까 절대로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어려운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날개가 힘을 얻어서 스스로 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반복된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에게 힘있는 날개를 달아주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높이 날으는 믿음

드디어 독수리 새끼는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낼가에 힘이 생깁니다. 날기를 시작합니다. 새끼가 날기 시작하면서 그는 어미가 날으는 데로 따라 갑니다. 높은 고공으로 힘있게 솟구칩니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비로소 독수리다운 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날개를 달고 높이 날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두더지처럼 땅만 파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고공을 날으는 믿음의 생활입니까 바로 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
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독수리는 멀리서 폭풍이 접근하면 본능적으로 금방 알챈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폭풍이 몰려 오는 방향을 향해 날개의 각도를 조정하고 기다립니다. 세찬 바람이 지나갑니다. 그 바람은 독수리를 떨어뜨리거나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고공으로 치솟게 합니다. 알맞은 각도로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바람

의 힘을 역이용하여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오른 높은 창공에는 폭풍이 미치지 못합니다. 아래에는 폭풍우가 마구 스쳐 지나 가지만 그는 유유히 그 전경을 내려다 보면서 여유있게 하늘의 그 광대함과 찬란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힘있게 날으는 날개를 준비한 독수리에게는 폭풍우란 전화위복을 가져오는 한낱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강한 날개를 준비하고 있으면 인생의 폭풍우라해도 큰 위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날개가 없는 사람은 폭풍우가 몰려 오면 이리 얻어 맞고 저리 얻어 맞습니다. 나중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립니다. 인생의 폭풍우를 감당할 믿음이 없으니까 매일 얻어 맞다가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즐거운을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니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믿음의 날개가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몰려 온다고 합시다. 어떻게 할까요 30°각도로 믿음으 날개를 조정할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엄습한다고 합시다. 틀림없이 60°각도로 조정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드디어 바람이 몰려 옵니다. 어떻게 됩니까 놀랍게도 그 바람이 더 높은 경지로 우리를 밀어 올려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기이한 평강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기다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찬송과 감사가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두려워 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연단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의 경지

여러분! 이와 같이 믿음의 날개를 달고 높이 날으는 것은 누구의 생활과 같다고 생각합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떠오릅니다. 하박국은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는 왜 선한 사람이 날마다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은 저렇게 만사가 형통한지 대답좀 해달라며 하나님께 대들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보라 그 마음이 교만하여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 같지만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이 아무리 어려운 문제 속에서도 나중에는 살아 남는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귀한 진리를 가슴에 소중히 담았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하박국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당시 유대나라는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적군이 진격해 오고 있다는 불길한 소문이 파다하여 듣는 이마다 간장이 녹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쑥밭이 되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두려움 뿐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
18-19)”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고되어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고통하지 마세요. 믿음의 날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천국의 생활을 맛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날개가 힘이 없어서 높이 창공을 날으지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우리가 강한 믿음의 날개만 달면 그래서 높이 솟을 줄만 알면 언제나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바위에서 샘이 터지는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풍성함을 맛보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도 이와 같은 높은 경지를 날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국의 죠지 뮬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80대 노구를 이끌고 신학교 학생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의자에 앉은 채 강의를 해준 일이 있습니다. 강의 가 끝날 무렵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죠지 뮬러 선생님, 일

평생 동안 선생님은 만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먹여 살리시고 십만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을 도와 주고 허드슨 테일러를 위시하여 많은 선교사들에게 2만권 이상의 성경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액수로 따져서 총 8백만불 이상의 돈을 쓰셨습니다. 빈 손으로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죠지 뮬러는 의자에서 힘을 주어 겨우 일어나더니 의자를 마주 보고 돌아서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의자 위에 두 팔을 얹고 깍지 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있다가 일어나더니 “이게 비결이요. 나의 비결은 이것 뿐이었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승리할 수 있을까요 높이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날개를 가지고 더 높이 날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차원 높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의 훈련의 과정이 있다면 우리는 감사하면서 잘 견디어야 합니다. 힘찬 믿음의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 하늘을 날으는 신앙인이 되기까지 인내하면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종종 당신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시고 높은 하늘에서 떨어뜨리시는가 하면 다시 받아 올라가서 당신이 힘찬 믿음의 날개를 유유히 펄럭이며 스스로 높이 날 수 있기까지 당신을 훈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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