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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확고부동한 진리 (히 09: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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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불확실한 세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우리의 미래도 국가의 장래도 인류의 미래도 다 불확실합니다. 세계역사가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1년후의 일도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달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라는 것도 그러합니다. 이 세상리란 가변적(가변적)인 것이지 불변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 진리나 과학적 진리등 모든 진리가 다 가변적입니다.

어떤 한 학자가 오랜 연구 끝에 발표된 진리가 한 세대도 지나가기 전에 업세트(upset), 뒤집어지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새로운 학설도 얼마후에 또 뒤집혀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천지도 변합니다. 우주안에 있는 삼라만상이 다 변합니다. 계절도 변합니다. 인간도 변합니다. 인심도 변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1장9절에 보면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세상의 모든 진리가 가변적이지만 영원히 변치않는 한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변치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불변하십니다.

오늘 이 아침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 확실한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본문을 상고해 보면서 변치않는 확실한 진리 몇가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본문 23-26절에 밝히고 있는 대속의 진리입니다. 인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시도를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리기도 했지만 그 모든 시도들은 좋은 효과를 거두지도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 보니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속죄제를 드린 다음에도 다시 죄를 범하게 되고 속건제를 드린 다음에도 다시 허물을 갖게 되고 화목제를 드린 후에도 다시 불목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3절이하에 보면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피 죄를 없이 하지못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제사를 통해서도 죄를 완전히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10절 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시대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어떤 죄를 범했으리자도 죄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고를 통하지 않고 죄사함받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둘째로 확고부동한 진리는 죽음이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27절 말씀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웅열사, 호걸, 군왕, 정치가, 재벌, 지식인, 과학자, 의사, 철학자, 종교인 등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옛날 한무제(한무제)는 승로반에 이슬을 받아먹으며 영생불사를 소원했지만 죽고 말았으며,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500명씩을 동방으로 보냈던 진시황도 불사약을 구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고 큰소리쳤던 나폴레옹도 세인트헬레나 고도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으며 공중의 새도 떨어뜨릴만한 큰 권세를 구가했던 히틀러(Hitler)도 지하실에서 자살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다니엘 4장 30절에서 이 큰 바벧론은 내가 내 능력과 권세로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기를 과시했던 느부갓네살왕도 티그리스 강변의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주후 1세기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네로황제는 15년간 왕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너무나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살던 왕궁은 복도의 길이만도 1마일, 그러니까 약 5리 가까운 길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궁안의 모든 벽은 상아와 자개로 장식을 해놓았고 천정에는 특별한 샤워장치가 되어 손님들이 오시면 향수를 이슬처럼 뿜었답니다. 네로황제가 머리에 쓰고 있던 황금관은 10만달러, 8천만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타고 다니던 노새와 조랑말은 은으로 장식한 신발을 신겼고, 출타를 할 때는 천명 정도의 군사와 수행원과 마차와 말들이 뒤따랐으며 그가 낚시질을 할 때는 금으로 만든 낚시 바늘을 사용했으며, 값비싸고 좋은 옷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한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행복하다거나 만족하지 못했고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허무와 공포 가운데 살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오래 살려고 하고 건강하게 살려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각사람에게 정해놓은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식을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할당된 양을 빨리 먹어치웠기 때문에 빨리 죽는다고 하고 소식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할당된 식량을 먹을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오래오래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래오래 사시려면 과식하지 말고 소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좀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과 죽음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 모세는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는 건강이 있었지만 결국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인데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 다 죽어도 자기만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라는 심리학자가 임종이 가까운 사람 6백명을 대상으로 조사연구를 하여 " 죽음과 죽는 법"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섯 단계를 거치면서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는것을 환잔가 알게 될 때 첫째 단계에서는 우선 부정을 한다(deny)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튼튼한고 건강한데 왜 내가 죽어 아마 의사가 오진을 했겠지 하면서 부인한다고 합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분노(angry)한다고 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동안 살아보려고 잘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했는데 이제 살만하니까 죽게 된다니 억울해서 어떡하나 하면서 분노를 터뜨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타협(compromise)을 한다고 합니다. 억울하다고 몸부림치고 분노를 터뜨려 보아도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게 되느냐 천국이내 지옥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네번째 단계는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보람있게 인생을 보냈을텐데, 진작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였더라면 부끄러운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서지 않게 될터인데 하면서 깊은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수락(accept)을 하게 됩니다. 억울해도 할 수 없고 부끄러워도 할 수 없고 이 모습 이대로 가는 수 밖에 없지 않는가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진리인 것입니 다.

