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화근2, 가드 (수 11:21-23)

첨부 1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삼상 17:4-7)”
이는 이스라엘의 대적 골리앗에 대한 묘사이다. 이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다음과 같은 말로 모욕한다.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 17:11)”
우리는 이 다윗과 골리앗 사건을 참으로 잘 안다. 이 사건은 단지 어린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천하무적 골리앗을 이겼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가드를 남겨 놓았기 때문에 벌어진 싸움이라는 데에 사무엘상 17장에 전 의미가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이방 족속들을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을 남겨둔 것은 세상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지적한다. 그 결과 사사기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함으로 어떤 심각한 꾸중을 당하는가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블레셋에게, 모압에게, 암몬에게, 아말렉에게 모든 인근 국가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지독스럽게 시달리는가 적이 강해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몰아내지 못한 세상의 것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며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여리고 성은 일곱바퀴 돌고 소리질러 무너뜨리고 승리한 싸움이다. 다 이긴 싸움에서 그들이 쫓아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곳이 가사요, 가드요, 아스돗이다. 이방의 적들에게 계속적인 공격을 당하면서 이스라엘은 이것을 불순종의 결과로 보지않고 군사 정치적으로 상대보다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왕을 세워 달라고 간청하고 그래서 사울이 초대 왕이 된다. 이점이 성경기록의 재미있는 점이요, 참으로 지독스럽도록 무서운 부분이다. 우리가 남겨둔 죄의 뿌리가 성장하여 큰 위협이 된 것을 쳐다보지 못하고 커진 사건을 이겨낼 힘만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싸움이다. 그것에 대한 반증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7:31-37)”
이 다윗의 고백에서의 재미있는 점은 상대방의 크기와 관계없다는 원리를 갖고 있는 점이다. “나를 사자의 발톱에서 꺼내신 하나님이 골리앗에게서도 이기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일한 싸움이기 때문이다.”이것이 다윗의 신앙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자들이 오해하는 싸움의 원리는 이 싸움을 외형적 크기나 세력으로 해결하려는 데 있다. 적이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남은 정도로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골리앗이 나오자 그보다 강한 용사와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풀어야할 문제라는 것을 그가 안다. 이것은 외형적인 싸움이 아니라 원리적인 싸움이다. 즉 너희가 가드에서 남겨두었던 그 죄의 뿌리에 관한 싸움이요, 나타난 현상의 크기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목동 다윗을 들어 골리앗과 싸우게 하시는 것이다. 다윗이 강한 자였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무너드릴 수 있었던 원리가 오늘 다시 몇십 년, 몇백 년 후에 그 자손에게서 싹을 본 것일 뿐이다. 그때 용서해서는 안되었던 것이고 그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었다면 지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절대 방치해서는 안되었던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큰 위협으로 드러났는가에 대해서만은 뼛속깊이 기억하라는 것이 다윗의 사건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결단코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로 말미암아 해결하지 않는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
우리 신앙의 약점은 너무 두리뭉실하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사건에서 왜 다윗을 등장시켜야했고 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을 전전긍긍하는 엑스트라로 동원하시는가 하는 대목이다. 그때 없애지 못해 지금 벌벌 떠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같은 원리로 오늘 그것을 제거하여야 한다. 외형의 크기와는 절대 비례하지 않는 신앙의 싸움인 것이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수 11:21-22)”
결혼할 때 배우자가 신앙없는 것이 지금 당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지금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뿌리를 바로 하지 못할 때 나중에는 그들이 골리앗이 되어 칼을 들고 나오고 극심한 고통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만을 진정 두려워 해야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남편과 아내로 자식으로 길러야 한다. 여러분이 남겨둔 가드에서 골리앗이 무럭무럭 잘도 자라고 있는 것이다. 지금 뿌리를 뽑아야 한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고, 온갖 기적을 베푸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모욕하는데 다윗은 피가 거꾸로 역류한다. 이스라엘이 먹는 욕은 오늘 우리가 먹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이라도 “저들이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야 한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서 골리앗을 넘어 뜨렸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을 또 보자.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 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르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 죽였고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 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손과 매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 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삼하 21:15-22)”
가드 사람들은 결국 다윗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나타난 외형의 크기로 누가 더 크냐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뽑아 버려야할 영적인 순결과 거룩에의 싸움인 것을 알아야 된다는 이 교훈을 성경은 여기까지도 지속시키는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르러 올라갈 때에 물맷돌 다섯개를 가지고 올라간다. 여기 21장에 있는 이 기록과 비교해서 보면 아마 그때 이 사람들도 다 올라와 있지 않았는가 짐작이 된다. 다윗은 이때 이미 이 네사람을 모두 죽일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동 하나가 골리앗 하나를 감당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데 나머지 네사람까지 합하여 가드의 장대한 자 넷을 모두 죽일 것을 확신하고 물맷돌 다섯개를 들고 올라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싸움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영적인 순종으로부터만 시작된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였고, 부하들이 골리앗의 아들들과 신복들을 모두 죽였다. 하나님은 다섯개의 물맷돌을 모두 다 사용하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뽑아내어야 한다. 뽑아내는데 실패해서 그것이 크게 지금 나타났다해도 그것을 두려워 말라. 이제라도 다시 무릎꿇어 영적인 문제로 해결하라. 쳐들어온 상대방, 생겨난 사건, 부닥친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을 만나게 된 내가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한다. 거기서부터라도 문제의 발단의 원인을 캐고 해결하여야 한다. 하나님만 두려워 하면 그만 의지하면 여전히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