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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미 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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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법과 질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양심과 규칙이 있고 종교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파멸이 옵니다. 백성의 지도자를 세우는 이유는 정의와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법에 맞게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길을 가려고하면 몇 가지 주의할 일이 있습니다.

1. 자기 자신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1-4절)미가의 신랄한 고발은 그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에게 향합니다. 이제 직접 이 치리자들을 향하여 미가는 “공의를 알 것이 아니냐”하는 저들의 특별한 책임을 지적하게 됩니다. 물론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백성이 다 종래의 법적인 모든 관습을 다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층에 자리잡고 잇는 치리자들은 분명히 “악을 사랑하고 선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매우 대담한 말로써 미가는 그 백성의 지도자들을 마치 동물을 잡아 요리하여 먹는 근동지방의 도살자들과도 같이 여겼으며 또한 동물의 가죽을 벗겨 그 뼈다귀를 꺾어 부수어 솥에 넣은 후 스우프의 원료를 삼는 동물과 같은 백성에다 비겼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의롭게 살 수가 없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백성의 살과 뼈로 자기 만족을 채우려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악행을 차마 보실 수가 없으시므로 얼굴을 가리시고 심판하십니다. 옳게 일하려는 사람은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내 길을 찾아야 질서가 서게 됩니다. 백성을 위하는 정신으로 살 때 정의가 구현될 것입니다.

2. 사람을 두려워말고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5-8절)두 번째 고발에서, 미가는 “내 백성을 유혹하는” 예언자들에게로 향합니다. 미가의 고발 가운데는 인망있는 예언자의 대다수가 엘리야나 엘리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성의 헌신과 관대한 아량으로 말미암아 지지되어 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에서 찾아 볼 수 있으니 다른 예언자들 가운데는 재정상으로 독립적이었으며, 그 땅에 널리 퍼져 있는 예언자들의 그룹과도 자신들을 동일시 하지 않았던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미가의 고발은 아모스가 거부한 어떤 예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외치는 메시지가 그 양들을 얼마나 잘 먹였느냐에 의존한 문제입니다. 만일 저들이 어떤 동리에서 크게 용납되었다면, 저들의 메시지가 ‘평화’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촌락에서 잘 용납되지 않을 경우, 이 무능한 예언자들은 그 주민에게 일종의 거룩한 전쟁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결국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두려움을 가져오게”됩니다. 요컨대 거짓 예언자들과 유혹케 하는 예언자들과 술객들에게는 완전히 만물을 분간못할 밤에 찾아들 것이며 이로써 저들은 백성 앞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고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미가의 말 가운데서 우리는 저들이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는 흔적을 차장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은 자신의 이름에서 외쳤기 때문에 수치를 당할 그 날에도 아무런 말없이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이런 은총이 결국 저들에게 부딪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른 한편 미가는 자기 자신을 참된 예언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하나님 자신의 충만한 영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가는 희구한 그의 자서전적인 선언 가운데서 자신의 예언자직을 거짓 예언자들의 그것과 대결시키고 있습니다.참된 선지자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주저함이 없이 전달합니다. 돈이나 권력에 압도되어 그들의 비위에 맞는 거짓 선지자를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독재자의 칼이 두려워서 받지도 않은 거짓 이야기를 한다면 나라꼴은 말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므로써 회개를 촉구하게 될 때 공의가 바로 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3. 양심의 법을 어기고 돈만을 위주할 때(9-12절)세 번째 고발에서 미가는 전에 그가 고발한 바 있는 두 가지 범죄사실을 요약하는 한편 모든 지도자가 범한 근본악을 강조하면서 자기 백성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에게 화살을 던집니다. 저들의 공의가 땅에 떨어진 것은 폭력과 뇌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리하여 미가는 이 두가지 악에 대한 지도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저들은 “시온을 피로 세우며”, “그 두령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재판의 책임을 져야할 뇌물이 있었습니다. 이미 미가는 돈을 위하여 점치는 예언자들을 규탄하고 있으며, 이제 계속해서 미가는 “삯을 위하여”가르치는 제사장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재판장은 뇌물에 의해서만 그리고 제사장과 예언자는 금전에 의해서만 어떤 만족을 두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관심은 단순히 저들의 직업적인 도움을 그 땅의 가난한 백성을 위하여 유용하게 활용하게 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공동체의 멤버들이 각각 하나님의 능력과 영향과 지식으로써 어떤 댓가 이상으로 주어진 자기들의 특권을 적절히 행사하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부문에 걸친 봉사가 반드시 어떤 댓가를 요구하게 된다면 공의와 진리와공평무사한 공공봉사의 고귀성은 그 공동체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 위험에 빠집니다.미가 시대의 지도자들은 “야웨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 위에 임하지 아니하리라”는 말투로 경건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미가는 “너희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폐허의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재판은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해야 합니다. 권력이나 돈에 좌우되어 의로운 사람이 무고하게 고난을 받고 악인이지배하는 세상이 된다면 그 나라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될일도 돈이 없으면 안 되고, 돈만 주면 안될 일도 척척 통과되는 사회의 부조리는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법이 돈에 좌우되고 정의가 힘에 짓밟힌다면 그런 사회는 깊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절대적인 권력과 돈은 그 사회를 썩게 만듭니다. 돈에 좌우되지 않은 사람이 바른 사람입니다.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는 자신의 입장을 떠나서 백성의 입장을 생각하고 사람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말하고 돈이 아니라 법과 양심을 따라 판단될 때 실현되는 것입니다. 공의가 행해지는 사회는 밝고 행복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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