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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말씀과 공궤 (행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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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교회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른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란 성령을 받았다고 갑자기 눈덩이처럼 커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믿음이 없 거나 적은 사람도 성령을 충만히 받기만 하면 그 순간 콩나물 자라듯 믿음이 자 라거나 생겨 버리는 줄로 착각하는 자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렇치 않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정말 놀라웁 도록 큰 은혜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세워진 초대교회가 그렇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자신들이 교회 안에서 등한히 여김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곧 교회를 향해 원망 하고 불평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그 문제를 수습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무 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를 알게 해 주어야 할 필요성과 또 교회가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그 문제를 효율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원칙들을 갖고 있 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부흥발전하고 성장함에 따라 문제들도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성 장해 나가면서 문제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완전한 지상 교회 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성도라도 또 어떤 교회의 목회자라도 자신이 직접으로 몸담아 섬겨 나가고 있는 교회에 완전함이 있기를 고대하고 소망하면서 문제없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누구라도 원하는 일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천사도 아니요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 상으로 변화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잘 섬겨도 흠과 티가 있고 아무리 잘 믿어도 우리에겐 언제든지 많은 문제가 생겨 납니다. 본문에 나타난대로 한다 면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고 이에따라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탄생되어 사 도행전 6장도 지나지 아니하여 벌써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교회는 구속사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예사로운 교회 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려고 했던 그리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세 워진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문제는 금방 생기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하는 일은 대단히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성장에 따라 교회를 떠 바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망각해 버릴 수도 있으며 근본적인 문제 를 도외시할 수도 있는 경향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다든지 교회가 근본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교회는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각 선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발맞추어 성도 개인도 각 선교회도 각 기관과 부속회도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교회를 마음과 뜻이 하나된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 니다.

그런데 교회는 처음에 중요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요치않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문제가 생기고 위기가 닥아올 때는 지금까지 우선적으로 치중하고 있던 일들을 버리고 근본적으로 무엇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 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치 않는 경우에는 판단력이 마비되어 무엇이 근본적 인 문제인지를 몰라 미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나타난 초대교회는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문 제의 해결책은 무엇이었는지 상고하면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적인 교훈과 주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시기를 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제자의 수가 많아진 가운데 구제문제로 서로를 원망하게 된 초대교회의모 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일들과 전도하는 일들을 전념하므로 제자의 수가 본문 1절 말씀처럼 많아지기 시 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외부 로부터 오는 핍박 곧 박해와 그들 내부으로 오는 문제로서 갑자기 교회가 부흥하 므로 미처 대처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나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나타나는것 들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그때에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고 하는 일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해야 할 일들이었지만 부흥되는 이유때문에 서로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들이 생기고 파당들이 형성되었다는 rzJ요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 니다.

그리하여 결국 구제하는 일로 인하여 서로가 부딛혀 복음전파에 대한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된 것입니다.여기서 서로가 원망하게 된 것은 가난한 과부들을 교회 안에서 돕는 일 때문에 생기게 되었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와 전도자들은 박해를 받을수록 더욱 왕성하게 일들을 하 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 특징이었는데 제자들의 수가 증가되므로 원망이 생겼다는 것은 한마음이었던 초대교회에 마음의 분열이 나타난 적신호로서 우리들에게 대 단한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종종 수가 많아지므로 문제가 발생되었던 일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6:1 이하에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 람의 딸들을 취하여 타락하므로 땅에 죄악이 관영하게 되어 홍수로 심판하시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 사이에도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서로 다 투는 일들이 있으므로 서로가 갈라서야 하는 비통한 일이 기록되고 있습니다.(창 13:6-11) 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나라를 창성케 하셨으나 그 즐거움은 더하지 않으셨다고 외치므로서 수의 늘어남이 죄악의 늘어남이 되어 하나님께 기쁨이 되 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초대예루살 렘교회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헬라파 유 대인이란 그리이스나 로마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헬라어를 익혀 사용하던 유대인 들로서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가 개종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살던 자들이며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팔레스타인 출생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자들이었 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언어가 다르다는 것보다도 언어를 구사할 정도가 되면 상 당한 시간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요,언어 사용에 따른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언어권 지역의 습관과 풍습이나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 니다.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지므로서 하나님의 선 민사상이 많이 의식 속에 남아있는 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아람어는 히브리 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셈족의 언어였습니다. 성경에는 아람어의 표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예로 "달리다굼"이나 "마라나다" 또는 "에바다"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표기들입니다.

또 헬라어를 쓰고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그들은 그리이스나 로마 등지에서 살았 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이방적인 사고방식이나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가 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들로 사고 방식이나 의식이 각기 달라서 서로가 원망하는 일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하다가 우리 교회에 입교한 성도들이 교회에 봉 사하는 어떤 일들로 인하여 견해 차이를 가지고 서로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도 있 습니다.