 셋째로 확고부동한 진리는 누구나 죽은 다음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 입니다. 오늘 본문 27절 하반절에 보면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이는 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2절에 보면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하였 습니다. 산 자란 그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을 의미하고 죽은 자란 그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우리 주님께서 영혼이 죽어있느냐 살아있느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천국창고에 들여보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보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 목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그때 양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나라에 들아가서 영원히 영광을 누리게 되지만, 염소들은 창세로부터 마귀들과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캄캄한 지옥불 속에 던짐을 받아 그곳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쓴 `오라 티글도'라는 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헬라의 어떤 군인이 전장에 나가서 중상을 입고 죽었습니다. 얼마 후에 사람들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줄을 질러 불사르려고 하였는데 그때 그 군인이 다시 살아나서 자기가 죽어있는 동안에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가는데 두갈래 길이 나타나더랍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 심판자가 있어서 한사람씩 심판을 하여 갈 길을 가게 해주는데, 세상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사람은 오른편에 있는 하늘나라 가는 길로 보내주고 세상에서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나는 이런 죄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팻말을 들고 왼편의 지옥에 가는 길로 보내더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예수님께서 양과 영소를 가르는 비유와 비슷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양이 되어져 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엽접하 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은 지옥불 속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데 하늘 나라에 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이 뒤따르게 되어집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달란트비유가 밝히고 있듯이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열심히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받고 두 달란트를 받아서 열심히 장사하여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아서 그것을 꽁꽁 싸서 땅 속에 감추어 둔 사람은 한 달란트마저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내어쫓겨서 부끄러 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니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후에 두가지 사실을 약속하고 있는데 첫째는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라고 하였고, 둘째는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첫째 약속은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고 둘째 약속은 천국에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공수래공수거(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은 이 세상에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들고 가지 못한다는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측면에서는 빈손들고 왔다가 빈손들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고 태어나고 세상을 떠날 적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했던 모든 업적을 들고서 하나님 앞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받아 구원받으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데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생명책을 펴놓고 세상에서 얼마나 충성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았느냐에 따라 행위대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절대로 빈손들고 왔다가 빈손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에 따라 얼마나 충성했는가 하는 실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도들 가운데 십일조를 드릴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죽은 다음에 재산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재산을 세상에 그대로 두고 세사을 떠나기 때문에 유산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심지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법정싸움을 하게 됩니다. 요새 기업인들 가운데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교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사찰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기독교인 가운데도 최근에 그런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모교회 장로님 등 많은 분들이 생존시에 재산을 정리하여 자식들에게 줄 것은 미리 나누어 주고 교회에 바칠 것은 모두 바쳐버리고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재산에 대하여 유서를 공증히야 목사님께 맡기고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 유서의 내용은 내가 죽으면 내 모든 소유를 교회에다 바칩니다 그것으로 예배당을 신축해 주십시요 한분도 있고 내 재산을 가지고 기도원을 세워 주십시요하고 쓴 분도 있고, 병원이나 학교를 세우고 선한 일에 사용해 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 주십시요라고 유언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피땀흘려 모은 재산이지만 지거나 안고 가지 못합니다. 그 재산을 어떻게 가치있게 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잘 처리해 놓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이니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언제 부르심을 입더라도 부끄러움없이 주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니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뿐만 아니라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붙들고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 와서 무엇을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들고 가느냐가 결정되는데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무엇을 들고 가게 되느냐 주님께로부터 어떤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면서 이 땅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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