왜냐하면 기존해 있는 사고방식이나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배운 것이 새로운교회 에 와서 순식간에 해소되지 않은 연고로 이해가 안된다든지 용납이 않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이스말(헬라어)을 쓰는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향 해 원망을 했습니다. 원망한 이유는 개역 성경보다 새번역 성경이나 공동번역 성 경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번역되고 있는데 공동번역의 1절 하반절을 옮긴 다면 "그것은 그들의 과부들이 그 날 그날의 식량을 배급받을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개역에는 식량배급을 공궤라고 번역) 즉 구제를 베푸는 일에 있어서 히브리파 유대인의 과부들이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보 다 더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견해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실제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자기들 의 과부들에게 구제하는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로마나 그리스 지역에서 살다가 다시 이주해 온 헬라파 유대인들이 믿음이 훨씬 적어서 교회 안 에서 예배를 드리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영적인 것보다 육신적인 생 각에 더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여기서 견해의 차이란 헬 라파 유대인들은 헬라의 지성적 사고가 많이 담겨져 있어서 민주적으로 누구나공 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은 구약시대 때부터 꼭 해야 할 일 중에 하 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서신을 보낼 때에 참과부를 잘 경대 하되 과부의 명단에 올릴 자는 나이 60이 넘은 자로서 한 남편의 아내였다가 홀 로 된 여인을 참과부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딤전5:3,9,16)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졌지만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소란스 럽고 문제가 파생했다는 일은 이해가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만 교회의 문제는 사 소한 일들로부터 시작되어지며 그 사소한 일이 교회의 본질문제와 관련이 있을 때 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구제라는 명목으로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초대교회의 문제 점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목적으로서가 아닌 수단으로서 존재하지만 부흥자체가 교회의 목적일 수도 없고 구제라는 수단이 교회를 교회다웁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는 부흥이라는 목적과 수단이라는 교회의 많은 사업들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행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흥이라는 목적은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므로 달성되 었지만 구제(공궤)라는 수단이 잘못된 교회였습니다.

구제를 하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공궤를 일삼기 위해 말씀을 제쳐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사도 들이 교회를 심히 책망하고 있습니다.거룩한 그리스도의 지체를 혁명적인 사회해 방의 장으로도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국가의 어느 기관처럼 구제소 로 삼아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많은 핀잔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교 회가 돈을 모아 다 무엇하느냐는 것입니다.심지어는 성도들마저도 말씀을 제쳐놓 고 우리교회는 많은 헌금을 가지고 구제사업에 힘쓰지 않고 무엇하는지 모르겠다 고 하는 분들도 간혹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치중하지 아니하고 공궤를 일삼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는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말로 벼락맞을 이야기입니다. 초대 예 루살렘교회는 구제자체 때문에 문제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구제는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인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제를 한답시고 말씀을 제쳐놓을 수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는 구제가 우선이 아니라 복음선포가 최우선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제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기관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영 혼을 구원하고 많은 심령이 주께로 돌아와 변화를 받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줘야 할 거룩한 기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잃어버리고 구제에만 힘쓰 다가 말씀을 무시해버리고 공궤만을 일삼는 구제사업소로 전락을 시켜버린 결과를 빚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강 단에서는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져야 하고 그 말씀은 영혼 구령 을 위한 선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구제도 장학사업도 사회참여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초 대교회는 구제를 위해 말씀을 제쳐놓는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을 저지른 것 입니다. 말씀이 없는 교제나 말씀이 없는 구제나 말씀이 없는 어떤 선한 사업이라 도 그것은 반드시 다툼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킬뿐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는 못합 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많은 교회들 가운데는 말씀이 교회본질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땅에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구제 나 하는 그런 일은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 가장 먼저 영혼을 구 원해내야 합니다. 이 일을 무시한다거나 소홀히 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셋째로 말씀과 공궤라는 문제로 서로간에 원망이 일어난 초대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했는지를 살펴 봅니다.

 말씀과 공궤에 있어서 우선권을 말하라고 하면 분명 말씀이 최우선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선순위가 말씀이다고 하는 간단한 문제로 여길 수 있는 그런 것으로 가 볍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찌 감히 말씀을 공궤와 견주어서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사도들은 교회 의 제자들을 불러모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그들에게 교 회에서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전무하겠다 고 선언했습니다.

이제는 교회의 기능이 제대로 움직여가도록 제도와 조직을 만든 것입니다. 공궤라 는 수단은 너나 나나 무작위로 하지 않고 짜임새있게 하므로 서로 원망하는 일이 없 도록 만들고 교회의 가장 큰 기능인 복음전파는 사도들이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습 니다.

그리하여 말씀은 말씀대로 권위를 갖게되었으며 구제는 구제대로 아름답게 이루어 져서 교회의 참다운 모습을 만인 앞에 나타내 보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초대교회는 구제를 통하여 율법의 교훈과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로 그리고 율법을 완성시키는 그 리스도의 복음이 은혜로 역사하는 교회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즉 교회는 구제라는 사회참여와(보수주의 신학은 구제를 사회참여로 해석할 수 없 다고 하겠지만) 영혼구원이라는 대명제의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 갈 수 있는 면모를 갗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수습한 초대교회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교회의 놀라운 부흥 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 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 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제쳐 놓았던 교회가 말씀을 회복하니 말씀이 왕성한 참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제사자의 무리들도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는Z신뻬 대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말씀의 회복을 해야 합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기 위하여 교 회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할 때에 낭독한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 앞에 부복하며 통회하며 자복하는 영적 대각성 이 일어났던 것처럼(느8:1-12) 오늘날의 교회도 이러한 체험을 예배때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교회로 회복되도록 그리고 말씀의 능력 앞에 영적대각 성이 일어나도록 깨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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